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곽민주 Jul 03. 2024

연민과 연인을 구분할 수 없었어

#시립미술관


  광주는 생각보다 예민한 도시다. 그 도시의 표면을 손끝으로 살짝 건드리면 툭하고 울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다. 호기롭고 도도한 외양과 달리 세심한 감정을 담고 있는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광주에 대해 알아가는 동안 그런 면이 가장 조심스러웠다. 혹시나 나의 세심하지 못함으로 인해 다툼이 발생할까봐, 혹시나 더 멀어질까봐 먼저 다가가는 것이 매우 어려웠고, 후에는 내 마음이 조마조마해져서 동생을 대하듯, 친구를 대하듯 장난을 시작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는 말이다.



  예민하다는 건 그만큼 감수성이 발달했다는 뜻이다. 감수성이 발달한 아이들은 스스로의 감정이 모래알처럼 쉽게 부서지기도 하지만 타인의 감정을 세심하게 살피고 보듬을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났다. 타인을 이해하고 들여다보는 능력은 예술성을 발달시키는데 도움이 된다. 마음이 지치고 힘들 땐 예술에 기대는 것이 답이 될 때가 있다.


  나 역시 일정량의 예민함을 담고 있다. 그러나 외향적인 성격을 타고난 탓에, 어릴 때부터 가정이라는 작은 사회에서 결정권과 판단력을 부여 받았기 때문에 대체로 타인을 살피는 능력이 부족한 편이다. 게다가 나는 나의 감정을 쉽게 외면하고 무시한다. 가장 후순위로 두고 있다. 속상한 일이 있었을 때에도,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화가 날 때에도 우선은 ‘일’, 마음을 보듬는 일보다 일거리가 될만한 것을 가장 우선 순위로 생각하려 한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빌어먹을 책임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일적인 면에서는 늘 성과를 거두는 편이었지만 나는 사람들에게 다정하거나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되지 않았을 것 같다. 쓸모는 있지만 그 이상의 거리를 만들고는 싶지 않은 사람. 어쩐지 기계같은 사람. 별로인 사람. 실제로 나는 주변으로부터 기계 같다는 말을 종종 듣곤 했다.



  광주는 잘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들의 도시다. 광주에선 예술과 관련된 콘텐츠를 쉽게 접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비엔날레’와 ‘ACC’다. 비엔날레는 이탈리아어의 어원을 딴 것으로 격년에 한 번씩 열리는 국제미술전시회다. 1995년부터 운영되었다고 하니, 내 나이만큼 꽤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특히나 광주의 비엔날레는 아시아에서는 첫 번째로 생겨난 곳이라고 한다.


  유쾌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도착한 비엔날레. 기사님은 우리에게 요로코롬 즐거운 여행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와 함께 손까지 흔들어주며 떠났다. 그리고 내게는 차량 번호와 연락처가 있으니 언제든 맘이 바뀌면 연락을 해달라는 신신당부까지 했다. (그리고 얼마간 진심으로 고민했음을 이제야 밝혀본다)


  비엔날레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광주 시민들에게 그저 평범한 공원으로 보였다. 현대적이고 단단한 이미지를 지닌 건물의 분위기와 달리 근처 주민들로 추정되는 이들로 북적였다. 마치 한강이나 양재천을 거닐 듯 비눗방울을 불기도 하고, 킥보드나 자전거를 타기도 했다. 비엔날레에서 이어지는 시립미술관에는 잔디밭 위로 돗자리를 편 가족들로 꽉 차 있었다. 그래서 의외였다. 쓸쓸하지 않고, 다정한 분위기여서.



  서울의 박물관과 미술관 앞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멋스런 이미지와 위엄을 지키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근처에 주민이 없기 때문일까. 서울은 냉정하게도 각자의 역할분담이 철저하게 이루어져 있다. 돗자리를 펴고 야영을 즐기는 곳은 한강,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은 놀이공원. 미술관과 박물관은 고요하고 조용하다. 나는 광주를 바라보며 응집력에 대해 생각했다. 물론 한강에서도 모여 있는 사람들은 많이 볼 수 있다. 연을 날리는 아이, 두발자전거의 안장에 얹고 있던 손을 막 떼는 부모. 손을 맞잡은 채 나무와 나무 사이를 거닐던 노부부. 잔디밭의 울타리를 잽싸게 뛰넘던 고양이까지도. 바로 근처에 아파트 단지가 있었으므로 아무래도 그 사람들은 동네 주민이었을 것이다. 한가로운 오후를 보내던 그 사람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너머에 있던 시립미술관에서 열렸던 전시에 대해 생각한다.



