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나는 태어날 때부터 목소리가 없었는데 사람들은 겨우 목소리 하나 잃어버린 것 가지고 세상에 대단한 재앙이 일어난 것처럼 굴었다. 이 세상은 음성 언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실제로도 어떤 사람들은 음성 언어보다 문자 언어를 더 편하게 사용하고 있었으나 어찌 됐건 거리낌 없이 사용하던 인간의 능력 중 하나를 자연적으로 금지당한 것은 충격적인 일인 것이다. 세상엔 말하지 못해 죽고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태초부터 말할 수 없어 그것을 비정상적인 영역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나의 경우가 그렇고, 우혁의 경우가 그렇듯이.
우혁이와는 작년 여름에 멕시칸 레스토랑 ‘타코델리’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 만나게 되었다. 우혁이는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남자애였고, 나는 우혁이보다 세 살이 많았으나 어릴 때 선천적으로 앓던 질환 때문에 3년간 병원 신세를 지게 된 것을 이유로 학교에 조금 늦게 들어갔으므로 어쩌면 우리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속도는 비슷했을지도 모르겠다.
우혁이는 아이돌 지망생이었으나 2년 전에 소속사에서 나왔다. 그리고는 당시 같은 소속사 연습생이었던 친구들 중 마음이 맞는 이들과 인디밴드를 구성했다고 했다. 우혁이는 작곡을 배우고 있었고, 굳이 포지션을 따지자면 보컬이었으며 그렇지만 작은 몸동작으로도 사람의 기분을 흥겹게 하는 묘한 느낌의 춤을 추는 걸 좋아했고 실제로도 잘 췄다.
나는 노래를 듣는 걸 좋아하진 않았지만 우혁이가 선곡하는 노래들은 가끔 마음속으로 따라 부르곤 했는데 소리내어 노래를 부를 순 없었다. 나는 선천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없었으므로 그것이 불편하거나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밤새 잠을 자다가 악몽을 꾸는 날이 있더라도, 롯데월드에서 바이킹 맨 끝줄에 타더라도 나는 소리를 질러본 적이 없다. 내 목구멍 어딘가에 박혀 있을 성대는 제 기능을 하지 못했고, 소리를 내려고 해도 입만 뻐끔거릴 뿐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가끔 나는 내 목소리가 어떻게 생겼을까 호기심을 갖기도 했으나 그건 모두 어린 시절의 이야기일 뿐 사춘기 이후로는 우혁이를 만나기 전까지 한 번도 내 목소리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우혁이는 말을 하고 싶지만 말을 할 수 없는 편에 속해 있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우혁이는 5년 전 ‘사일런스’가 시작된 이래로 후천적으로 말을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어떤 원인으로 ‘사일런스’가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사일런스’는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됐다. 어떤 사람들은 대기오염이나 플라스틱을 태울 때 발생하는 환경호르몬 같은 것이 인간의 발성에 영향을 미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했으나 ‘사일런스’는 기이하게 사람이 목소리를 내려고 할 때마다 인간의 수명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말을 하면 할수록 호흡이 가빠지고 산소포화도는 급속히 낮아졌으며 결국 말을 할 때마다 질식의 형태로 죽어가기 시작했다. ‘사일런스’가 발생한 첫날에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건 공교롭게도 아이돌 콘서트장이었고, 그다음으로는 신생아실이었다. 처음 사람들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어가기 시작했으나 후에는 입을 다무는 것으로, 소리를 내지 않는 것으로 점차 해결점을 찾아갔다.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세상은 말을 하지 않는 쪽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는데, 말을 하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떤 사람들은 말을 하지 못해 스스로를 옥죄기도 했고, 이때다 싶어 쉴 새 없이 말을 해대며 죽음을 택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어찌 됐건 ‘사일런스’ 이후로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도 목소리를 가질 수 없었다. 5년 전부터 신생아는 우는 소리를 낼 수 없어 성대 제거 수술을 받아야 했고, 그런 이유로 나처럼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목소리를 확인할 수 없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그런 시대에 우혁이는 자신의 목소리를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우혁이가 소속사를 나오게 된 건 우혁이의 선택이 아니라 회사가 망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두 차례 수익이 나지 않는 아이돌 그룹을 미련스럽게 지탱하고 있었던 데다가 노래까지 부를 수 없었으므로 회사는 급속도로 기울어졌고, 우혁이는 데뷔도 하지 못한 채 연습생의 신분으로 회사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우혁이는 고등학교를 자퇴했고, 현재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대학교에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도쿄 여행을 가는 게 내 인생의 로망이자 꿈이었기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우혁이는 단지 먹고, 자고, 생활하는데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다. 우리 두 사람은 만나게 된 계기도, 지향하는 미래도 달랐지만 나는 어쩐지 그런 우혁이를 좋아했다. 한쪽 눈에만 진 쌍꺼풀을 좋아했고, 손님이 없을 때마다 내 귀에 에어팟을 꽂아주며 제 노래를 들어보라고 손짓하는 그 모습이 좋았고, 내가 입맛이 없다고 말할 때마다 초콜릿이 발린 비스킷을 슬그머니 주머니에 넣어주는 그 마음이 좋았다. 우혁이는 여름의 싱그러움을 닮았고, 우혁이 만드는 노래는 한 여름 지중해에서 서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나게 했다. 우혁이의 꿈은 강렬한 태양 빛처럼 뜨거웠고, 나는 그래서 우혁이가 좋았다.
