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그때 우리는 그 모임에 거의 중독되어 있었다. 한 학기에 두 번 정도 자기계발서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독후감을 써낸다. 그건 대학교 중앙 동아리로서 학생회관에 동아리실을 배정받기 위해, 그리고 예산을 마련하기 위한 표면적인 활동이었지만 사실 이 동아리의 진짜 목적은 자신의 실패를 인정받기 위한 일종의 작은 모임들이 모여 이루는 공동체적 동아리였다. 공동체적 동아리. 처음 승호로부터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꽤 희생적이면서 외향적인 단어 조합에 웃음을 보였다. 그러니까 이건 <실.사.모>. 어떤 사람들-주로 교수님-은 ‘실력 있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자기계발을 하는 동아리인 것으로 알고 있겠지만 사실은 ‘실패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정확했다. 실패를 사랑하는 것도 아닌, 실패하는 사람들이라니. 싱겁다고 생각했다.
실패하는 사람들의 모임. 그 동아리의 진짜 이름을 알게 된 건 그들이 먼저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맞이한 첫 3월, 평소대로라면 수업이 끝나자마자 다음 수업까지 남는 시간을 죽이기 위해 도서관 구석으로 가 찌그러진 백팩처럼 조용히 잠을 자다 나온다. 5층짜리 도서관에서 내가 항상 들리는 구역은 해외 원서가 모여 있는 490번대 서고였다. 수두룩 빽빽하게 꽂혀 있는 책들 사이 사서 업무를 보는 사람도, 책을 빌리러, 읽으러 온 사람도 없는 구역. 그러니까 혼자 있기 딱 좋았고, 내가 읽을 수 있는 내용도 아는 내용도 없었기에 정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날도 예정대로라면 도서관에 가 있을 시간이었지만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졸린 눈을 비비며 후문에서 가장 가까운 식당에 들어갔다. 낮에는 부대찌개나 불고기백반을 팔고, 밤에는 치킨과 맥주를 파는 곳이었는데 지난주에 학교에서 신입생 환영회를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식당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김치찌개와 소주를 시켰다. 알바생이 잠깐 주방과 나를 번갈아보며 눈치를 살피다가 잔과 병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김치찌개는 내 속을 대변하듯 뚝배기 속에서 부글거리며 등장했다.
재작년까지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두 번의 입시 준비를 하면서 부모님은 나에게 이번엔 신중하게 결정한 것이 맞느냐고 몇 번이고 물었다. 그 모습은 마치 편의점에서 1+1 상품을 2번 계산한 직원을 타이르듯 혼내는 점장 같았다. 사실 나도 모르지. 이번엔 잘 고른 건지. 학교를 고른 건 그런 게 아닌가. 학교는 물성이고 진짜 중요한 건 학교 내에서 살아가는, 그 생태 속의 사람들인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입학금과 등록금을 이체하던 날, 그런 말들을 뱉고 싶었지만 차마 부모님한테는 그 말을 하지 못하고 나와 같은 고등학교를 나온 친구들에게 주절거렸다. 친구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벌게져 있었는데 내 인생에 취했다기보다는 그냥 알콜에 이미 져버린 것 같았다. 이런 걸 두고 낮이밤저. 뭐 그런 거라고 하던가? 아무튼 나는 깨달았다. 사실 학교라는 거 다 비슷비슷하구나. 배우는 것도 다 비슷비슷해. 결론은 그냥 이번에도 잘못 고른 거야. 아니, 잘못 골랐다기보다는 잘 고를 수 있는 건 없어. 그런 생각이 든 날이었다.
그날 승호는 바다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내 옆 테이블에 앉아 숟가락으로 계란찜을 떠먹으며 내 쪽을 흘끔거렸다. 승호 맞은편에 앉은 애 역시 오오…… 하며 대낮부터 소주를 소주잔 대신 물컵에 따라 마시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서 대신 인생의 쓴맛을 느끼기라도 하듯 얼굴을 찡그렸다. 승호는 그날 나에게 합석을 하자는 말 대신 이른 저녁을 먹고 시험공부를 할 예정이었던 계획을 실사모 회원들을 모아 비정기적 회식을 하는 것으로 바꾸었다고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승호는 그때 나를 한눈에 알아봤다고 했다. 내가 장차 실사모의 임원이 될 것이라는 것을. 반쯤 열린 낡은 미닫이문 틈새로 한낮의 미지근한 바람과 부엌에서 스멀거리는 음식물 냄새가 섞여 식당은 꼭 방랑객들로 모인 휴게소 야외 테이블 같았는데, 그 풍경을 옆 테이블의 실사모 회원들이 제대로 재현해주고 있었다. 승호를 비롯해 몇 명의 사람들이 모여 금세 소주와 맥주를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놓았으니까. 그날 실사모 회원들은 잔을 들 때마다 자신의 실패담에 관해 이야기하곤 했다. 그중에는 오늘 아침 면도를 하다 턱 끝에 상처가 났다는 사소한 실패부터 대학생 자격으로 할 수 있는 마지막 인턴십까지 낙방했다는 안타까운 실패도 있었다. 그리고 어떤 애들은…… 자신의 실패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단지 오늘도 실패하는 중이라고 했고 나는 그 말에 퍽 공감하고 있었다. 지금 실패하는 중입니다. 무슨 드라마 제목 같네.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갑자기 승호가 내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는?
