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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민주 Jul 12. 2024

맞춰가겠다는 노력

#광주호

굽이치는 길을 운전하는 운전수의 마음이란 어떤 걸까. 몇 년 전 외제차 브랜드의 카피라이팅을 주로 담당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운전면허를 취득했던 경험이 있다. 그때 처음으로 운전석에 앉았다. 필기와 기능은 3시간 만에 통과했고, 도로주행은 두 번째에 합격을 했다. 면허를 딴 이후로 몇 번 회사 차량을 운전해 봤지만 그 이후로 크게 기회가 없었으므로 장롱면허다. 운전을 하며 느낀 게 있다면 단순히 감 좋은 운전자만이 차에 앉은 사람을 평안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잘 닦인 길을 함께 나아갈 때 더 편안한 주행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건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이다. 목적지를 선택하는 것도, 그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방법을 선택한느 것도. 결국 맞춰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버스정류장에서 ‘광주호’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하늘엔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숙소에서 나오기 전 일기예보에는 맑은 날씨를 예고하고 있었지만, 그저 오전 시간대라 날이 흐리다고 하기에 밖은 꽤 어두웠다. 우리는 전날 걸었던 골목을 통과해 나오며 여러 번 손바닥을 펴고 비가 오는지 아닌지를 확인하곤 했다. 광주에서 유명한 관광지로 가장 먼저 검색되는 것은 무등산, 다음으로는 광주호다. 광주호는 담양부터 나주, 그리고 광주를 잇는 인공호수다. 연산강 유역 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된 4개의 호수 중 가장 작은 규모로 현재는 손꼽히는 유원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손꼽히는’ 유원지라는 안내와 달리 버스를 타고 들어가기엔 교통편이 꽤 좋지 못했다. 몇 번의 버스를 갈아타려 했던 데다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을 것 같은 길가에 정류장이 있어 주변이 으스스하기도 했다. 경유를 했던 정류장은 지난 계절에 쌓인 낙엽이 정리되지 않은 채 수북하게 쌓여있는 데다 어둑한 하늘에 비바람까지 몰아쳤다.



  그러나 우리는 날씨는 뒷전이요, 배가 고프다는 말만 반복하며 버스를 기다리고, 2세대 아이돌의 노래를 듣고 부르며 시간을 보냈다. 1시간쯤 지났을까 도착한 광주호생태공원. 입구에 들어서기 전 근처에 마련된 휴게소에서 라테와 핫도그를 허겁지겁 사 먹었다. 근처에 우산을 파는 곳도 없어 비바람을 맞으며 먹었던 따뜻한 음식은 허기를 채우고 온기를 더했다. 그 순간을 미워하지 않고 즐겨서일까. 하늘은 금세 개어 햇빛까지 났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친구들은 서두르는 기색 없이 그저 천천히 공원을 둘러보자는 생각이어지만 나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당초 계획했던 것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된 데다 무등산을 가려면 빨리 이동을 해야 했는데, 하루 안에 다 둘러보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전날만 하더라도 계획했던 책방을 가지 못해 아쉬움이 있었는데, 가능하다면 이곳에 온 김에 계획했던 관광지를 모두 둘러보고 싶었다. 앞장서 공원에 들어갔다. 아직 이른 봄이라 그런지 공원 안엔 이제 막 움트는 새싹들이 가득했다. 나뭇가지는 여전히 대부분 앙상했고, 잔디밭엔 아직 찬 기운이 남아 있었다.



  정원과 나는 주변의 풍경을 사진에 담으며 연신 감탄을 했다. 사이에 슬쩍 선엽을 보니 선엽은 뒷짐을 진 채 우리를 천천히 따라오고 있었다. 선엽은 전날과 달리 착 가라앉아 보였다. 무언가 고민이 있을 때 으레 나오는 사람의 표정. 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채 선엽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아니, 그냥. 아까 날씨가 그래서 그런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니. 아무 생각도. 그냥 아, 여기 풍경 좋다. 그러고 있지.”

  “왜, 정원이 보니까 지우 생각나서?”

  “야.”

  “정원인 해준이랑 맞지 않아도 맞춰가겠다고 노력하잖아. 너네도 그런 노력을 더 하지 않은 것 같아서 그게 마음에 걸려?”

  “……”

  “야, 이미 지나갔잖아. 그리고 9년 동안 그런 노력 안 했겠냐. 마음 털고…”

  “그런 거 아니라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아니라고!”



