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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민주 May 16. 2024

변수가 찾아올 줄이야

#비엔날레

  미러 너머로 택시 기사님의 눈빛이 보였다. 택시 기사는 뭘 그렇게 짐을 안고 싸고 차에 타느냐는 표정으로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근처에 축구단 모임이라도 있었냐는 질문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 그런 아니고요. 여행을 왔어요.”

  “헤엑?!!! 여행?!! 왜?!!! 여기를?!! 왜!!!”




  매고 있던 가방 끈을 풀기도 전에 기사님은 무척이나 놀라운 표정으로 심지어 유일하게 대답을 한 나를 보기 위해 뒤를 돌아보기까지 했다. 이게 놀랄 일이야? 되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기사님을 바라보았다.


  “왜요...?”

  “아니, 광주가 여행할 만한 곳은 아닌데. 그저 여긴 도신디.”

  “아. 예.. 그르게요. 첫 관광지부터 실패했어요”

  “어디서 왔는디?”

  “... 서울이요.”

  “아따, 멀리서 왔네. 갈라면 저그 화순이나 남원도 있고, 왜 하필 광주를 택했당가. 여기는 그러면 왜 왔는가?”


  그러니까 기사님의 말에 따르면 서울에서 온 아가씨 셋이 굳이. 볼 거리 없는 광주에 왜 왔냐는 것이다. 처음에 기사님은 우리가 땀을 뻘뻘 흘리며 공원 앞에서 한가득 짐을 들고 있으니 체대를 전공한 대학생이거나 뭐 그 비스무레한 애들인줄 알았다는 거다. 그래서 반가웠다고 한다. 기사님의 첫째가 체대를 전공해서. 자기는 체육을 하는 친구들을 만나면 괜히 사려깊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발견했을 때 괜히 정감이 생겼다고 했다. 원래는 사람을 보면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성격인데, 아들이 생각났다고.


  비엔날레로 가는 동안 나는 기사님에게 광주에 오면 뭘 보는 게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첫 여행지의 실패담을 늘어놓았다. ‘맥문동숲길’을 보러 왔는데 사진 속 멋진 풍경은 없고, 그저 근린공원이기에 허무하다고. 이곳에선 뭘 먹어야 기억에 남고, 어디를 가야 인상적인 추억을 만들 수 있을지 알려 달라고 했다. 그러자 기사님은 잠깐의 생각할 틈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따, 왜 광주를 선택해가지고. 다른 데 알아보지. 여긴 진짜 볼 게 없는디. 그냥 도시여, 도시.”

  “떡갈비 말고 저녁으로 뭐 추천해주실 거 있으실까요?”

  “그냥 숙소 근처에 삼겹살 집을 가. 그게 와따여.”

  “그래도 여행을 왔는...”

  “참, 궁금허네. 왜 광주에 3일이나 있기로 한 겨? 왜 하필 광주여?”


  기사님은 틀어두었던 라디오도 끄고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옆 자리에 앉은 선엽에게 물었다. 그러자 선엽이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보였고, 정원은 피곤한지 눈을 감고 졸기 시작했다. 차 안에는 잠깐의 침묵이 돌았다.


  “좋아하는 사람이 광주가 고향이라길래. 그래서 와보고 싶었어요.”


  내 말에 이번엔 선엽이 헤엑하고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택시는 신호등의 초록과 빨강 사이에서 잠깐 고민하다 급정거를 하기 이르렀다. 자연스레 몸이 앞으로 훅하고 쏠렸다.



  “너 뭐야. 너 이제야 이유를 밝히는 저의가 뭐야.”


  선엽이 양 볼에 약간의 바람을 불어넣은 채 내게 물었다. 기사님은 입을 쩍 벌리며 나와 선엽의 눈치를 살폈다.


  “근데, 그게 전부야. 그냥 나 혼자 얼씨구 좋아했던 거야.”

  “뭘 좋아해?”


  정원이 바로 앞좌석 시트에 코를 박고는 정신을 차렸는지 약간의 하품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대박사건. 곽민주 요새 더 시니컬해진 이유가 있었네.”

  “뭔데? 뭔데!”

  “숙소 가서 브리핑하자잉.”

  “에이, 브리핑할 것도 없어. 그냥 다 지나간 일이야. 아무것도 없어.”