처음엔 갑작스러운 승호의 질문이 당황스러웠으나 곧 승호가 왜 그런 질문을 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앉은 테이블과 승호 무리의 테이블이 손바닥 한 뼘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고, 그게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테이블을 내 쪽으로 조금씩 밀고 있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누가 보면 나도 그 모임의 회원같이 보일 것 같았다. 어느새 옆 테이블에서는 치킨과 각종 화채가 이리저리 서빙되고 있었고 미닫이문은 활짝 열려 있었으며 시간은 초저녁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막 한 잔을 시작하려는 사람 중에 우리는 한껏 흥이 오른, 분위기가 기울어지기 직전의 끝 무렵 같았다. 나는……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많은 이야기 중에 다른 사람들이 듣기에 가장 타격이 작지만 솔직한 쪽을 택했다. 오늘 수업이 정말 최악이었어. 승호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의 이름을 이야기하며 이 교수 수업을 신청했느냐고 물었고, 나는 순간 반쯤 풀린 눈이 번쩍 떠지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러자 승호는 내 쪽으로 맥주를 부어주며 말했다. 실패했네. 제대로 실패했어. 그의 말에 모두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고, 나는 정말로 내가 실패한 사람이 된 것 같아 제대로 우울한 마음이 들 수 있었는데, 그 와중에 승호는 이제 우리 술이 섞였다, 고 말하며 제 쪽에 있던 병을 내 테이블 쪽으로 옮겼다. 고작 한 잔을 마신 것뿐인데 계산을 같이해야 한다는 말이야? 내 말에 승호가 내 손바닥을 펴고는 그 위에 손톱으로 B-103호라고 적었다. 우리 회원이 되어도 좋다는 말이야. 참고로 이상한 신념을 심어주는 그런 데는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관심 있으며 찾아와. 내가 회장은 아니지만. 그날 승호와 실사 모 회원들은 정말 이상한 사람들같이 보였으나 이상하게도 승호의 인상이 내게 짙게 남았고, 그날 이후로 종종 그 시간을 생각했다.
당했네, 당했어. 완전히 빠져들었어.
그 일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친구들이 한 말은 정말 틀린 것이 없었다. 나는 정말로 승호에게, 아니 실패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잔뜩 취해 있었으니까.
*
나는 유독 집 밖의 공간에 놓일 때마다 쉽게 상하곤 했다. 그런 의미로 나는 가끔 집이 냉장고 같다고 느꼈고, 아무도 없을 때면 물방울조차 숨죽이며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에 일부러 우우웅- 하며 냉장고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 같은 걸 입으로 따라 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나는, 나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 이를테면 가족이 아닌 사람들로부터 쉽게 상처를 받았고, 그게 신체적 증상까지 이어져 걸핏하면 화장실에서 헛구역질하는 게 일상이었다.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게 나는 조금 어려웠고, 내 생각이 실수가 될까 봐. 또 그 실수가 내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파장을 몰고 올까 나는 자주 긴장했다. 첫 번째 학교를 그만둔 것도 그런 종류의 이유는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는 영향이 있었을 테지. 부모님은 그런 나를 두고 천성이 예민한 아이라고 말하곤 했다. 절대적으로 비대면 시스템이 체질에 맞는 아이. 타인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실사 모’의 본거지를 찾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다. 다른 동아리들은 교문부터 학생회관까지 우드락이나 하드보드지에 굉장하게 좋은 말들을 늘어놓거나 무턱대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도 하던데 실사 모는 그런 게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조용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실사 모는 아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알려지는 곳이구나. 그러니까 어쩌면 승호를 다시 만나는 건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승호를 만날 수 있었다. 승호는 청바지에 붉은색 과잠을 입고 있었다. 나이키 로고가 그려져 있는 검은 볼캡을 쓰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전날 과음을 했거나 공부를 하느라 많이 피곤한 모양이었다.
승호는 나를 보자마자 조금 놀란듯한 표정으로 오…… 하고 입을 동그랗게 말다가 들어갈래? 하고 바로 앞의 문을 향해 손짓했다.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내가 아직 B-103호. 그러니까 실사모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승호는 이제 대학교 3학년을 시작하고 있었고 작년 가을에 제대했다고 했다. 그런 걸 묻지도 않았는데 승호는 나와 단둘이 동아리실에 남아 있는 게 어색한지 자꾸만 자기 이야기를 했다. 그 와중에 나에게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아서 좋았다. 솔직히 질문을 받는다면 또 내가 상한 사람이 되어버릴까 봐 조금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난생처음 들어와 본 동아리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뭐가 없는 편이었고, 또 다른 동아리실에 비해 그렇게 특별하게 보이는 게 없었다. 20인 정도가 앉을 수 있는 강의실 규모에 낡은 책장 두 개와 테이블, 그리고 각종 잡동사니가 모여 있는 라면박스가 한쪽에 몇 개 있었는데 정리되지 않았지만 뭐가 많이 없어 바닥이 반짝이는 (그 와중에 오는 사람마다 바닥 청소는 열심히 하는 모양이었다) 모습이 마치 난잡한 미니멀을 추구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승호는 책장 옆에 있는 이동식 화이트보드를 들어 어떤 날짜에 시간과 장소를 적어놓고는 자기 이름을 써넣었다. 내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보드마카의 뚜껑을 딸깍 닫고는 말했다. 우리 모임 하는 날. 관심 있으면 너도 이날 조인할래?