  시립미술관과 역사박물관, 그 등지에 있는 전시란 전시는 다 둘러보았다. 그 중에 가장 화려하고 기억에 남았던 전시가 떠오른다. 박소빈 작가의 <용의 신화, 무한한 사랑>은 ‘용’이라는 소재를 통해 인간 본질을 탐구한다. 특별히 기억에 남았던 것은 그림에 깃든 스토리였다. 작품은 단순히 상상 속의 동물인 ‘용’을 작가의 세계관을 통해 시각적인 자극을 위해서만 담아내지 않는다. ‘부석사 설화’라는 스토리를 차용해 이어지는 그림들 각각에 의미가 부여되고, 작품을 통해 관람객들은 작가의 세계관을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평면적인 소통이 아닌 양방의 커뮤니케이션인 것이다. 사람들은 그림을 통해 그 그림 속에 담긴 이야기만을 살펴보려할 수도 있지만 모든 예술은 결국 한 사람에 대한 이해. 그 작가의 세계관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또한 작가는 자신의 세계에 들어온 인간을 이해하고 탐구하는 것으로 자신의 세계관을 완성한다.



  작년 한 해 동안 나는 내 이야기를 들으러 온 사람들에게 ‘타인을 이해하는 것’을 자주 강조하곤 했다. 우리가 타고난 재료가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 다르니 나와 다른 대답을 하는 사람을, 그 사람이 설사 증명된 사실을, 지구가 평평하다는 말도 안 되는 의견을 내놓더라도 이해로서 보듬어줄 필요가 있다고.


  실제로 나는 처음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을 마주했을 때 그 사람의 세계를 들여다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일반적으로 뼛속 깊이 엔티제인 나는 타인에 대한 관심이 없다. 모든 사고체계가 일을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는 데다 나만의 세계관이 강한 편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람에게 관심을 쏟을 때는 보통 그 사람의 ‘결핍’을 해결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다. 결핍을 지닌 사람을 발견하면 그 사람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숨을 조금 참아가며 그 심연 속으로 조금씩 유영해보고 싶어진다. 손 끝에 도드라지는 감각을 느껴보고 싶어진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에 마음을 쓰고 있는지를 자꾸만 더듬어보게 된다. 나로서는 이해되지 않고, 무례하다는 행동을 했을 땐 그 시점이 언제부터였는지를 톺아보게 된다. 그러다 보면 답이 나온다. 그 사람이 이해가 되어 버린다.


  나는 사람의 눈빛을 조금 보는 편이다. 나의 눈빛엔 ‘촉’과 ‘감’이 잘 발달되어 있다. 나는 사람을 제법 잘 보는 편이다. 아니 그건 누구나 느끼는 감각일지도 모르겠다.



  첫인상에 세한 느낌을 주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건 그 사람의 외모의 문제가 아니었다. 눈빛. 그저 눈빛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뭐랄까.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순수함이 아닌 긴장감과 철저히 계산적인 속내가 엿보였다. 그 친구의 머리 굴리는 소리가 나의 귓바퀴까지 떨어져 있었다는 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눈치가 제법 빠른 편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지나치며 이미 그런 눈빛을 받는 건 익숙하긴 했다.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 중 열에 일곱이 첫만남에 그런 시선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 사람의 눈빛은 관심이나 호감이라기보다는 조금 더 다른 결이 있었다. 내게서 수용과 복종을 바라는 듯한 기묘한 인상을 나는 첫만남에 느꼈다. 어쩐지 겨울 눈송이에 손이 베이듯 몹시도 시리고 차갑다고 생각했다. ‘싫음’, 압도적으로 ‘싫어하는 느낌’을 발견했다. 동시에 생각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멀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그러고 나면 다시는 만날 일이 없는 사람이라고.