우혁이와 나는 주로 홀서빙 담당이었고, 손님에게 메뉴판을 전달하고, 메뉴판에 있는 메뉴를 손가락으로 고르면 계산을 하고, 주방에서 나온 음식을 갖다 주는 식이었는데, 최근에 사장이 키오스크를 들이게 되면서 우혁이는 주로 주방에서 식기류를 설거지하고, 나는 키오스크가 익숙하지 않은 손님을 돕거나 식사를 마친 손님이 떠난 자리를 청소하는 일을 했다. 우혁이는 종종 말을 소리내어 하려는 버릇이 있었고, 그때마다 눈을 크게 뜨며 손바닥으로 제 입술을 틀어막았는데 그 표정이 마치 영화 <나 홀로 집에>에서 정말로 홀로 남겨진 케빈의 얼굴을 떠올리게 해서 나는 웃었고, 우혁이는 제법 심각한 표정이었으나 이내 나를 따라 웃곤 했다. 나는 선천적으로 말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말과 관련된 쪽은 주로 내가, 말이 필요 없는 쪽은 주로 우혁이 담당했다. ‘사일런스’가 시작된 이후로 사람들은 주로 휴대전화 메시지를 통해 대화를 나눴고, 그래서 함께 있는 동안에도 휴대전화를 보고 있을 때가 더 많았으나 그건 사일런스가 시작되기 이전에도 익숙한 풍경이었으므로 그렇게 이질적인 것은 없었다.
우혁이와 나도 주로 휴대전화를 통해 대화를 했다. 끝과 끝에 있다고만 생각했던 우혁이와 나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건 우리 둘 다 빗소리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우혁이는 인트로에 빗소리가 들어가는 노래를 좋아했고, 나는 비가 오는 날 창밖을 보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일까 비가 오는 날이면 가게에서 우리 두 사람은 가장 에너지가 넘쳤고, 그때마다 수영 언니는 우릴 보고 당최 이해할 수 없다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했다.
수영 언니는 ‘타코델리’의 주방장이자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요리를 가장 잘하는 사람이었다. 수영 언니는 소금이나 식초 같은 재료를 대충 넣고도 기가 막히게 간을 맞추는 재능이 있었고, 그래서일까 수영 언니의 음식은 언제나 맛이 있었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 손님이 잠시 끊길 타이밍이면 수영 언니는 점심이나 간식으로 남는 재료에 부침가루를 쏟아붓고 빈대떡을 구워주곤 했는데, 우혁이와 나는 그걸 먹기 위해 비가 왔으면 좋겠다고 수영 언니가 속해 있는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목소리가 없어도 어려움 없이 잘 지냈고, 처음 말할 수 없는 세상이 찾아왔을 때 사람들이 우려했던 것보다 제법 이 세계에 잘 적응해가고 있었다. 나는 현재에 상태에 만족한다고 생각했고, 작년 크리스마스에 우혁이로부터 고백을 받았을 땐 지금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수영 언니와 우혁이는 언제고 말을 할 수 있는 세계가 오기를 꿈꾸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었다. ‘사일런스’가 끝난다고 하더라도 나는 앞으로 계속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므로, 어쩌면 말을 할 수 있게 된다면 우혁이 나를 떠나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나는 우혁이가 노래를 부르고 싶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말할 수 없는 세계가 지속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아마도 우혁이는 이 사실을 영영 모르겠지. 모를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우혁이에게 해본 적도, 언어로서 남긴 적이 없으므로.
