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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민주 Jul 15. 2024

시간의 주름을 만질 수 있다면

#16 장편소설 초고 작업을 마치며

 대학 시절부터 소설을 가르쳐주셨던 교수님과 계속해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처음 신춘문예 당선이 되었을 때 가족보다 먼저 당선 소식을 알린 사람도 교수님이었다. 오래도록 바래왔던 것이기에 당선 사실이 실은 나의 착각일까 두려워하며 새해가 시작되기 3일 전에 조심스레 교수님께 당선 소식을 알렸다. 그 원고는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작품이었다. 그래서 홀로 퇴고를 하고, 신문사에 당선소감과 함께 모든 작업을 마무리 했다. 교수님은 왜 그렇게 융통성 없이 꽁꽁 숨기고 있었냐며(나는 이런 면에서 꽤나 원칙주의적인 면모를 보인다) 그 자리에서 이제 ‘장편’을 써야 하지 않겠느냐고 바로 다음 목표로 가는 지도를 꺼내어 주셨다.  

    

  내게는 여러 선택지가 있었다. 단편을 더 습작해 중앙지로 한번 더 도전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고, 에세이를 쓰는 일이 꽤 즐거웠기 때문에 에세이를 습작해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장편에 대한 생각은 깊지 않았던 것 같다. 십 년 넘게 단편만 써온 데다 장편은 읽은 권수도 많지 않다. 장편에 대한 기본 작법부터 플롯을 만들어가는 노하우가 내게는 없었다. 무엇보다 새해전야에 다시금 책상 앞에 앉아 긴긴 시간을 글을 써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 억울하기도 했다. 이제 나 좀 그만해도 되는 거 아니야? 좀 쉬고 싶은데? 어딜 가든 ‘헤르미온느’라는 지긋지긋한 별명을 달고 산다고 하더라도 그런 나에게도 정체기는 오는 모양이다. 이제 와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올해 상반기를 보내며 나는 정말로 장편소설을 준비하는 일이 재미가 없었다.      


  1월 첫째 주 토요일부터 매일 아침 10시까지 선생님의 작업실에 갔다. 한 주도 빠짐없이. 아침에 시작된 합평은 네 명의 작가가 모여 많게는 오후 두 시가 넘어가도록 서로의 작품에 대한 피드백을 주고받았다. 수업이 끝난 뒤엔 찌뿌둥한 몸을 펴보겠다고 곧장 체육관에 갔다. 토요일에 시간을 내어 여행을 간다거나 특별한 약속을 잡는 일은 어림도 없었다. 불가피하게 수업을 빠지던 날에는 마음이 해이해진 것은 아니냐며 꾸중을 듣기도 했다. 그 사이 청소년 문학을 (엉망진창으로) 써냈고 그 소설을 쓰는 동안 다음 이야기를 구상하게 되었다. 성인을 대상으로 한 작품이나 한 개인의 어린 시절을 들여다보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나는 언제나 이해받지 못하는 인물을 그리고 싶었다. 그것이 바로 6월에 완성한 이야기. 집단에 어울리지 못하는 한 인물이 자신만의 ‘집’을 찾아가는 내용이다. 첫 장편을 쓸 때보다 더 재밌게 썼던 것 같다. 그렇게 첫 장편을 완성하고 수업은 한 달간의 휴식기를 가졌다.      


  토요일 아침을 마음껏 소비해도 된다는 사실에 내가 가장 먼저 선택한 것은 속초행 버스 티켓을 예매하는 것이었다. 좀체 짬이 나지 않아 당일치기 여행만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3일 동안 마음껏 걷고, 둘러볼 수 있는 마을을 여행하고 싶었다. 가급적이면 바닷가를 가고 싶었고, 또 가급적이면 동해를 보고 싶었다. 여행지에 도착해 나는 정말로 끊임없이 걸었다. 노트북 하나만을 배낭에 넣은 채 두 시간 거리도 마다 않고 그저 걸었다. 바닷가 마을의 구석구석을, 집의 구조를, 집 안의 화단과 반려동물이 낮잠을 자고 있는 모양새까지, 그런 것들을 보고 싶었다. 삶에 대한 여유를 가지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마음껏 늦잠을 자고, 체형관리의 강박에서 벗어나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먹고, 반드시 목표한 명소를 보지 못하더라도 괜찮아, 괜찮아, 민주야. 하고 스스로를 토닥일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실제로 지난 3일 동안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천하무적 길치이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변수도 많이 만났다. 그런 시간을 보내는 것이 너무나도 행복했다. 장편소설 작업을 끝내자마자 장편 마감을 이유로 중단했던 다른 원고 작업도 마무리지었다. 무려 여행지에서. 내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은 어떻게 '속초'에까지 노트북을 들고 갈 수 있냐며 욕을 퍼부었다. 인정하겠다. 그러나 시작한 일을 무사히 마무리지어갈 수 있어 감사하고 행복하다.


  상반기엔 내게 찾아오는 기회들이 너무 감사해 닥치는 대로 일을 받았다. 헤르미온느라고 하기엔 좀체 시간관리가 되지 않았다. 4월까진 4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다. 홀로 오랜 시간을 보내던 몇 년 전과 달리 많은 사람을 만나는 일을 하게 되면서 오락적인 시간도 제법 갖게 되었다. 사람들을 만나며 나조차도 알지 못했던 나의 외향적인 성격을 발견할 수 있었고,  내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를 깨달을 수 있는 시간들을 보냈다. 몸에 무리가 올까 체력을 키우겠다며 체육관에 머무는 시간도 길었다. 글이 써지지 않을 때에도 체육관에 가 있는 것이 속편 했다. 덕분에 팔에 없던 단단함이 생기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내면에도 근력이 생긴 모양이다. 장편을 준비하는 동안 자연스레 <사랑하는 시대에게> 에세이를 미루게 되었지만  이제 다시 개운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시대에게>도 느슨하게 시작해볼까 한다. 이것이 늦봄과 초여름에 내게 있었던 이야기. 시간의 주름을 만질 수 있다면 나는 그 시간 동안의 나를 조금 더 꼬옥 안아주고 싶다. 잠깐 정체되고 주춤했지만 다시 힘차게, 그리고 나답게 나아가보려 한다. 때로는 방향을 잃거나, 전혀 예상치 못한 길을 가보는 것도 나아가는 길이겠지. 일과 삶의 균형을 적절히 맞춰가며 '나'를 잘 지켜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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