그러니까 승호의 말에 따르면, 실사모는 자신의 실패를 술안주 삼는 동아리가 아니라 사실은 실패한 사람의 실패를 함께 실패해 보는 모임이었다. 모두가 실패하면 그건 실패가 아니라나 뭐라나. 그건 이 동아리를 만든 1기 회장 창호 선배의 아이디어였다고 했다. 승호는 책장 속에서 다이소에서 산 것 같은 액자 하나를 내밀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액자 속에는 1기 멤버들이 어깨동무를 한 채 학교 앞 호수에서 브이자를 해 보이며 웃고 있었다. 실패한 사람들의 모임에서 승리의 브이라니. 그 모습이 몹시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찰나의 순간들이 싱그러워서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러자 승호가 이번엔 책장에서 파일 하나를 꺼내 내 앞으로 내밀었다. 하얀 에이포용지엔 내 이름과 전화번호, 그리고 무엇을 실패한 것인지를 적는 항목이 있었다.
어쨌든 동아리 회원이 되려면 가입 신청서는 필요해. 굳이 가입하진 않아도 되는데. 모임 소식을 들으려면 연락처 정도는 남겨줄 수 있지?
나는 승호의 말에 침을 꿀꺽 삼켰다. 혹시나 나중에 거절하기에도 어려운 귀찮은 연락을 받게 될까 봐 잠깐 망설였지만 결국 나는 내 이름과 연락처를 썼다. 내가 승호를 승호라 부르듯 승호도 내 이름을 불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을 실패했느냐는 질문에는…… 글을 잘못 읽어서 학교를 잘못 들어왔다, 라고 썼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신입생 치고 어느 정도 위트 있는 답변이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속에 거짓은 없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학교 홈페이지의 학과 소개와 전공과목, 그리고 교수란에 적혀 있는 사람들의 프로필까지 꼼꼼하게 훑었지만 나는 정말 잘 짜여진 각본 같은 홍보 글만 열심히 읽고 지원한 케이스에 속했다. 첫 번째는 건축학과였고 지금은 심리학과다. 사람들 사이에 소속되어 있는 것을 못 견뎌하면서 두 번 다 사람들 속에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첫 번째 학교를 그만둘 때는 생각지도 못하게 시작하게 된 드로잉에도 젬병이었을뿐더러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사람들의 생을 책임질 벽을 단단히 세울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사실 잘 모르겠다. 첫날 자기주장이 강한 전공 교수의 야심 차지만 결론을 알 수 없는 강의를 들으면서 나는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학교에서는 뭘 배우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대학교는 뭘 배운다기보다는 어딘가에 잠시 속해 있기 위한 정류장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앞뒤가 맞지 않는 나의 주절거림 속에서도 그건 승호도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체대를 다닐 것이라고 생각했던 승호는 사실 화학과를 다니고 있었고, 그렇다고 해서 수능 점수 중 화학 과목의 점수가 제일 높았던 것도, 그걸 좋아해서 화학과를 다니는 것도 아니었다. 학교를 졸업한다고 해서 배운 걸 그대로 써먹는 직업을 구하는 게 쉽지도 않을뿐더러, 꼭 그렇게 해야 할 필요도 없으니까……. 사실 승호는 학교에 대해선 여전히 고등학교에 다닐 때의 마음 같은 걸 가지고 있다고 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또 무언가 목적을 정해두고 달려야 할 것 같은 느낌. 그러니까 지금은 주어진 것만 묵묵히 하고 있다고 했다. 정작 승호가 정말 열심히 하는 건 실사모의 운영에 대한 것이었다. 규칙도 체계도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은 동아리였지만 승호는 나름 연례행사라던가 정기적인 모임 같은 걸 꾸준히 마련하곤 했다. 어떤 애들은 이 동아리는 사실 승호의 입회 전후로 나뉜다고 말하곤 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가지런히 제 이름만 올려놓고 유령이 되어버렸던 과거와 달리 승호가 온 이후로 정기적으로 얼굴을 비추는 멤버들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도 그중에 한 명이었다. 나는 그냥 승호가 해서 같이 했고, 승호가 계속 있다 보니 나도 계속 있게 되었다.
정기적인 모임. 그러니까 본격적인 실사모 회원으로서 참여했던 모임을 기억한다. 그때 우리는 학교 교문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그러니까 호수와는 가깝고 강의실과는 가장 먼 야외무대에 동그랗게 모여 앉아서는 굉장히 심각한 표정으로 오징어땅콩 과자를 만지작거렸다. 오늘의 실패를 함께할 멤버는 유진이었다. 유진은 몽골어학과를 전공했으며, 4학년이라고 했다. 학번으로만 보면 학교에서 화석 같은 존재였지만 유진이 빠른 년생으로 일찍 학교에 들어갔으므로 결과적으로 우리는 동갑이었다. 사실 이런 복잡한 이야기들은 모두 이전에 유진이 혼자서 멤버들에게 한 말들이었고, 나는 한 번도 유진을 유진 선배라거나 유진이라고 불러본 적이 없었다. 유진 역시 나를 기억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이걸 공중에 던져서 한 번에 먹을 수 없어야 한다는 말이지?
승호가 검지로 턱을 문지르며 제법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유진에게 물었다.
무조건 50센티미터 이상은 던져야 해. 그거 생각보다 어렵다.