*
우혁이는 작년 연말에 말을 하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다.
새해가 시작되던 순간 우혁이는 동그란 내 등을 폭 안아주었고, 어떤 소원을 빌었냐는 물음에 잠시 생각하더니 휴대전화를 꺼내 이 지긋지긋한 ‘사일런스’가 끝났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빌었다고 말해주었다. 너는? 우혁의 물음에 나는 휴대전화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다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 시절이 계속되게 해달라고 빌었어. 우혁이에게는 차마 닿지 못할 말들이 허공을 맴돌다가 뒤늦게 쌓인 눈더미처럼 내 마음에 내려앉았다.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시대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체념하지 않고 끊임없이 말에 갈증을 느끼고, 목소리를 내는 것에 집중했다. 지나간 시절의 라디오를 들으며 생각에 잠기거나 오래전에 방영된 드라마를 보면서 어떤 순간들을 추억하기도 했다. 그것은 단순히 기념비적인 의식은 아니었고, 그 시절에 자유롭게 말을 뱉을 수 있었던 것을 그리워하는 것으로 보였는데, 나로서는 도저히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고, 특히나 산의 정상에서 야호, 하고 메아리치는 풍경을 설명할 때면 나는 우혁이가 조금 미웠다. 메아리를 들어본 적은 있었으나 메아리를 직접 경험해 본 적은 없었고, 앞으로도 그건 나와는 상관없는 것들일 것이므로 나는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나눌 때면 어쩐지 소외된 기분이 들었다.
그날도 우혁이는 나에게 2000년대 초반 동네 어귀에서 찹쌀떡과 메밀묵을 파는 어느 상인의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찹쌀떡- 메밀묵- 끝 음이 길게 늘어지는 그 목소리는 어디에나 있을 것 같았고, 어린 시절 여름밤이면 창밖에서 일정한 속도로 들려오던 것이기도 했다. 지금은 그런 목소리가 없지. 그런 걸 파는 사람도 없어. 무엇보다 그것은 나에게 허락되지 않은 소음이었고, 나는 조금 예민해진 표정으로 우혁이를 바라보았다.
‘이것 봐. 이거 진짜 추억이잖아.’
우혁이가 내게 보내온 메시지와 우혁이의 들뜬 입 모양을 바라보면서 나는 무어라고 답을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나는 단지 목소리를 내지 못했을 뿐 말을 못 했던 것은 아닌데 어쩐지 우혁이와 함께 대화를 나누다 보면 말을 잃어가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우혁이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번엔 대놓고 유튜브를 틀어놓고는 저가 좋아하는 가수의 라이브 공연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이미 몇 번이나 들었던 것이었고, 처음에는 좋았지만 반복해서 들으니 나중엔 지겨워졌다. 나는 하품을 참으며 우혁이가 신나 있는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았고, 우혁이는 마지막엔 우울해진 얼굴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나는 우혁이가 왜 그러는지 알고 있었다. 우혁이에게 목소리란 우혁이의 전부, 우혁이의 꿈이자 지금의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우혁이는 비 오는 날 나와 손을 잡고 가만히 음악을 듣거나 초저녁에 조명을 받아 다채로운 빛을 뽐내는 분수 쇼를 보는 것도 좋아했지만 그보다 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것을 몇 배는 더 좋아했다.