  내 말에 다시금 차 안에 침묵이 돌았다. 동시에 신호대기가 초록등으로 바뀌었다. 매끄럽게 도로를 주행하던 기사님은 우리 셋의 눈치를 스윽 보더니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광주가 볼만한 건 없지만 사람은 좋제. 아가씨가 보는 눈이 있네. 우리 아들도 말이여. 나(이)가 서른일곱인데, 나를 따라서 여짜-서 택시를 하는데. 아따, 일에 미쳐가지고 연애고 결혼이고 생각도 없고. 그짝 총각 말고, 우리 아들은 어뗘? 체육해서 훤칠하니 인물 좋아. 나(이)가 많아서 그렇지.”

  “갑자기요?”

  “이렇게 인연을 만드는 거여. 아가씨도 내 보니 요로코롬 인물이 좋아. (이것은 립서비스였다고 생각한다) 상심하지 마러. 광주? 여-는 총각이 많어. 아가씨 정도면 장가들 작자들이 저그 해남까지 줄을 섰네, 섰어. 장이여 뭐여? 원하면 우리 아들 하루 일 스탑시키고 아가씨들 태우고 온종일 전라도를 구경시켜줄건데. 어-메 (‘어메’, ‘아따’는 거의 문법상으로 ‘정관사’ 같은 쓰임인 것 같다) 내가 삼십 년만 젊었어도 아가씨들 태우고 팔도를 구경시켜주는 건데. 선녀들을 놓쳐서 아쉽쇼잉.”

  “흠.. 나쁘지 않은 제안인 것 같아요. 연락처라도 주시죠.”


  선엽이었다. 선엽은 이제 9년 만난 남자친구와 헤어진지 반 년 정도가 흘렀다. 그 사이 몇 차례 소개팅을 했고, 심지어는 짧은 연애를 끝내기도 했다. 선엽을 보고 있으면 도무지 이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선엽은 애인과 헤어지던 무렵에도 우리에게 몇 마디 말이 없었다. 결혼을 생각하려고 보니 남자친구와 맞지 않는 것이 한두 개가 아니더라고. 처음에 사귈 때는 결혼까지 생각하지 않았으니 모든 결정과 판단이 어렵지 않았으나 역시나 현실의 벽이란 건 어쩔 수 없더라는 말도 덧붙였다.


  현실의 벽.

  현실은 때로 변수처럼 찾아온다. 변수는 ‘값이 특정지어지지 않아 임의의 값을 가질 수 있는 문자’다. 그러니까 어떤 식으로도 규정지을 수 없고 단정할 수 없는 값이다. 선엽의 선택은 내게는 변수였다. 나는 선엽과 지우가 헤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두 사람 사이에 변수가 생길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9년을 만난 사이다. 9년이면 서로의 내밀한 속사정을 다 아는 사이가 아닌가. 숨기고 싶지만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미묘한 신호를 쉽게 포착해낼 수 있는 사이라는 말이다. 가족끼리도 잘 아는 사이다. 형제자매와 언니 동생하며 지내는 사이다. 네 집이 내 집이 되는 사이다. 헤어지는 것이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떻게든 타협점을 찾아보려고 노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선엽은 지우에게서 고치지 못하는 것-소비습관이나 게임중독 현상, 연락이 잘 되지 않는 문제-을 손에 꼽았다. 헤어지던 무렵엔 내게 전화를 걸어와 그런 이야기들을 시시콜콜 털어놓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의 나는 글을 쓰느라 정신이 없어 설렁설렁 그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별다른 해답도 제시하지 못했다. 내게 관심사가 아니었을뿐더러 공감도 되지 않았고, 어떤 위로를 해주어야 하는지, 아무런 경험이 없는 내가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싶었다. 서로의 전화기를 붙들며 침묵이 길어지던 시간. 선엽은 더 이상 내게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대신 얼마 뒤에 내게 한 통의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지우와 헤어졌노라고. 먼저 헤어지자고 말했다고.