  선엽이 언성을 높였다. 선엽의 목소리는 호숫가에 가닿았다 뱅뱅 울리며 되돌아왔다. 정원이 깜짝 놀라 우리 쪽을 바라 보았고, 지나가던 사람들도 선엽과 나를 흘깃 보고 지나쳤다. 나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선엽을 살폈다. 선엽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쌩 지나쳤다. 내가 지금 뭘 잘못했나? 오늘 아침 정원의 이야길 듣는 동안 선엽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먼저 헤어지자고 한쪽은 선엽이었지만 여전히 선엽의 마음속엔 지우가 다 털지 못한 먼지처럼 남아 있다는 것도. 나는 그저 선엽을 위로해주려 했던 것뿐이다. 우리의 우정이 긴 시간을 자랑하는 것만큼 얼굴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 사이니까.


  멋쩍은 표정으로 선엽의 뒤를 따랐다. 정원이 입모양으로 무슨 일이냐고 물어왔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사이 공원을 지나 호수에 도착했다. 땅에 맞닿은 물결이 좌르륵 소리를 내며 겹쳐지다 풀어지길 반복했다. 탁 트인 호수의 풍경. 물이 맑아 그 위로 뻗은 나뭇가지가 비치는 물빛을 보며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왔다. 산책로처럼 조성된 길을 걷는 동안 나는 선엽의 눈치를, 정원은 우리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꽤 오래 걸었을까. 호수를 한 바퀴 돌아볼 계획이었으나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질 않았다. 조금만 더 걸어가면 뭔가 특별한 게 나올까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한참을 걷던 우리는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행인을 붙잡고는 호수가 어디까지 이어지는지를 물었다. 왠지 자주 이곳을 방문할 것 같은 차림의 행인은 손가락으로 까마득한 호수의 끝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대로 쭉 걸어가면 담양인디. 아가씨들 짐이 광주에 있으면 이만 돌아가야겠어.”


  내가 졸업한 학교의 호수도 꽤 크다고 생각했는데, 이곳 호수는 어마어마하구나. 행인의 말에 우리는 호수의 끝에 시선을 두다 그만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동안 정원은 해준과 통화를 했고, 선엽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묵묵히 걸었다. 나는 그런 선엽의 뒤에서 선엽의 눈치를 살폈다.


  “미안. 내가 너 위로해 준다는 게.”

  “아니야. 나도 예민하게 굴었지, 뭐.”

  “아냐. 내가 뭐라고 너한테 함부로.”

  “됐어. 미안하면 그 사람 얘기나 더 해봐.”


  그날 나는 선엽에게 처음으로 겨울 동안 내게 있었던 일에 대해 털어놓았던 것 같다. 선엽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나는 땅굴이라도 파고 털어놓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그날 선엽에게 모두 털어놓았다. 정원처럼 눈물이 나거나 애가 타지는 않았다. 그저 아, 이런 일들이 있었지. 하며 깔깔 웃기도 하고, 내가 너무 순진하게 행동한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드는 부분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너 진짜 서툴구나. 선엽이 종종 말을 덧붙이며 미간을 모았다. 그때마다 나는 아무래도… 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버스정류장으로 돌아와 시간을 보니 버스가 도착하기까지는 50분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었고, 시계는 어느덧 점심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무등산 근처나 조금 더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내려와 유명 산지 음식을 맛볼 생각이었으나 모두들 지쳐있는 데다 배가 고팠다. 주변을 둘러보니 휴게소를 가장한 분식집과 슈퍼마켓, 그리고 한적한 카페 겸 베이커리뿐. 우리는 그중에 분식집에 들어가기로 했다. 분식집은 간판과 다르게 잔치국수와 비빔국수, 그리고 소주와 닭강정을 판매하고 있었다. 정원과 선엽은 비빔국수를, 나는 정말 무지막지하게 좋아하는 잔치국수를 주문했다. 점심을 먹고 난 뒤에 바로 버스가 오겠지. 서두르자. 내 말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예정대로 버스를 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것 같다.