우혁이는 노래를 부를 때마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밀려 나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정확히는 태양 빛으로 뜨거운 사막을 걷는 와중에 오아시스를 만난 것 같은 기분. 음정에 맞게 목소리를 밀어낼 때마다 갈증으로 고통스럽던 목을 시원하게 적셔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노래를 부른다는 건 그런 느낌인 걸까. 나는 우혁이의 말을 들을 때마다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나에게는 그런 세계가 영영 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조금 슬펐고 그랬기에 우혁이에게도 그런 세계는 영영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마다 나는 내 자신에 대해 흠칫 놀라곤 했는데 그건 내가 우혁이를 사랑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우혁이보다 덜 불쌍하다고 여기는 내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걸까 하는 고민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우혁이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던 날을 기억한다. 겨우 열다섯 또는 열여섯쯤으로 보였던 우혁이는 내가 먼저 졸업한 학교의 교복을 입고 스탠딩 마이크 앞에 서 있었다. 그건 우혁이의 소속사에서 카메라 테스트를 하던 모습이었고, 우혁이는 한 손으로 마이크를 쓰다듬고는 노래를 시작했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부딪혔다 떨어지며 침이 고였다가 삼켜지기를 반복했다. 우혁이의 목소리는 사춘기를 겪고 있는 보통 남자애들의 것과 비슷했고, 아마도 지금의 목소리는 그때와 많이 다를 것이 분명했다. 몽환적인 멜로디 때문이었을까 그날 우혁이의 노래는 어쩐지 초저녁에 얕게 잠에 빠졌을 때 꾸는 꿈같았다. 우혁이의 목소리는 고음으로 올라갈수록 콧잔등을 찡그리게 했고, 지나고 나면 그 특유의 목소리가 자주 생각나곤 했다. 카메라는 우혁이의 가로로 긴 눈매를, 오똑하게 선 콧대를, 그리고 토마토의 표면처럼 탱탱한 입술을 차례로 비췄고, 이어 우혁이가 스탠딩 마이크를 잡고 있던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킬 때는 손가락에 줌을 잡곤 했다. 우혁이가 그런 시절을 보내던 연습실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 장소가 되었다. 그 시절의 우혁이의 목소리도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과거가 되었다. 그렇지만 우혁이는 그때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우혁이는 노래를 하지 못하게 된 대신 노래를 만들 수 있었고, 스스로 목에 힘을 주고, 성대를 자극해 소리를 내지 못하는 대신 오래전에 녹음되었던 자신의 목소리를 기계음에 입혀 가상으로 만들어낼 줄 알았다. 그러니까 결국 우혁이는 노래를 하는 사람인 것이다.
내가 학교에 있는 동안 우혁이는 주로 작업실에 있었다. 작업실이라고 하지만 실은 우혁이 아는 형이나 동생들이 함께 얻은 지하 방에 키보드를 비롯한 악기와 곡 작업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설치된 노트북 몇 개가 있는 투룸이었고, 가끔 우혁이의 인스타그램에 업로드되는 사진엔 작업실에서 가장 눈에 띄는 빨간색 소파가 자주 등장했다. 우혁이는 그곳에서 잠을 자기도 하고, 라면을 먹기도 했으며 노래를 떠올리거나 다른 사람의 노래를 듣고 감상을 남기기도 했다. 그럴 때면 우혁이는 꼭 다른 사람 같았는데, 나와 함께 있지 않는 동안의 우혁이의 주변엔 온통 음악과 관련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혁이의 작업실은 ‘타코델리’에서 20분쯤 걸어가면 나오는 곳으로, 버스를 타면 5분 거리였고, 내가 다니는 학교와는 걸어서 50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그때까지 우혁이는 ‘타코델리’에서 일하면서 한 번도 지각이나 결석이란 것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날 우혁이가 ‘타코델리’에 2시간 정도 늦게 왔을 때 우혁이가 어떤 이유로 늦게 온 것인지 궁금했다. 비가 내리는 날이었고, 나는 우혁이를 기다리면서 키오스크에 묻은 다른 사람들의 지문을 닦아내거나 냅킨에 일회용 포크나 나이프를 감싸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수영 언니 역시 평소와 다르게 자주 문이 열리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으나 어쩐지 상기된 얼굴이 된 것 같았고 나는 우혁이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이라고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아마도 수영 언니는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우혁이는 나에게는 말해주지 않고 수영 언니에게는 말해준 어떤 비밀이 생긴 것이다.
우혁이는 우산을 제 몸에 딱 붙여 아래로 접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 바람에 자주 바지에 빗물을 묻히곤 했고, 그때마다 사람들은 우혁이에게 옷이 다 젖어버려서 어떡하냐고 걱정을 했지만 우혁이는 말없이 바지에 묻은 빗방울을 털어내며 금방 괜찮아질 것이라고 말했고, 나는 우혁이가 금방 마른다고 말하지 않고 괜찮아진다고 말하는 그 버릇이 어쩐지 우혁이의 그 자체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날도 우혁이는 제 옷에 묻은 빗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손등으로 툭툭 털어내며 우산을 접었다. 내내 뒤집개로 실없이 덜 익은 고기를 뒤집던 수영 언니는 우혁이를 보자마자 토끼 눈이 되어 우혁이에게 입술을 뻐끔거렸다.