유진의 말에 승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한 오후에 모인 우리는 가로등이 켜질 무렵까지 오징어땅콩을 허공으로 던졌다. 정말 유진의 말대로 오징어 땅콩을 허공에 던져 받아먹는 건 꽤 위험한 일인 데다 어려운 일이었다. 승호와 나, 유진을 포함해 다섯 명의 멤버들이 도전했지만 우리는 누구도 그것을 성공하지 못했고 그래서 모두들 유진의 실패에 공감할 수 있었다. 거듭되는 실패 속에서도 나는 야외무대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으로 우리를 관찰하고 있는 사람들이 은근히 신경 쓰였다. 그래서 유진이 진짜 자기가 나누고 싶었던 말. 사실 내년 졸업에 실패할 것 같다는 말을 나는 집중해서 듣지 못했다.
대학 등록금 내는 게 무슨 오징어땅콩 먹는 일인 것 같아. 그거 되게 어렵다.
그 말에 모두 같은 맛의 과자라도 먹은 사람처럼 같은 리액션을 했다. 나도 매 학기 등록금 걱정 없이, 생활비 걱정 없이 살아 봐. 당장 월세가 어떻고 관리비가 어떻고…… 근데 그런 게 뭔지도 모르는 애들한테 동정받고 싶진 않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설프게 공감하는 사람들. 차라리 이렇게 오징어땅콩이나 던져 먹으라 그래. 유진의 말에 나는 뜨끔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으나 유진의 눈에 나는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유진은 잔잔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물결이 이는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벤치 쪽에 앉아 있던 여자가 귀에 꽂고 있던 에어팟을 빼내며 천천히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우리를 지나치는 것도 아닌 분명히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혹시 여기가 ‘실사모’가 맞나요?
네 맞죠. 실패하는 사람들…….
저도 여기 들어가고 싶은데요.
아…….
여자는 자리에 앉은 사람들 중에서 정확히 나를 향해 말했고 나는 내가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서 우물거리며 자꾸만 말끝을 흐렸다. 그러다가도 문득 이 모임의 본질이 생각나 여자에게 물었다. 아…… 그래서 여기 들어오려는 이유가 뭔지……. 내 말에 여자는 멤버들을 비잉 둘러보더니 나를 잠시 따로 불러냈다. 승호가 갔다 오라는 듯 내 앞에 놓인 오징어땅콩을 치워주었고 운동화를 고쳐 신은 나는 벤치 쪽으로 걸었다. 나는 활짝 핀 진달래와 철쭉, 그리고 목련과 벚꽃이 이리저리 뒤섞여 있는 틈에 멀뚱히 서 있었고, 그때서야 사실 그런 이유 같은 건 물어보지 않았어도 되는 거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만약 승호이었다면, 이유도 묻지 않고 오징어땅콩을 내밀었을 테지. 어차피 내 앞의, 그러니까 자신을 현수라고 말하는 이 사람은 이미 실사모의 신규 회원이 되었을 것이었다.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현수가 제 신발 밑에 깔린 목련 잎을 옆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라서요.
현수가 무어라고 나에게 말하는 순간 내 옆으로 지나간 배달 오토바이가 평소보다 더 큰 소리로 부르릉거리며 옆을 지나갔다. 그 바람에 길가에 있던 새들이 푸드덕 소리를 내며 나무 위로 날아올랐다. 나는 도로를 향해 뻗었던 시선을 다시 현수에게 가져갔으나 현수는 이미 내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다른 사람들한테도 말해야 하나요.
아니요, 그건 아닌데…….
그럼 이제 저도 멤버가 된 건가요.
아…… 그건 아니고. 형식적으로 뭘 써야 하는데…….
나는 현수에게 B-103호로 찾아오라고 말했고, 현수는 알겠다는 말과 함께 워치를 보더니 다음 수업에 가야 할 것 같다고 말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벤치를 떠났다. 현수는 나보다 두 살이나 어렸지만 나와 같은 학년의 수업을 듣고 있었고, 심지어 우리는 같은 교양 수업도 듣고 있었다. 나는 현수의 휴대전화에 남았을 나의 지문을 생각하며 한참이나 현수 떠난 자리를 바라보았으나 뭔가 큰 실수를 한 것 같았고, 그래서 승호가 나에게 진짜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던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
현수를 다시 만나게 된 건 그로부터 2주쯤 지났을 때였다. 막 중간고사로 동아리실을 방문하던 멤버들의 수가 급격히 떨어지던 시점이었고, 그런 이유로 나는 동아리실에서 책을 펴고 수업 중에 밑줄 친 내용과 교수가 특히나 강조했던 페이지를 들여다보며 같은 문장들을 반복해서 외웠다. 잘 인지되지 않는 단어들은 내 입속에서 잘근잘근 집히다가 꿀떡 삼켜졌고, 그러고 나면 기억이 나지 않아 다시 이전에 보았던 페이지를 찾아보는 식이었다. 그러다 문득 눈에 거슬리는 게 보이면 동아리실을 청소했다. 오래되어 보이는 빈 지퍼백을 버리고, 포장이 벗겨져 있는 빨대나 접착력이 떨어진 대일밴드를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그러다 보면 왠지 승호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동아리실 한쪽 구석에 놓여 있던 박스들 중 한 개 분량을 정리하고 나면 책장을 정리할 생각이었다. 책장에는 오래전에 반납하지 못한 시집이나 누군가 버리고 간 것 같은 전공 책, 그리고 틈새에 다 먹은 과자 봉지나 휴지 조가리 같은 게 있었는데, 책장의 한 구역을 모두 비워내자 구석에서 무언가가 힘없이 툭 하고 떨어졌다. 담배거나 대일밴드 같은 건가 싶어 자세히 보니 콘돔이었다. 괜스레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다시 제자리에 물건들을 두려고 하던 때 내 눈앞에는 실사모 멤버들이 제출한 입회신청서가 눈에 들어왔다. 파란색 파일을 열자 일정하지 않은 위치로 구멍이 뚫린 종이에는 회원들의 각종 실패들이 적혀 있었다. 사람들이 이곳에 오는 이유는 다양했다. 지난 학기에 F를 두 번이나 받아서, 학식을 혼자 먹지 못해서, 고백에 실패해서, 다이어트 다짐을 일주일마다 하고 있어서.