  기억을 돌이켜보면 그날 어떤 이야기를 주고 받았는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때의 나는 자꾸만 순간의 행복에 집착하는 사람이었다. 행복하고 싶었다. 특별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내가 포기했던 것들을, 인내하고 견뎠던 시간들을 모두 보상 받고 싶었다. 어쩌면 그건 내 자신에 대한 분노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원래의 성정보다 훨씬 들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순간순간의 감정에 충실하고 싶었고, 내 스스로에게 잘했다고 칭찬을 좀 많이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여기저기 자랑하고 싶었다. 내게 안된다고, 그만하라고. 예술병에 걸려있는 거라고 함부로 이야기하던 사람들에게 아니라고. 그런 게 아니라고. 저항하듯 증명하듯 친절하게 설득하고 싶었다.


  나는 마음이 꽤 연약한 편이다. 마음이 연약한 사람들이 쓰는 소설의 특징은 문장이 지나치게 친절하다는 거다. 굳이 쓰지 않아도 되는 문장을 자꾸만 살을 붙이듯 덧댄다는 것이기도 하다. 합평을 하는 동안 나는 자주 그런 말을 들었다. 문장이 지나치게 친절하다고. 독자는 모든 걸 말하지 않아도 사실 다 안다고. 나는 독자를 믿지 않은 모양이다. 사람들을 믿지 않는 성정이 소설에까지 드러나는 것이다.


  나는 늘 이해받지 못하는 인물을 그려내고 싶었다. 내가 쓰는 소설의 주인공은 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이를 테면 자신에게 대가없는 호의를 베푸는 사람의 마음을 괴롭혀주려는 인물이라거나 실은 무용한데 스스로에게만 몹시 중요한 가치나 기준이 있는 인물. 혹은 자신의 비밀을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화가날 때마다 이해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수렁으로 빠져들어가는 인물에 관심을 가졌다. 그런 사람들은 어딘가에 실제로 존재할 것이다. 나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는 어쩌면 그의 세계에서는 억울하기 그지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사람의 서사가 이해가 되는 순간 나는 한없이 마음이 기울어버린다. 그래서 그 사람을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하고 싶어진다. 이런 사람이 있다고. 너무 미워하지 말라고. 어쩌면 그런 태도는 내 자신을 향한 너그러움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대부분의 어른들이 자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래서 첫만남과 첫 질문엔 ‘좋아하는 것 3가지’를 빠트리지 않고 물어보게 된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좋아하는 것 3가지를 잘 말하지 못한다.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 어렵거나 몹시도 바쁘기 때문이다. 나도 얼마 전까진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한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닌 더 근본적인 나의 성정을 드러낼 수 있는 요소들이 있었다. 바로 ‘달리기’와 ‘비’, 그리고 ‘안티히어로’다.


  달리기가 좋은 이유는 무던하게 오래 할 수 있는 맨몸운동이기 때문이다. 지면에 발을 딛고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불어오는 바람을 마주하는 것이 좋다. 저항력을 이겨내며 달릴 때마다 송글송글 얼굴과 목선, 그리고 쇄골을 타고 흐르는 땀의 줄기를 느끼는 것이 좋다. 운동 후에 개운하게 샤워를 하는 시간도 좋다. 마음에 쌓여 있던 응어리가 스르륵 풀리는 기분이다. 같은 이유로 비가 좋다. 비는 천성적으로 좋다. 빗물이 떨어질 때마다 어딘가에 부딪치며 톡하고 팝콘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좋다. 나 지금 낙하하고 있다고, 뚝뚝 떨어지며 결국 다시 지면의 한가운데에 모일 예정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그런 악바리 근성도 좋다. 바다에 온 듯 코 끝에 스미는 물비린내도 좋다. 마지막으로 안티히어로가 좋은 이유는 자신이 본능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그건 착하지 않음과는 조금 다른 결의 이야기다. 안티히어로는 세상을 구하려하지 않는다. 다만 세상에 구걸하지도 않는다. 나는 그 점이 퍽 마음에 든다.