  그때에도 나는 선엽에게 아무런 말도 해주지 못했다. 그때 나는 ‘소설’과 연애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친구고 뭐고, 공모전에 미쳐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당시 선엽이 얼마나 큰 상실감과 공허함을 안게 되었을지 그때 나는 알지 못했다. 남녀가 만났다 헤어지는 건 직장동료의 이직 정도의 마음의 거슬림을 주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때까지 나는 제대로 된 이별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친구와 크게 싸워 헤어져본 적도 없었고, 무엇이든 한 가지를 시작하면 오래 보는 편이었으니까. 그러니까 ‘헤어짐의 감각’을 잘 몰랐던 것이다. 아니다. 변명이다. 나는 내가 너무 소중해서, 내 ‘일’만을 너무 사랑해서 다른 감정들은 모두 차단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얼마나 효율적인가, 그리고 얼마나 이기적인가. 얼마나 비인간적인가. 나는 선엽을 이해하려하지 않았던 것 같다. 각자의 감정, 각자의 어려운 몫은 스스로 수습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자라왔다. 늘 그런 첫째였다.  



  선엽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 속에 최근들어 유독 기억에 남는 한 마디가 있다. 무엇보다도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었는데 더 이상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견딜 수 없었다고 했다. 오랜 인연이라 수없이 고민했다고 했다. 또다시 오래 볼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도 있더라고. 그때 선엽이 고민했던 것은 이것이 ‘권태기’였으면 어떡하지?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선엽에게 권태기는 잠깐의 변수, 관계를 완전히 끊어지게 만들 수 있는 강력한 한 수였다는 것이다.


  1년 전의 나는 선엽이 지우와 헤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래된 관계이니까. 연인이든, 부부든, 나는 우리 가족을 보면서 생각했다. 사람들이 관계를 맺고 끊는 건 어쩌면 사소한 한 가지를 양보하지 않아서가 아닐까 하고. 그러니까 정말 사소한 한 가지. 예를 들어 화장실을 쓴 뒤에 뒷정리를 하지 않는다거나. 쓰레기를 버리는 순서. 물건을 배열해 두는 방식 같은 것. 그런 것들은 한 사람이 인내하고, 바꿔나가면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각자 이기심을 가지고 있어서 절대 양보하지 않지.



어릴 때부터 부모님은 TV 프로그램을 보는 순서 가지고도 목놓아 싸웠다. 별 것 아닌 것으로. 부모님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저들이 별 중요하지도 않은 사소한 것들로 싸울 때마다 양보가 없어도 너무 없다고. 그래서 나는 이 담에 크면 주로 지는 쪽을 선택하겠다고 다짐했다. 틀려도 틀린 것을 틀렸다고 말하지 않기.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게 내가 집 안의 막내들을 다스리는 방식이었다. 그렇게라고 관계를 차갑지 않게 유지하고 싶었다. 내가 무엇을 옳다고 말했을 때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멀어지는 감각이 싫었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이성을 보는 기준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타고난 조건을 사례 삼아, 이 끝나지 않는 갈등과 분쟁은 어쩌면 태어나서부터 ‘양보’만 받아왔던 막내들의 특성은 아니었을까 하고.


  누구든 자신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그것이 정답같이 느껴질 것이다. 다른 것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내가 ‘막내’는 양보가 없어 관계를 오래 유지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여전히 ‘동생’의 입장에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렵다. 쉽게 ‘회피’ 당하는 것이, 일방적으로 내가 ‘양보’하게 되는 것이 유쾌하지 않다. 이제는 지친다. 편안해지고 싶다. 그것이 막내에게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어찌 모르겠는가. 다만 선험적 판단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나의 지구는 여전히 평평하다’. 그리고 나의 관점은 지금 이 순간에도 변함없이 팽팽하다.   



  사람을 보는 기준에는 엠비티아이도 있다. 사적인 영역을 파고들기 어려운 자리에서 스낵토크로 가장 적절한 주제는 단연 엠비티아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엠비티아이에 넘치는 자부심과 약간의 수치스러움을 느끼고 있다. 때문에 나와 같은 유형의 사람을 만나면 동족혐오를 느낌과 동시에 약간의 거리를 두게 된다.


 그러니까 나의 엠비티아이는 엔티제. 혹시나 바뀌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혹은 내가 나답지 않은 행동을 했다고 느낄 때마다 다시금 테스트를 해보곤 한다. 어떤 사람들은 환경에 따라 테스트 결과가 바뀌기도 한다던데 나는 아무리 검사를 다시 하고, 또 다시해도 바뀌지 않았다. 이렇게 하면 바뀌지 않을까? 하고 약간의 관대함을 더해 테스트를 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e.n.t.j


  나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내가 t 성향이라고 하면 다들 크게 놀란다. 얼마 전에 참여했던 첫인상 테스트에서는 인프피이거나, 엔프피일 것 같다는 평이 대다수였고, 엔티제일 것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나의 어떤 부분이 사람들로 하여금 F성향으로 보이게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학습된 사회성인가 싶디고 하다) 적어도 나를 아는 친구들은 나의 엠비티아이를 듣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는 편이다.