저마다의 실패는 일종의 얕은 고민인 것처럼 다양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그 이유만으로 이곳을 찾은 것 같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러다 현수의 것을 발견했다. 신현수. 현수는 오징어땅콩을 먹지 못한 것이 이유였다. 아마 승호가 그것을 생각해냈을 것이다. ㄱ이 숫자 7처럼 휘어져 있고, 마지막 단어의 모음이 지나치게 길게 늘어져 있는 것을 보니 승호의 글씨가 분명했다. 그걸 발견하고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동아리실 문 안 쪽으로 인기척이 들렸다. 승호였다. 승호는 어떤 이유로 이곳에 들어오게 된 것일까. 사실 겉모습만 보기에 승호는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승호는 실패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승호는 유진처럼 가난하지 않았고, 나처럼 진학문제를 두고 후회를 하거나 고민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해서 학식을 혼자 먹지 못하거나 F를 두 번 받았을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승호는 모래알갱이와 오리털이 지저분하게 붙어 있던 배낭을 동아리실 한구석에 아무렇게나 던져두고는 나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청소하고 있었어?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고마워. 내가 입회신청서 파일을 후다닥 아래로 내리며 다른 사람의 비밀이라도 들킨 사람처럼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자 승호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시험공부하다가 집중이 안 돼서…… 라고 말하려다가 이어 열리는 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승호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며 따라 들어오는 이는, 다름 아닌 현수였다. 현수는 나를 보자마자 구면이지? 하며 전과는 다르게 살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테이블 위에 과자와 탄산음료를 펼쳐 보이며 나에게 혹시 종이컵이 어디 있냐고 물었고, 내가 늘어져 있는 상자를 뒤적거리며 종이컵을 찾자 승호가 탄산음료를 열고는 내 쪽을 돌아보았다. 그냥 입 안 대고 이렇게 마시면 되지 않을까? 너는 어때? 내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승호가 어서 테이블로 오라는 듯 손짓했다.
그래서 교수님은 뭐라고 하셨는데?
승호가 과자 봉지의 끄트머리에 걸쳐 있는 과자를 집어 먹으며 말했다.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른 종류의 책을 펴고 있었지만 내내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현수는 최근에 미래 지도자를 양성한다는 내용의 세미나에서 그룹으로 진행하는 상담에서 나무를 그려서 내면 심리에 관해 이야기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고 했다. 세미나라고 했지만 사실은 2학점짜리 수업이었고, 높은 출석률에 매주 나오는 과제들, 이를테면 장래희망에 대한 단상이나 교수가 발표한 책을 읽고 서평을 적어 블로그에 업로드하면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시시한 수업이라고 했다. 평소 같았으면 밥 아저씨 같은 모양의 잎사귀 존과 나무를 그렸겠지만 어쩐지 그날 현수는 대나무를 그렸다고 했다. 에이포용지 가득 고속도로를 내듯 쭉 뻗은 줄기를 그리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옆자리의 학우들이 쿡쿡거리며 웃었고, 교수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이 수업에 장난을 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런 식으로 할 거면 내 수업 들어오지 말라고. 아니, 대나무는 나무가 아닌가? 창의적으로 봐줄 수도 있는 거잖아. 자기가 아는 세상이 전부인 줄만 아는 사람들, 진짜 별로야.
이번엔 수업에 실패한 것 같다고 말해야 하나? 현수의 말에 승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네가 실패한 게 아니라 그 교수가 실패한 것 같은데? 민주야, 너 미리 메모해 둬라, 걸러야 하는 수업이 여기 또 생겼네. 그 이야기를 하던 중에 승호는 그래도 민주가 듣는 최악의 수업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현수를 위로하며 농담조로 말했다. 그 순간, 나는 나보다 현수가 더 승호와 가까워 보여 은근한 불편함을 느꼈으나 입을 꾹 다물었고, 현수가 내 눈치를 살피듯 승호에게 무언의 눈짓을 하는 것 같아 더 기분이 상했다. 그건 내 기분이 상하는 것과 마음이 상하는 건 다른 것이라는 걸 그때 깨달았다. 그때 나에게 새로운 실패가 생겨나는 듯했다. 나의 실패는 나의 사랑을 이룰 수 없다는 것. 어쩌면 승호는 현수를 좋아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이듬해 승호는 낯이 익은 멤버들의 추천으로 인해 회장이 되었고, 승호가 자신도 회장이 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듯 한 치 거절 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나는 실사모에서 총무가 되었다. 그건 승호가 나를 콕 집어 지목했는데, 모두들 동아리 운영비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었으므로 나는 단 한 명의 반대도 없이 총무가 되었고, 나는 그런 이유로 승호와 더 자주 만날 수 있었으나 승호는 얼굴을 마주할 때보다 더 피곤해 보였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승호는 이제 졸업반이라는 것을.