  시립미술관에서 나온 우리는 곧바로 숙소로 향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숙소 시설이 너무 좋아서 행복했다. 구옥을 개조하여 만든 것 같은 그 숙소는 군데군데 오래된 나뭇결에 윤을 내어 반질반질했다. 오래된 나무냄새와 종이로 덧바른 벽지에서 냄새가 났다. 골목마다 모여 있는 사람들의 소란스러움과 달리 숙소 안은 고요와 평온 그 자체였다. 우리는 짐을 풀고 잠깐 쉬다 저녁을 먹고 동네 주변을 돌아보기로 했다. 깨끗하게 잘 닦여진 골목과 어귀마다 가꿔진 식물들이 인상적이었다. 동명동은 밤공기가 유독 달콤하게 느껴지는 동네다. 낭만이 있는 곳 같았다. 아무래도 랜드마크인 아시아문화전당부터 예술인들의 마을로 불리는 양림문화마을 등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동네여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젠트리피케이션의 중심지 같았다.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이동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숙소에 도착해 긴장이 풀려버린 것일까. 짐을 풀고 나니 어쩐지 다시 밖으로 이동하는 것이 귀찮아졌다. 예정대로라면 동네를 조금 둘러볼 생각이었으나 각자의 침대에 두 다리를 뻗고 눕자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일어나지 못한 채 한참을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중에 가장 먼저 말문을 연 것이 나였다. 동네 근처에 작은 서점이 몇 군데 있는데 저녁도 먹고 둘러보고 들어오는 것이 어떻겠냐는 물음이었다. 내 말에 정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숙소 바로 아래층에 있는 퓨전 한식은 어떻겠냐고 물어왔고, 선엽은 대답 대신 두 다리를 모아 크게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러다 문득 몸을 일으켜 내게 물었다.


  “너 근데, 아까 택시에서. 그게 무슨 말이야?”

  “뭐가?”

  “너 여기 왜 왔냐고.”

  “여행하러 왔잖아.”

  “그니까. 왜 여기가 여행지였냐고.”

  “와보고 싶었어. 궁금하잖아. 전라도는 여행해본 적이 없으니까.”

  “빙빙 돌려 말하지 말고.”


  선엽은 답답하다는 듯 미리 편의점에서 사온 맥주 한 캔을 꺼내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테이블 위에 소리나게 탁 놓았다. 분위기를 살피던 정원이 겉옷을 주섬주섬 꺼내 입기 시작했다.


  “너 똑바로 말해. 제대로 말하라고. 우리가 친구면.”



  선엽의 표정은 지금 이 자리에서 무엇이라도 털어놓지 않으면 정말 커다란 폭탄을 터트리겠다는 심산으로 보였다. 나는 INTJ의 끈질김과 집요한 성정을 안다. 더더욱 십오 년지기 선엽의 성격 또한 잘 알고 있다. 할 수 없이 광주에 얽힌 이야기를 꺼냈다. 나와 너무 다른 환경에서 나고 자란 사람 같아서,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던 순간들이 많아서 그 사람을 이해해보고 싶었다고. 그렇게 정리를 하고 싶었다고. 선엽은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듣더니 팔짱을 끼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정원은 가게가 문을 닫기 전에 얼른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것이 좋겠다고 재촉했다. 선엽의 뺨이 조금 발그르레하게 물들었다. 우리는 우선 저녁을 먹으러 이동하기로 했다. 여기저기에 숨은 네코 장식물이 좌우로 흔들리던 가게의 풍경. 고장난 시계와 모서리의 칠이 벗겨진 낡은 식탁.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었는데 나는 괜히 선엽의 눈치를 살폈다. 선엽은 내내 한 마디도 말이 없었다. 나는 오히려 밝은 목소리로 오늘의 마지막 목적지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너 그 사람을 좋아하긴 한 거야?”


  대뜸 선엽이 내 말을 가로막으며 물었다. 선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후토마키와 크림칼국수가 연기를 모락모락 피어올리며 식탁 위에 올라왔다.


  “왜?”


  선엽의 질문에 나는 퍽 당황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가 문젠데? 내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서? 아니면 내 착각인 것 같아서? 나 역시지지 않고 선엽의 얼굴을 살폈다.


  “네가 말한 것 중에 걸리는 게 있어.”

  “뭔데?”

  “너 아까 기억 나? 기차에서.”

  “기차에서?”

  “너 아까 자리 양보했잖아. 꼬맹이한테.”