‘합격했어?’
수영 언니의 물음에 우혁이는 두피가 훤히 드러나도록 깎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수영 언니는 우혁이에게 엄지손가락을 척하고 내밀어 보였고, 그때까지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던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우혁이를 바라보았다. 우혁이는 나에게 여태까지 보여준 적 없었던, 천진난만하고도 매우 신나 보이는 얼굴로 나를 폭 안아주었고, 나는 우혁이에게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긴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원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아.’
우혁이가 다시 내 얼굴을 보고 입 모양을 바꿔가며 나에게 말했을 때까지도 나는 그게 우혁이가 음성 언어 재활 치료 임상 실험 대상에 선정이 되었다는 사실을, 제 인생을 거는 대신에 목숨을 건 시간을 보내리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우혁이가 어떤 세계의 영웅들처럼 대단하고 멋진 사람이라고 말하곤 했지만, 나에게는 때로 보란 듯이 절벽을 향해 돌진하는 어리석은 까마귀 같았다.
*
어떤 꿈은 목숨을 건 내기 같다. 우혁이의 꿈이 그랬고, 우혁이의 작업실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그랬고, 우혁이의 목소리는 아니지만 우혁이가 내는 음표들의 외침이 그랬다. 어떤 사람들은 간절한 꿈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기도 한다. 그중에는 나도 있었을 것이다. 우혁이는 끝내 내 곁을 떠났다. 초여름이 시작되는 무렵이었고, 나는 전날까지도 우혁이를 설득하기 위해 학교도 가지 않고 우혁이의 작업실을 찾았다.
작업실의 문을 두드렸을 때, 그곳엔 우혁이 혼자 남아 마지막으로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근처 편의점에서 구해온 것 같은 라면 박스엔 우혁이가 돌아오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챙겨야 하는 짐들을 넣어두었다. 박스 날개엔 오래전에 물에 젖은 흔적이 있었다. 우혁이는 작업실 동료들과 함께 돈을 모아 산 장비들을 쓰다듬다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액자라던가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열쇠고리 같은 것들을 박스에 담았고, 작업실 책장에 아무렇게나 꽂혀 있던 연습장들을 담았다. 우혁이는 그런 건 자신에게만 중요할 것이라고 했다. 만일 이곳에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면 이런 게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봐주지 않을 것이다, 라는 게 우혁이의 생각이었다.
‘우혁아.’
나는 휴대전화에 우혁이의 이름을 몇 번이고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다 우혁이의 이름을 썼다. 그러자 우혁이가 나를 돌아보았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로 흔들었다. 우혁아, 가지 마. 네가 돌아오더라도 나는 끝까지 말하지 못할 거야. 나는 원래 말할 수 없는 사람이었어. 나는 네 이름을 부를 수 없을 거야. 그렇지만 그런 말들을 차마 우혁이에게 할 수 없었고 우혁이는 복잡하고 난감한 미소를 보이며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후하고 한숨을 쉬었다. 뜨거운 입김이 내 이마에 닿았고, 우혁이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나에게 말했다.
“사랑해. 사랑해서 그래.”
우혁이의 목소리는 중학생 때의 목소리보다 한참이나 깊고 굵었으나 투명하고 맑은 음색은 여전했다. 그러나 우혁이의 목소리는 내가 아는 우혁이처럼 단단하고 굳세지 않은 것 같이 보였고 금방 부서질 것처럼 연약한 사람같이 느껴졌다. 우혁이는 말을 마치자마자 금세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고, 숨을 오래 참은 사람의 것과 비슷했는데, 아무래도 말을 함과 동시에 숨을 쉬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우혁이는 빨간 소파의 암 쿠션에 엉덩이를 기대고 앉아 한참을 헉헉거리다가 30분 정도가 지나서야 점차 컨디션을 회복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우혁이에게 미지근한 물을 가져다주고, 우혁이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다가 더 이상 우혁이에게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날 우혁이는 내 허리를 안고 한참을 기대어 있었고, 나 역시 우혁이의 얼굴을 감싸 안고는 동의도, 반대도 하지 않은 대로 우혁이와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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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는 날마다 우혁이를 생각했다. 그렇게 떠난 우혁이는 한 달을 넘게 연락이 없었고,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우혁이는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 있는 것 같았다. 우혁이는 지구에서 음성 언어를 발화할 수 있도록 실험을 진행하는 공인된 국내 연구기관에 선발되었다. 그중 일부는 방송사와 함께 실험의 진행 과정과 결과에 대해 알려주는 프로그램을 기획했는데 우혁이는 방송에 출연하는 쪽에 속했다. 그 프로그램은 첫 방송분이 업로드되자마자 많은 관심을 받았고, 열 명 정도의 사람들이 출연했다.