승호가 회장이 되던 날, 우리는 회장 취임 기념, 그리고 개강 기념을 이유로 회식을 했다. 그 자리엔 지난 학기에 휴학을 했던 유진도 나와 있었다. 유진은 전보다 더 살이 올라 있었으나 음식을 잘 먹어서라기보다는 불규칙적인 식습관과 운동부족의 결과물인 것처럼 보였다. 유진은 현수를 보자마자 오징어땅콩? 하며 하이파이브를 하듯 손바닥을 들어 보였고, 두 사람은 언제 처음 봤냐는 듯 금방 마주 보고 앉아 무어라 이야기를 하며 이내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치며 웃고 있었다. 승호는 실사모에 새로 들어온 신입과 서로 소개를 하거나 비슷한 실패를 안고 있는 회원들끼리 엮으며 나름의 균형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나는 앞으로 우리가 몇 개의 술병을 더 비울 수 있을지, 그리고 몇 접시의 안주를 더 주문할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희한하게도 회비는 매번 부족한 듯싶으면서도 부족함 없이 채워졌고, 나는 후에 그것이 초기 실사모 회원들, 그러니까 졸업한 선배들이 때마다 채워놓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오징어 땅콩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것은 서로의 실패에 대해 이야기하던 시간이었다. 현수는 제 차례가 오자 어김없이 오징어 땅콩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 말에 유진이 낄낄거리며 관심을 보였다. 오징어 땅콩이 어렵지. 아직까지 그거 성공한 사람 못 봤어. 현수는 이제 다시는 오징어 땅콩을 먹지 않겠다고 했다. 포기했지, 나는. 이거 잘못 먹으면 다쳐. 목구멍에 걸리기라도 해 봐. 이런 건 잘 내려가지도 않는다고.
그게 어려워?
모두의 시선이 쏠린 곳은 이미 한참 취해 있던 실사모 회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얼굴이 벌게진 채로 바로 옆에 있는 편의점에서 오징어 땅콩 한 봉지를 사 와서는 유진과 현수의 앞에, 내려놓았다. 너 취했다, 우리 가자. 누군가가 그를 향해 말했고, 그는 이미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든 사람처럼 오징어 땅콩을 옆으로 뜯고는 허공에 던져 제 입속에 넣어 보였다. 이게 뭐가 어려워. 이게 뭐가 어렵냐고. 이게 뭐가…….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쟤 너무 취한 거 같다. 승호가 말했고, 나는 눈꺼풀에 힘을 주어 여러 번 깜빡였다. 현수는 웃지 않았고, 유진은 멍한 얼굴로 오징어 땅콩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직하게 말했다. 넌 좋겠다, 그게 안 어려워서.
그 일이 있고 이주쯤 지났을 때, 유진이 약을 먹고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얘기를, 현수로부터 들었다. 유진은 속초에서 만난 사람과 모텔에서 함께 약을 먹었고, 두 사람 모두 시간이 지났음에도 체크아웃이 되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주인에 의해 발견되어 구조되었으며 병원에서 눈을 떴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유진은 이미 혼을 잃은 사람처럼 말을 잃었다고 했다. 실어증은 아니었다. 유진은 이제 할 말이 없는 것 같았다.
유진은 죽으려고 속초에 간 걸까, 아니면 속초에서 죽을 사람을 만난 걸까.
그 어느 쪽이었어도 유진은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라고 현수가 말했을 때 나는 승호를 떠올렸다. 승호도 알아? 내 물음에 현수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한테는 알려야지. 또 두 사람은 친하니까…… 근데 승호가 좀 충격을 받은 것 같았어. 충격적이고, 친한 사람들 중에 그런 일을 겪었다는 게 슬픈 일이기는 한데, 뭐랄까. 그게 왠지 승호의 실패 같았다고 할까. 현수는 나에게 승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 있느냐고 물었고, 나는 모른다고 답했다. 정말로 몰랐다. 나도, 승호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우리는 가볍게 건져낸 실패들 속에 진짜 깊은 마음들을 모두 숨기고 있었으니까. 승호는 어떤 이유로 이 모임에 들어오게 된 걸까. 누가 승호를 이 모임으로 데리고 왔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나는 유진을 만나러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승호는 유진을 만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아는 승호는…… 자신의 진짜 상처를 마주하지 못하는 사람이니까.
*
유진이는 손등에 링걸 꽂은 채로 모로 돌아누워 있었다. 처음 병원을 방문했을 땐 낯선 분위기에 놀랐고, 그러나 유진이 일정하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도감이 들었다. 유진은 울지도 않았고, 웃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해서 슬프다거나 실망을 했다거나 하는 감정조차 내보이지 않았다. 유진은 그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싶은 얼굴로 조금 현실을 감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저기…… 나는 총무……
유진이 내 목소리를 듣고 돌아누웠다. 그녀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언제 말을 잃었냐는 듯 입을 열었다. 알고 있어. 무려 실사모 총무를 모를 리 없지. 승호가 너 좋아하잖아. 유진이 허리 아래로 내리고 있던 이불을 가슴 끝까지 끌어올렸고, 그러자 맨발이 드러났다. 지그재그 모양으로 깎인 발톱이 매끄럽지 못해 보였다. 나는 유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예의상 사 온 알로에 음료 두 병을 콘솔 위에 올려두고는 자꾸만 입술을 깨물며 손가락 끝을 만지작거렸다. 유진이 그 모습을 보고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좀 지루하다.