  주인아주머니의 손맛은 기가 막혔다. 이곳에서는 어떤 음식을 선택해 먹어도 다 만족스럽다. 마음 같아서는 국수를 먹고 바닥까지 싹싹 비우고 싶었지만 엄청난 양에 다 먹지 못한 것이 아쉬울 지경이었다. 점심을 먹는 동안 계속해서 시간을 확인했다. 혹여 버스를 놓칠까 걱정이 되어 정류장에서 가장 가까운 식당을 선택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예정대로 와야 하는 버스는 오지 않았다. 지도 앱을 켜 보니 도착 예정정보가 있었던 버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정류장에 도착할 버스는 단 1 대도 없다는 식의 알림이 떴다. 우리는 어리둥절해하며 한참을 지도 앱을 들여다보았다. 정원이 택시를 타자고 했으나, 애초에 택시가 잡히지 않는 곳이었다. 나는 잠깐 생각하다 지도 앱을 켜 도보로 이곳을 빠져나가는 방법을 검색했다. 걸어서 1시간 정도의 거리. 평소에도 3시간을 달리는 편이기에 1시간 정도야 금방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경우에 혼자 여행을 하면 나라면 버스를 더 이상 기다리지 않는다. 나는 직접 움직이는 편이다.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마냥 기다릴 순 없으니까. 선엽과 정원은 배가 부르다며 근처 카페에 들어가는 게 어떻겠냐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기.. 그냥 우리 걸어서 안 갈래? 운동도 하고…”

  “헤엑, 걸어서? 못 가지. 야 여기 위험하기도 하고. 너무 시골이잖아.”

  “그렇긴 해도, 버스가 언제 올지 모르니까.”



  두 사람은 내 판단을 이해할 수 없다는 눈길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이런 곳엔 버스가 언제 올지 모르는 데다 마냥 넋 놓고 앉아있기에 시간이 아깝다고 대답했다. 그에 비해 선엽은 느긋하게 선글라스까지 끼고 앉아 손가락으로 카페 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그냥, 저기 가 있자. 버스 오겠지. 정류장이 있는데.”

  “오는 건 오더라도 이따 우리 양림문화마을도 가야 하고, 또…”

  “야, 오늘 못 가면 내일 가거나 다음에 가면 되지. 뭘 그렇게 조급하게 다 하려 그래.”

  “그렇지만…”

  “오! 야, 버스 정보 떴다. 엥? 한 시간 뒤에 온다는데?”

  

  정원이 보여준 휴대폰 화면에는 또다시 버스 정보가 올라왔으나 1시간 뒤였다. 1시간이면 저기 카페 가서 수다 떨면 되겠다. 추운데 잘됐어. 심지어 쿠키도 팔잖아! 선엽은 신이 난 듯 보였다. 전과 달리 기분이 좀 풀려 보여 다행이라고 생각했으나 1시간 동안 카페에서 무용하게 시간을 보낸다고 생각하니 답답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이 동의했으므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카페 안은 넓은 규모에 비해 앉아 있는 손님이 턱없이 부족했다. 주말임에도 그랬다. 그 사이 우리는 호수에서 찍었던 유쾌한 포즈의 사진을 구경하며 웃기 바빴다. 그렇게 또 흘러간 1시간. 다시 지도 앱의 버스 도착정보는 “없음”으로 바뀌었다. 이번엔 내가 참지 못하고 주장했다.


  “야, 우리 2시간이나 기다렸어. 조금 있으면 오후 3시라고. 오늘 여기 와서 한 게 아무것도 없잖아. 겨우 호수 하나 보고. 시간이 아깝지 않아? 모처럼 휴가 내서 여행을 온 거잖아. 수다를 떠는 건 서울 가서도 할 수 있어. 근데 여기서 볼거리를 최대한 보고 가야지. 안 그래?”

  “너는 꼭 뭘 성장하거나 남는 게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얘기하더라. 여행은 말 그대로 쉼이지. 뭘 보고 느낄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 앞에서 물 흐르듯 흘러가기도 하는 거 아니야?”

  “아니, 걸어가면 금방이잖아. 너네 버스 타려면 버스 타. 나는 걸어갈래. 너무 시간이 아까워.”



  나는 애들을 지나쳐 홀로 버스정류장을 벗어나 걸었다. 이럴 때 날씨가 더럽게 맑을 건 또 뭐람. 뜨겁게 내리쬐는 햇빛에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선엽과 정원이 내 이름을 부르며 쫓아왔다.


  “그래. 걸어서 가 보자. 근데 조금만 더 기다려보는 게 좋지 않을까? 2시간 기다렸으면 이젠 진짜 올 거 같은데.”

  “안 와. 기다리는 사람도 아무도 없잖아.”


  나는 단호했다. 우리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이름을 알지 못하는 마을을 지나 축사를 지나 덩치가 큰 백구를 지났다. 논과 밭을 지났다. 풀숲을 지났다. 그러다 마주한 버스정류장 표지판 하나. 원래대로라면 5분도 채 되지 않아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으리라. 정류장에는 나이 든 할아버지 한 분이 등산화를 벗은 채 땀을 뻘뻘 흘리며 앉아 있었다.