  아마도 아침에 잠깐 꼬마 아이에게 창가쪽 자리를 양보한 것을 두고 한 이야기일 것이다. 입석으로 표를 예매한 듯 보였던 가족이 있었다. 제 아빠의 품에서 칭얼거리며 과자를 사달라는 어린 아이와 그보다는 머리가 제법 굵직해 보이는 아이는 누구의 손을 잡지도 않은 채 씩씩하게 서서 멀리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둘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인 것 같았다. 잠깐 잠에 들었다 깨었던 나는 그 아이를 멀거니 바라보다 무릎 위에 펼쳐두었던 노트북을 접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아이의 부모에게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었다. 30분 정도면 내리는 거리. 나는 망설임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를 창가에 앉혔다. 그러니까 정확히는 첫째를 그 자리에 앉혔다. 아이는 몇 번 제 부모의 눈치를 살피다 연거푸 괜찮다고 안심시키던 내 말에 꾸벅 인사를 하고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 애는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타고난 환경으로 인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지 못하는 사람을 발견하면 어쩐지 마음이 아파진다. 그런 사람에겐 애정이 생겨 버린다. 나의 기회를 주고 싶어진다.  


  “기회를 주고 싶다고 말한 게 걸려.”


  선엽이 숟가락을 내려놓은 채 내게 말했다. 내가 좋아한다고 착각했던 사람이, 실은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저 마음이 쓰였던 게 아니었느냐고. 아이에게 자리를 양보하듯 안타까운 마음을 사랑이라 착각한 것은 아니냐고. 그러니까 그때 관심이 있던 사람을 놔두고 마음을 돌린 이유가, 그 사람이 타고나기를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한 채 스스로를 억누르며 살아왔다는 사실 자체에 마음이 쓰였다. 그래서 내 멋대로 그 사람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 간절히 원하는 것을 변수로 인해 손에 넣는 날도 있는 것이라고. 그래서 그 사람이 내게 행했던 것들을 묵묵히 모르는 척 이끌려 다니려고 노력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은 연민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랑이기도 하다.


  “그건 연민이지, 사랑이 아니지 않아?”


  선엽의 물음에 나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한동안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숙였다. 민주야. 연민으로 마음을 여는 건 상당히 위험한 거야. 사랑은 감정이지, 관념이 아니야. 무엇보다 너의 사랑엔 ‘애정’이 없어.

  처음 선엽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한동안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나 역시 내내 그것을 고민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떤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내게서 사랑이 발굴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사랑하는 마음’이란 무엇인지 그것을 궁금해했다. 사랑을 해보고 싶었다. 무언가 남다르다는 그 감정을 아는 것이 몹시 중요했다. 나를 통제하지 못하는 그 감각. 이성을 잃게 만드는 그 감각을 알고 싶었다.


  자꾸만 관심이 쏠리고, 연락을 기다리게 되고, 마음을 안심시켜 주고 싶은 그 마음. 그런 마음을 나는 알고 싶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내게 그런 마음이 드는 사람이었다. 일정량의 연민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첫 시작은 연민 때문에 계속해서 지는 싸움에 동참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 사람과 언쟁을 벌일 때면 나는 빠르게 꼬리를 내리는 편이었다. 첫째로는 그 언쟁에서 그 사람의 말이 옳다는 의견이 나올 때까지 끝나지 않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로는 가능하면 승기를 손에 쥐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나와 다른 의견을 보일 때마다 사소한 한 가지가 맞지 않으면 언제든 나를 떠나버릴 것 같다는 불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언제나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눈치를 살피고, 기분을 살폈다.


  내 사랑의 애정은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맞다고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이다. 상대의 자존심을 지켜주려고 때로는 답답하고 그릇된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이러한 성격이 어리석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요즘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보였던 태도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그 사람에게 언제나 진실을 말하고 있는 쪽은 ‘나’라고 했지만 돌이켜보니 나는 늘 거짓말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스스로는 ‘착한 거짓말’이라고 믿었지만 ‘나쁜 거짓말’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조차도 속이게 되는 그런 거짓말 말이다. 거짓말에 대해 생각하면 나는 아주 할 말이 많아진다. 그 밤에 친구들과 동네를 산책하며 나는 내가 그 순간에도 얼마나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지, 속고 있는 내 자신을 철저히 숨기고 믿으려했는지 계속해서 세심하게 들여다보아야 했다.





  두 가지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거짓말을 해야 하는 순간과 하지 말았어야 하는 순간을 어리석게 낭비했다.



이전 04화 변수가 찾아올 줄이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