  셰어하우스에 거주하던 때에 처음 엠비티아이 테스트를 해보았다. 당시 나는 회사의 뒷건물(정말 바로 뒷건물이었다)에 있는 셰어하우스로 독립을 해 있었다. 독립을 한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첫째로는 내 스스로의 힘으로 가족과 분리되는 경험을 너무나도 하고 싶었고, 둘째로는 주변에서는 쉽게 쉽게 떠나는 해외여행-유럽일주라거나 가까운 일본이라도 다녀오는-을 가는 대신 매일매일 사람을 여행하며 살아가고 싶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낮에는 가로수길에 위치한 대행사에서 카피라이터이자 AE로 회사 일을 하며 커리어를 쌓고, 밤에는 스물여섯 살짜리 작가지망생이라는 투명탈을 쓴 방랑자가 되었다는 얘기다. 외향적인 성격 덕분에 한 달도 채 버티지 못하고 그곳을 떠났던 다른 한국인 친구들과 다르게 나는 비교적 빠르게 환경에 적응하고 새로운 친구들을 마구마구 사귈 수 있었다. 계약이 한 달 단위로 이루어 졌기 때문에 그곳에서 나 같은 장기거주자는 드물었고, 대부분 마음이 완전히 열릴 때쯤이면 아쉬운 이별을 해야만 했다. 마지막까지 그 집에 남아 있었던 사람은 나였다. 수많은 사람들을 사귀고 떠나보냈다. 그리고 그 시기에 만났던 친구들을 통해 나는 때로는 나와 맞지 않거나 다른 환경에 있던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이해’해야 하는 순간도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던 것 같다.


  전 세계에서 모인 친구들과 서로가 자라온 환경, 살아온 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여행자로 지내면서 인간군상은 물론이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2년이 조금 안 되는 기간 동안 머물면서 나는 내 평생에 경험하지 못할 법한 세계의 도드라진 너비를 손끝으로 더듬어볼 수 있었다. 비록 월세가 월급의 반을 차지하는 데다, 생활비를 더하면 모을 수 있는 돈은 한정적이었지만. 나는 당시에 내가 했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여자 20명이 거주했던 그 셰어하우스는 이전에 게스트하우스 용도로 쓰였던 곳으로 구조는 일반적인 게스트하우스의 풍경과 동일했기 때문에 밥시간이 되면 룸메들은 하나둘 주방으로 나와 각자의 음식을 차려 먹었다. 바질에 펜네파스타를 비벼 먹던 독일인 언니 테라리사. 극한의 다이어트를 하면서도 밤마다 참깨라면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후드티를 걸친 채 주방으로 나오던 프랑스 동생 로레단. 친구들에게 한국음식과 K-POP 문화를 전파하며 영어를 배우고 한국어를 가르칠 수 있었다. 감사하게도 월세를 아끼기 위해 유일하게 남아있던 2인실에서 사려 깊은 미국인 룸메이트와 다툼 없이 잘 지낼 수 있었다. 나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동생이었다. 1999년에 태어나 스페인과 멕시코, 미국인 국적을 지닌 친구였다. 불어를 전공했지만 부전공으로 한국어를 선택한 것은 순전히 방탄소년단을 사랑하기 때문이란다. 그 친구의 MBTI는 엔티제와는 궁합도 보지 않는다는 인프피였다.


  클라리사는 처음 나를 만났을 때 잔뜩 긴장한 듯 보였다. 한국인에 대한 약간의 편견이랄까, 걱정을 안고 있는 듯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바로 직전에 함께 두 달 정도를 지냈던 한국인 룸메이트와 사사건건 부딪혔다는 것이었다. 평소 더위를 많이 타는 편인 클라리사는 한 겨울에도 창문을 열어두어야 했고, 나는 조용히 두꺼운 이불을 마련하고, 보온 물주머니를 안고 잠들었다. 그때마다 클라리사는 내게 미안하다는 말과 동시에 시간대별로 스스로 문을 닫고 열어주며 나를 배려해주곤 했다. 이전 룸메이트와는 서로 간에 기싸움을 시전하듯 반대로만 행동했다고 한다.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고, 서로 시선을 마주 보거나 호흡을 나누는 것 자체만으로도 불만을 느끼곤 했었다고.