실험에 참여한 사람들은 다양한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 목소리와 관련된 사람들이었는데, 지하철 안내 방송이나 AI의 목소리를 녹음했던 성우도 있었고, 해양 구조대원도 있었으며, 온라인 강의 강사도 있었다. 모두 과거 직업을 가지고 있었으나 현재는 원치 않은 이유로 직업을 상실한 상태였고, 다시 예전의 상황으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중에서 우혁이는 아직 데뷔조차 하지 못한 가수 지망생으로 소개가 되었고, 사람들은 과거 자신의 연습 영상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던 우혁이의 모습에 공감과 박수를 보냈다.
한차례 사람들의 사연이 소개되고 난 뒤엔 본격적으로 훈련에 들어갔다.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물속에서는 목소리를 내더라도 자극을 받지 않았는데, 그건 지상에 있을 때보다 수소의 비율이 높기 때문이었다. 화면 속엔 커다란 고글을 쓰고 산소통을 맨 우혁이가 긴장된 얼굴로 수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혁이는 물속에서 소리를 지르고, 물을 마시고, 또다시 소리를 지르기를 반복했다. 우혁이의 목소리는 내가 들었던 것보다 둔탁하고 낮게 들렸고, 무엇보다 화면 속의 우혁이는 무척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다른 사람들이 훈련을 받는 모습도 차례로 비추었지만 나에게는 오직 우혁이의 모습만이 짙게 인상에 남았다. 비가 오는 날을 좋아했던 우혁이는 그날 그렇게 물속에 들어갔다 나온 뒤로는 더 이상 비 오는 날을 좋아하지 않게 된 것 같았다. 얼마 뒤 인터뷰가 있던 날 창밖으로 비가 왔음에도 우혁이는 창밖을 힐끔 보기만 할 뿐, ‘타코델리’에 있을 때처럼 가만히 멈춰 서서 빗방울을 바라보거나 기분이 좋은 듯 어깨를 으쓱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외적인 모습만이 아니더라도 나는 우혁이의 마음이 조금씩 내가 우려했던 방향으로 죽어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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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봄이 오고 있다고 생각하던 무렵이었다. 겨울 동안 소복하게 쌓였던 눈은 이미 녹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음지에 모여 있던 눈은 쌓여 있던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멈춰 있어 어쩌면 적어도 그곳에서는 겨울이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때였다. 그때 나는 겨울까지 길렀던 머리를 자르기 위해 미용실에 들렀다. 다음 학기를 앞두고 친한 동기 몇을 따라 휴학을 결정했고, 막상 결정해 놓고는 그 시간들을 어떻게 채울지 고민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도서관에서 가서 책을 들여다보고 유튜브를 틀어 휴학생들의 일상을 관찰했으며, 하루에도 몇 번씩 구직 사이트를 들어가 보며 전공을 살려 취업을 할 만한 채용공고를 확인했다. 사일런스가 시작되기 이전만 해도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비슷한 삶을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나는 주로 말을 하지 않아도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는 직업들을 찾곤 했는데 그게 번역가였고, 하고 많은 언어 중에 왜 일본어를 선택했냐고 묻는다면, 조금 뜬금없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바닷마을 다이어리>에 카메오로 등장했던 사카구치 켄타로를 내내 덕질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이야기는 뒤로하더라도 나는 일본의 어떤 문화들을 좋아했다. 귀신 이야기 같은 건 아니었지만 일본에서 유행하는 패션이나 노래, 책과 영화 같은 걸 좋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심스럽고 작고 귀여운 어떤 것들을 좋아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이 말할 수 없는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아졌다. 수영 언니는 여전히 말할 수 없어 우혁이의 자리를 대신할 직원에게 잔소리를 하지 못해 투덜거리곤 했지만 나는 엄두도 내지 않았던 기업의 홍보팀이나 무역회사의 영업팀, 그게 아니더라도 켄타로 오빠가 한국에서 업무 제휴를 맺고 있는 에이전시에서도 뭐라도 지원할 수 있게 되었다. 모두가 말을 하지 못하게 되니 세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세상은 너무도 빠르게 환경에 맞게 적응해가고 있었고, 이제는 메시지나 메일만으로도 충분히 소통이 가능했으니까. 먼저 취업한 선배들에 따르면 어느 기업에서는 화상통화 중에 입 모양만 뻐끔거려도 AI 기술이 알아서 말을 음성 언어로 변환해 주는 기술을 도입했다고 했다.