  “야, 한 번만 더 안 기다려 볼래? 우리 여기서 적어도 1시간은 더 걸어가야 하는데. 어차피 속는 셈 치고…”

  “안돼. 목적지가 코앞이야.”



  정원이 입술을 비죽였다. 그러나 정원과 선엽 역시 한편으로 버스가 오지 않는다는 걸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정류장을 지나쳐 조금 더 걸었다. 나는 뒤돌아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웃었다. 비웃음이었다. 오지 않는 버스를 미련하게 기다리고 있는 꼴이라니. 그러나 나의 비웃음은 10분도 채 되지 않아 반전의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우리 옆으로 타야 하는 버스가 지나간 것이다. 차도라고 했지만 차도, 사람도 지나다니지 않는 거리를 걸으며, 우리는 잠깐 동안 시공간의 제약을 벗어난 채 이탈한 외계인처럼 거리를 걸었다. 그곳에서 서로의 노래 취향을 공개하며 웃기도 하고, 속 이야기를 털어놓기도 했다. 무엇보다 서울에서는 보지 못할 시골의 풍경, 숨만 쉬어도 상쾌해지는 공기가 인상적이었다.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내 선택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늘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날 우리의 옆으로 버스가 지나간 순간, 모두 말을 잃었다. 침묵이 이어졌다.


 “야, 좀 쉬자. 힘들다.”


  기어이 정원이 신발을 벗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지도를 보니 30분 정도를 더 걸어가야 했으나 배터리가 없어 그마저도 목적지를 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도는 내가 쥐고 있어야 하는데. 뒤를 돌아 선엽과 정원을 바라보니 얼굴에 실망스러움이 가득해 보였다. 괜히 내 선택 때문에 두 사람이 고생을 하는 것 같아 너무 미안했다. 그때 왜 난 고집을 부렸지? 하지만 그땐 정말 이곳을 벗어날 방법이 이것 한 가지만 있는 것 같았어. 모든 게 다 내 탓인 것만 같았다. 기분이 축축 처졌다. 남은 30분은 말없이 걸었다. 정류장에 도착할 때까지. 그 사이 할머니 군단도 마주하고, 숲과 너머의 산등성이를 바라보기도 했다. 평소 오래 걸으며 생각에 빠지는 걸 좋아했지만 그날만큼은 최악의 순간이었다는 걸 인정한다. 친구들의 의견을 조금만 더 들어줄걸. 나는 그때의 순간을 두고두고 후회한다.



  맞춰간다는 노력. 나는 늘 타인에게 배려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배려일지도 몰랐다. 내가 생각한 배려는 일을 가장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방법, 내가 생각하기에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러니까 상대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고려하지 않은 채 결과 중심적인 배려를 한다는 것이다. 그건 ‘배려‘가 아니었다. 그저 ’ 독단‘이었다. 그날 하루를 통해 나는 그동안 내가 했던 선택들에 대해 새삼 다시 생각해 보았던 것 같다. ’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만이 답이 아니라는 걸, 때로는 사람들과 속도를 맞추고, 발을 맞추어 걷는 것이 결과보다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어떤 일들은 빠르게 도달하는 것만이 성장이 아니다. 정체되고, 포기하려는 생각에 다다르더라도 끝내 다시 일어나 도착지에 발을 얹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될 수 있다는 걸. 그러니까 여유가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조급한 마음에 성급하게 내린 결정으로 놓쳐 버린 기회가 얼마나 많았을까. 스스로가 바보 같이 느껴졌다.


  “야, 무슨 생각하냐.”


  앞서 걷고 있는데 선엽이 옆으로 스르륵 다가왔다. 선엽은 무슨 노래를 듣는지 이어폰을 꽂고 흥얼거렸다. 그런 선엽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선엽이 이어폰 하나를 빼내어 나에게 건넸다.


  “한쪽 들을래?”

  “됐어.”

  “야, 근데 좋다. 꼭 농활 온 거 같고. 새롭네. 생각지 못했던 여행지네.”

  “미안. 나 때문에. 내가 너무 생각이 짧았어.”

  “아냐. 미안할 건 아니고. 우리 다 걷는 거에 동의했잖아. 이런 날도 있는 거지.”


  선엽이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지금 무슨 모먼트야? 내가 물음에 선엽이 또다시 말없이 웃는다. 정원 역시 뒤에서 나의 너른 등짝을 퍽 때리며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고 묻는다.



  “있잖아, 내가 아까 호수에서 말했던 거. 나는 그 사람이랑 완전히 끝이 나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다시는 연락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여기까지 온 건데 내 판단이 잘못된 걸까? 오늘의 버스처럼? 혹시 내가 여기 와서 진짜 버스처럼 혹시 모를 기회도 다 차단해 버린 건 아닐까?”