무슨 말이냐는 얼굴로 유진을 바라보자 유진이 알로에 음료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가 오늘로 세 번째야. 알로에 음료. 다들 알로에가 답이라고 생각하나 봐. 토마토 주스도 있고, 오렌지 주스도 있는데 알로에만 사 왔더라고.
아…….
사는 게 참 지겹고, 지루해. 알로에 한 병 마실래?
미안. 다른 거로 바꿔올까? 내가 물었고, 유진이 농담이라며 손을 저었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나는 괜찮아. 사람들이 물으면 그렇게 말해 줘. 특히 승호한테는 그렇게 말해줬으면 좋겠어. 많이 놀랐을 거고, 나한테 크게 실망했을 거야. 같이 오징어땅콩도 지겹게 던져 먹었는데.
나는 대답 대신 알로에 음료의 옆으로 떨어져 있는 잎사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창 꽃이 폈다 져버린 화분 위로 수명을 다한 잎이 무성의하게 떨어져 있었다. 나는 유진을 보다 잎사귀 몇 개를 주워 유진의 발밑에 있는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병원에 화분을 사 오는 사람이 있네. 원래 꽃 같은 거 사 오면 안 되는 거로 알고 있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데 유진이 화분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제 현수가 들렸었어. 참 현수답지. 유진이 쓰게 웃었고, 나는 그렇구나, 하고는 병실을 빠져나왔다. 나는 알지 못하는, 아니 어쩌면 설명할 수 없지만 느낄 수는 있는 무형의 형태인 그것을 덜기 위해 유진을 찾아갔지만 오히려 내 마음속 무엇인가를 덜어내고 온 것 같아 마음이 복잡했다. 그날 현수가 나에게 말한 실패는 무엇이었을까. 현수와 유진과 승호는 서로의 실패를 알면서도 덮고, 덮으면서도 서로의 상처를 생각하며 괴로워한다. 세상에는 실패할 것도, 괴로울 것도 참 많구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조금 울적한 기분이 되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접수처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실에서 낮에 먹은 음식들을 모두 게워냈다.
승호는 일주일째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동아리실은 물론이고 수업에도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승호에게 몇 번 메시지를 보내다 그냥 전화를 할까 말까 고민했다. 그러나 막상 승호에게 전화를 건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조금 기다려보기로 했다.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서 제각각의 사이즈로 불규칙하게 배열된 책과 책장 사이 틈에 머리를 기대고는 잠깐 잠이 들었다.
그사이에 꿈을 꿨던 것 같다. 모든 장면들이 다 떠오르지 않지만 꿈속에서 나는 폭이 좁고 긴 강의 한가운데에 각종 폐기물과 플라스틱 쓰레기를 뗏목 삼아 어떤 사람들과 함께 맞은편의 어느 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동경도, 혐오도 아니었다. 그저 아, 세상이 참 넓고 다양하구나. 닿을 수 없는 어떤 세계는 저렇게 생겼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게 서서 오래오래 높낮이가 다른 빌딩과 오래되어 금이 가 있던 콘크리트 벽면을 바라보면서. 꿈에서 깼을 땐 이미 다음 강의의 시간이 10분 정도 지난 후였다. 헐레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기는데 승호로부터 메시지가 와 있었다.
미안해. 걱정했구나. 며칠 몸살을 앓았던 거 같아.
혹시 동아리실에서 누가 물으면 나는 괜찮다고 전해줬으면 해. 승호로부터 온 마지막 메시지였다. 나는 승호에게 온 연락을 곱씹어보다가, 이 장면이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게 느껴졌다. 유진도 그런 말을 했지.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지만 어쩌면 같은 종류의 사람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승호에게 언제 학교에 올 거냐고 물어보려다가 그만두었다. 그 간단한 질문을, 괜찮다는 말을 내 앞에서 보여달라는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언젠가 승호는 실패하는 사람들의 모임 때문에 이 학교에 들어온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승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궁금한 마음과 장난스러운 생각으로 그래 그 이유나 들어보자 싶어 실패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어디서 알게 되었냐고 물었다.
장례식장에서. 어떤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어. 그런 모임이 있다고.
생각지 못했던 대답이었다. 그때 나는 그동안 유순하고 원만해 보인다,라는 프레임을 멋대로 승호에게 씌워놓고 관찰할 것 같아 얼마 동안 부끄러웠다. 나는 승호의 단면만을 알고 있지만 어쩐지 승호가 평소 성격과 다르게 유진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현수에게 연락이 왔다. 운동장에 앉아 있는 애, 승호 맞지? 도서관 창문 밖으로 운동장을 보자 계단식으로 움푹 팬 운동장 한쪽 구석에 콩알만 한 크기로 축소된 승호가 앉아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이 승호가 자주 입던 스타일이었고, 그 옆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가방이 승호가 매일 메고 다니는 것이었다. 나는 수업을 가야 할까, 승호를 만나러 가야 할까 고민하다 오늘 수업에 출석하는 걸 실패하는 쪽을 선택하기로 했다.