  결과적으로는 클라리사와 내가 서로 잘 맞는 룸메이트라는 것은 아니다. 클라리사가 한창 새벽에 활동하는 부엉이라면, 나는 (일 때문에 늦게까지 깨어 있는 것이지) 태생적으로 닭이다. 그러니까 아침형 인간.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형광등 조명을 켜기보단 각자의 자리에 있는 무드등을 켜며 생활하거나 공부를 할 때는 부엌으로 나가곤 했었다. 다른 룸메이트와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맞춰가며 문화를 향유하고, 자라온 역사를 공유했다. 그러나 어느 상황에서나 변수가 있기 마련이다.


  ‘맥문동숲길’에서 ‘비엔날레’로 향하는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실망감에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기차를 타고 여기까지 온 건가, 하는 허탈감에 빠져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친구들은 속으로 왜 하필 ‘광주’에 와야만 했을까 하는 불만을 안고 있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만난 택시 덕분에 우리는 이동하는 동안 깔깔거리며 웃었고, 그 조그만 공간에서 피어오른 나의 이야기. 반전이 있었던 나의 속사정에 흥미로움을 더했다. 그래서 즐거웠다. 지치고, 지루하고, 무용하던 우리의 여행에 변수가 찾아온 것이다. 비록 얻는 것은 없었지만 그 잠깐의 순간은 오아시스처럼 갈등을 풀고, 갈증을 해소해주었다.  



  변수.


  사랑에도 변수가 있을까?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내 인생에는 변수가 없다. 나의 엠비티아니는 늘 직관력이 좋은 편이다.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 없다. 결과값은 늘 생각하는대로 떨어지는 편이다. 그러나 나의 ‘사랑’을 시험하듯 내게도 선엽처럼 변수가 찾아온 듯하다. 나는 아직도 내가 누구를 향해 ‘사랑’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 ‘사랑’의 감각인지, ‘인류애’의 감각인지. 여전히 혼란스럽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의미심장한 예언을 받았던 그 순간에 나의 운명이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내딛으면 연인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을 향해 기를 쓰고 달려가고 있던 와중에,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에게 붙들려 전혀 다른 결과값을 만들어내는 일이 살면서 우리에게 얼마나 있을까. 결국 모든 선택과 결과는 내가 만들어낸 것이다. 변수는 나로 인해 발생한다.


  변수가 성립되기 위해선 식이 꼬여야 한다. 과수원의 나뭇가지를 붙잡고 매섭게 흔들어야 한다. 땅에 진동이 느껴질 정도로,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막무가내로. 그래서 변수는 쉽게 발생하지 않는다. 식을 세우는 입장에선 언제나 오차범위까지 고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변수는 운명이다. 운이 따라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적어도 그 사람은 내게 변수였다. 예정되어 있던 나의 운명을 바꾸었으므로, 나의 과수원을, 나의 세계를 세차게 헤집고 흔들었으므로. 내가 원하고 바랬던 결과값을 내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렸으므로. 역시나, 어리석은 내가 선택한 운명이다.


  그러나 그 사람도 나의 세계의 뼈대를 다시 끼워맞춰가는 과정에서 변수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변수엔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크다. 이것은 역시나 어리석은 그 사람이 선택한 운명이기도 할 것이다. 그 사람이 나의 미지수에 변수를 끼워넣음으로써 얻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증명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을까. 나의 직관력이 정말로 틀린 것일까. 이제야 밝히자면 나도 그 사람의 미지수에 변수를 대입했다. 나의 변수는 ‘눈치’가 없는 척을 하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수한 척 하는 것은 첫째로서 살아오며 발달된 감각이자 특기다. 끝내 극복하지 못했던 페르소나다.



  나는 변수를 좋아하지 않는다. 변수는 실수를 완성해 내기 때문이다. 변수만큼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것도 없다. 변수는 참으로 얄궂은 수다. ‘수’를 두는 사람에게는 ‘신의 한 수’일지도 모르겠지만 수를 당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순간이 미지수로 치환되기 때문이다. 선엽과 정원의 이야기가 단지 ‘보수’가 필요한 문제라면 나의 이야기는 ‘변수’로부터 시작된다. ‘변수’가 나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바뀔 리 없던 선택을 바꿨기 때문이다.


떠날 리 없던 광주로 여행을 떠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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