  나는 아침에 꾸었던 꿈 이야기를 두 사람에게 해주었다. 그리고 앞으로의 내 결정에 대해서도. 이곳을 떠나오며 나는 마지막으로 “잘 지내라.”는 안부와 함께 그 사람의 연락처를 모두 지웠다. 그리고 이곳에 그 사람의 유일한 연락처인 명함을 가지고 왔다. 무등산에 가려는 이유는 그것이었다. 무등산에서 그 사람의 명함을 끼워 넣고 다시는 광주에 내려오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러니까 털어버리려고 온 거야. 나도 나 싫다는 사람, 싫다 뭐. 정원과 선엽은 내 이야기를 묵묵히 듣더니 동시에 뭐라도 발견한 듯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이야, 곽민주. 아주 혼자 절절한 드라마를 써라, 써.”

  “민주야, 너는 너무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재단하려는 경향이 있어. 그러면 어떤 사람은 부담스럽지.”


  정원과 선엽이 돌아가며 한 마디씩 뱉었다.


  “나도 알아. 근데 안 그러면 자꾸 흑역사에 남을 행동을 할 것 같으니까, 이런 건 나를 스스로 통제하는 거기도 해. 싫은 꼴, 미운 꼴 보이기 싫으니까.”

  “그게 뭐 어때서? 사람인데. 너는 너무 정확하게 하려고 해. 왜 그렇게 완벽하게 갖추려고 하냐? 다 맞춰 가는 거지.”

  “맞춰가?”

  “그래.”

  

  정원의 말에 선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엽은 최근에 귀 위로 짧게 자른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덧붙였다.



  “민주야. 아까도 그렇고 나는 가끔 네가 정곡을 찌를 때마다 상처를 받아.”

  “……”

  “네 판단이 언제나 더 나은 방향이라는 건 인정. 그런데 네 주변 사람들까지 데이터를 대하듯 너무 완벽하게 생각하려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관심 없으면 해결책도 안 줘.”

  “그럼 주지 마. 나는 그래도 친구니까 참아주는 거야.”

  “그게 무슨…”

  “때로는 바보 같은 결정이 도움이 된다는 거지. 너 그 사람이 이런 거, 이런 거.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누누이 이야기했다며. 근데 너 어떻게 했어? 그 말 들었어? 너는 그 사람한테 늘 배려를 해줬다고 했지만 너 안 그랬지? 결국 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도록 네 이야기만 번지르르하게 한 거 아니야?”

  “……”

  

  생각해 보니 선엽의 이야기가 틀리지 않은 것 같았다.


  “아무리 남녀라지만 어떻게 처음부터 호감이네 아니네 구분을 하니. 알아가 보다가, 맞춰보다가 아닌 거 같으면 또 거리를 두고 지켜보기도 하고, 타이밍이 맞으면 사귀는 거고. 또 애초에 그게 아닐 수도 있고. 네 이야기만 들어서는 잘 모르겠지만, 그 사람도 어느 정도 네게 오해를 살 만한 행동은 했는데, 그 사람이 너를 잘못 건드렸다. 네 외모만 보고 순진한 양인 줄 알았는데 너 사실 독사잖아. 곽독사.”



  선엽은 자기가 대단한 작명가라도 된 듯 큭큭 거리며 웃었다. 임정원이 선엽에게 하이파이브를 요청했다. 짝- 허공을 가르고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느새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절에 도착했다. 절에서 무등산 국립공원까지는 1분 거리.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또다시 버스를 놓칠 순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은 벌써 다섯 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금방 해가 질 것이다. 우리는 절을 마지막으로 산을 내려가기로 했다. 멀리 무등산의 산자락이 매혹적으로 느껴졌지만 다음을 기약하기로. 이번 여행이 광주의 마지막은 아니라는 걸, 더 이상 조급해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나는 그날 했다.


  선엽은 그날 절에서 탑을 돌며 소원을 빌었다고 했다. 더 친절한 사람이 될게요. 다음 연애는 실패하지 않게 좋은 사람 보내주세요. 정원 역시 탑을 돌며 소원을 빌었다. 신해준이랑 잘 지내고 싶어요. 저는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다고요. 정원의 간절한 목소리에 선엽이 킥킥거리며 합장을 했다. 나도 탑을 돌며 소원을 빌었다.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는 여러분께 말하지 않으려 한다.

 이 글을 쓰는 동안 그 사람을 향해 빌었던 그 소원은 결국 이뤄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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