그해 나는 해외 영화를 수입하는 배급사나 해외 문학 작품을 취급하는 출판사에 관심이 있었는데 그 모든 것들을 생각하면서도 가장 먼저 한 일은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이었다. 여름에서 겨울로 가면서 어깨에 닿을락 말락 했던 머리카락이 어느새 브래지어 밑까지 길게 늘어져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런 건 불편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세수를 할 때나 멸치국수 같은 걸 먹을 때 긴 머리카락은 자꾸만 신경이 쓰이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우혁이를 잊고 있었다.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한 것은 아니었지만 우혁이의 초기 방송분이 끝나고 다음 시즌을 기다리는 동안 우혁이는 내 삶에서 점점 밀려나고 있었다. 내 마음속에 영원히 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는 우혁이는, 여름의 뜨거움을 닮은 우혁이는 내게서 문득 떠오르는 기억 속에서만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 현재진행형보다는 과거형이 되어버린 존재. 그런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우혁이가 참가한 실험의 프로그램이 나도 모르는 사이 새 시즌이 시작되었다는 건 미용실에서 알게 되었다. 그해 들어 처음으로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자주 가던 미용실에는 손님이 많았고, 6개의 의자에 두 명의 직원이 분주하게 롤을 말거나 염색약을 바르고, 커트 가위를 꺼냈다 집어넣으며 정신없이 의자와 의자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18인치 모니터에선 우혁이를 닮은 남자가 마이크에 대고 무어라고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미용실 안의 잡다한 소음들로 인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우혁이는 정확히 음성 언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생방송이었고, 우혁이는 야외 파라솔 아래에서 제 앞에 마이크를 갖다 대고 있는 사회자와 마주 보는 채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사회자의 말은 자막으로 처리가 되었지만 우혁이는 입 모양을 벙긋거렸다. 처음 봤을 땐 그게 우혁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두상이 훤히 드러나 보였던 짧은 머리카락은 어느새 길러 2000년대 초에 유행할법한 스타일을 연상시켰고, 그래서 우혁이가 반곱슬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보다 우혁이의 볼은 얇게 패여 있었는데 계절이 바뀌는 사이 살이 많이 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날 뉴스에는 연일 ‘사일런스’ 시대의 종료 시점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보도자료로 쓰인 우혁이의 인터뷰 영상은 세계적으로도 화제가 되었다. 나는 끝이 갈라진 부분을 댕강 잘라버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집에서 우혁이가 나오는 영상을 다시 찾아보았다. 그러니까 우혁이는 습기가 많은 곳에서, 이를테면 비가 오는 날마다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우혁이는 우혁이의 소원대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우혁이의 목소리는 내가 알던 그 목소리가 아니었다. 우혁이의 목소리는 전처럼 맑고 투명하지 않았다. 노래를 불렀을 때 어울리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끝소리에 갈라짐이 있는 쉰 목소리가 되었다. 어렸을 적 금연 광고에서 보았던 목 수술을 받은 환자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우혁이뿐만이 아니라 다른 실험에 참여한 사람들도 우혁이처럼 목소리가 변했다고 말하곤 했다. 모두들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토록 원했던 시절을 되찾은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 인터뷰가 있고서도 우혁이는 계속해서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다시 여름이 찾아왔을 때도 우혁이의 목소리는 회복되지 않았고, 우혁이가 노래하는 영상을 홍보자료로 썼던 프로그램 제작사에서는 슬그머니 우혁이를 편집해냈다. 우혁이는 여전히 어딘가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겠지만 우혁이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우혁이에게 몇 개의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이 없었고, 그렇게 우혁이의 소식은 가물가물해졌다. 나는 어디선가 우혁이가 노래를 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혁이의 목소리를 상상했다. 알 수 없지만 마음을 울리는 그 순간들을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둔탁해진, 그러니까 멜로디에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를 상상했다. 우혁이가 좌절할 순간들을 생각했다. 우혁이와 비가 오는 날들을 생각했다. 비가 올 때마다 우혁이를 생각했다. 그리고 이젠 더 이상 비가 오는 날을 기다리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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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서 말하는 우혁이를 본 적이 있다.