*
승호는 한참 전에 인문대와 사회대 간에 축구 경기가 있었다고 했다. 가까이 갔을 땐 이미 해가 저물어 한쪽 얼굴에 그림자가 져 있었다. 나는 승호에게 무슨 말을 할까 하다가 지난달 정산한 회비 금액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난달에 유독 지출이 많았어. 여름이라서 그런가. 내 말에 승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가 보다. 하고 중얼거렸다.
승호야.
내 말에 승호가 응, 하고 힘없이 대답했다. 늘 씩씩했던 승호가 바람 빠진 공처럼 축 처져 있는 모습이 어색하게 보였다. 나도 그날 많이 놀랐어. 내 말에 승호가 천천히 내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는 나에게 무엇이라고 말할 것처럼 입을 우물쭈물하다가 다물었다. 사실 승호는 나에게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제서야 나는 침묵을 견디지 못해 습관적으로 먼저 말을 꺼내곤 했던 승호가 그동안 얼마나 마음이 힘들었을지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괜찮대. 그리고 더 괜찮아질 거래.
유진에 대해 말한 거였다. 방금 만나고 오는 길이야. 승호는 그 말을 듣자 무릎에 고개를 박고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그런 승호의 등을 토닥여 줄까 하다 그만두었다.
실패는 실패라고. 형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어.
승호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승호는 텅 빈 축구장의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형?
내내 생각했어. 형이 이 모임을 만든 이유는 뭘까, 하고.
승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여기 1기 멤버, 김창호. 6년 전에 죽었지. 내 실패는 형을 살리지 못했다는 거야. 승호의 말에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러자 승호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나는 실패를 해결하고 싶었던 게 아니야.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내 실패에 대한 위안을 얻고 싶었던 것도 아니야. 나는…… 형이 왜 이 모임을 만들었는지 그게 궁금했어. 실패라는 건, 때로 우리는 절망에 빠지게 하는 독이자 넘을 수 없는 높은 담 같은 건데, 그걸 굳이 계속 생각하게 하는 이유는 뭘까. 그런다고 해서 고통이 나눠지는 것도 아닌데. 형은 결국 죽었지.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지. 이런 모임을 만들어 놓고, 실패하는 사람들 모두들 자신의 실패를 말하지도 못하게. 더 이상의 실패를 견디지 않는 쪽을 선택했지. 그런데 이상한 건, 형이 무엇을 실패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알겠다는 거야. 시간이 흐를수록, 계절이 넘어갈수록.
무너지는 마음들이 보였다. 그건 오래전 나도 경험해 본 것이었다. 만일 지금 현수가 승호의 옆에 있었다면 무어라고 말을 했을까. 아마도 어깨를 붙잡고 꼭 안아주거나, 절대 웃지 않을 수 없는 농담을 던지며 은근슬쩍 형의 이야기를 다른 곳으로 돌렸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지 승호의 옆에서 담담하게 그 이야기를 들으며 슬픔에 잠길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확실할 순 없지만 적어도 ‘실패하는 사람들의 모임’은 실패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결국 모두 성공한 사람들이라는 것. 실패와 성공의 아이러니 속에서 이 모임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건 절대 변함이 없을 테니까…….
내 말에 승호가 나를 바라보더니 푸하하, 하고 웃었다. 얼굴빛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였는데, 그건 어쩌면 붉게 물든 노을빛에 반사되어 그런 걸지도 몰랐다. 승호는 나에게 역시 너답다,라고 말하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잡아도 돼?
승호의 말에 나는 내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승호의 손을 꼭 잡았다. 내 손은 얼음장같이 차가웠지만 승호의 손은 따뜻했다. 그리고, 조금 땀이 많은 편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일 유진이 보러 가자. 같이 가자. 잡은 손에 힘을 조금 주었고, 나는 우리 두 사람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 승호가 덧붙였다. 말해주자. 우린 사실 성공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고. 그게 유진이의 어떤 순간들을 해소시켜 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리고…… 우리 사귀기로, 했다고 말할까? 승호가 음절을 말할 때마다 조금 삐걱거려서 그 모습이 재밌으면서도 아, 이게 지금 고백이라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너 현수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현수 좋아하지. 근데 널 좋아하는 거랑 현수를 좋아하는 마음은 조금 다른데?
그렇구나.
그래, 그렇게 하자. 내 말에 승호가 내 어깨 위로 천천히 머리를 기대어 왔다. 나는 유진도, 승호도, 현수도, 그리고 실사모 회원들 모두를 좋아했다. 처음엔 내가 심리학과를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제 고민 상담을 해오지 않아서 좋았고, 내 실패를 꼬치꼬치 묻지 않아 주어서 좋았다. 그중에 승호는 이유도 없이 좋았고,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는 세상엔 이유 없이 좋아지는 사람도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좋아지는 마음도, 좋아했던 마음도 언젠가는 실패가 될지도 모르겠지. 나는 앞으로도 내 실패를 원망하고 슬퍼하겠지만 실패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찾아왔던 작은 순간들을 사랑하며 지낼 것이다. 잔잔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어떤 마음들을 달래듯 달콤하게 스쳐 가기에, 그날 우리는 그 자리에 한참을 닿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