처음 우혁이를 만났을 때처럼 파르라니 머리를 깎은 우혁이는 무언가에 골몰할 때마다 눈 밑 주름이 잡혔다. 멀리서 보면 잘 모르겠지만 가까이서 보면 그게 잘 보였고, 그래서 우혁이의 나이가 가늠되었다. 스물다섯 또는 스물여섯이었을 것이다. 사일런스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우혁이는 사일런스 시대에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나 노래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는 못했다. 우혁은 실험의 부작용으로 목소리에 변화가 왔다. 세상에는 말할 수 있어도 노래를 포기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혁이는 스스로 잊혀지지 않고 젊은 세대에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주목을 받았고, 준수한 외모와 스타일로 가지고 있던 SNS가 인기를 얻으면서 청년 세대의 인플루언서가 되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우혁이가 단지 옷을 잘 입거나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알지만 오직 나만이 노래하는 우혁이를 계속해서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오래전 작업실에서 만난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우혁이를 다시 만난 곳은 ‘사일런스’를 배경으로 제작된 영화의 홍보자료 영상 촬영을 위해서였다. 스물여덟의 나는 영화 배급사에서 홍보팀으로 일을 하게 되었고, 그 영화는 일본에서 수입해 온 것이었다. 95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배우들은 자막도 없이, 목소리도 없이 오로지 수어나 문자 언어로만 대화를 나눴고, 언어를 주고받는 것보단 어떤 사물을 바라보거나 서로를 향해 눈빛을 보내는 시간들이 더 길었다. 일본 특유의 감각이 돋보이는 영화였는데, 그 영화는 현재의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공감이 될 요소들이 많았다. 사일런스가 시작된 이래로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할 수 없었고, 그래서 세상은 늘 조용하게 북적였다.
인터뷰를 하는 날에는 비가 많이 내렸다. 일부러 일기예보를 보고 날을 선택한 것도 있었지만 만일 비가 오지 않는다면 장소를 바닷가나 호수로 변경하거나 비가 오는 날로 날짜를 변경하는 방법밖에 없었는데, 그날은 운이 좋았던 것이다. 우혁이는 그날 그 자리에 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우혁이는 내가 알던 그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우혁이의 얼굴은 내가 알던 그때의 사람이 아니었다. 우혁이에게는 나에게는 말할 수 없는 어떤 시절들이 있어 보였다. 마치 내가 우혁이에게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듯이.
우혁이는 영화에 대한 짧은 감상과 응원을 보내면서도 카메라 뒤의 나를 흘끔 바라보았다. 우혁이는 나를 알아보는 듯 보였지만 쉬는 시간에 나에게 먼저 다가오거나 내쪽을 계속해서 바라보지 않았다. 4년이라는 시간은 그런 의미에서 참 길게 느껴졌다. 가깝게 지내던 사람을 낯설게 반길 수도 있는 그런 시간. 나는 우혁이에게 그런 사람이 되었고, 우혁이는 더 이상 내 마음속에서 노래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이 들자 우혁이가 낯설어졌고, 비로소 내 마음속에서도 우혁이를 밀어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다 우혁이에 대해 잘 모르는 신입 직원이 근황을 물었을 때, 우혁이는 준비된 질문이 아니라 조금 당황스러워하더니 잠시 생각하는 듯 입술을 다물다 다시 조심스럽게 떼었다. 언젠가 내게서 떠나갈 것을 암시하던 표정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 슬퍼졌고, 내 앞에 있는 우혁이를 다시 카메라 프레임 속의 우혁이로 시선을 가져갔다. 우혁이는 그런 내 마음을 알까?
“그렇지만 노래를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얼마간 생각하던 우혁이가 말했다. 여전히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단어를 뱉던 우혁이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소원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아. 언젠가 우혁이가 했던 말들을 떠올린다. 세상엔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프레임 속에 담긴 우혁이에게 쏟아질 어떤 말들을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