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수는 호숫가에 있었다. 제 턱을 무릎에 괸 채로, 반짝이는 물결을 바라보고 있었다. 팬들에게만 보여주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도 아니었고, 숙소에서 화장실 사용 순서를 두고 다툼을 벌일 때의 진지한 표정도 아닌. 가끔 보이는 그 비밀스러운 얼굴이다. 수가 있는 곳엔 시간의 개념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와 다르게 수에게 시간이란, 살아 있는 인간들만이 정한 물리적인 약속일뿐이니까.
수의 롤모델은 애덤 리바인이었고, 그의 플레이리스트엔 <Maps>가 6번이나 중복으로 선곡되어 있었다. 수는 만일 세상에 단 한 가지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섬’을 갖고 싶다고 했다. 오로지 ‘수’ 혼자만 머물 수 있는 섬. 그래서 3년 전, 수가 그 섬을 구입했을 때 우리는 입을 모아 역시 ‘수’ 답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한 번도 ‘수’의 섬에 초대받은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지금 처음으로 ‘수’의 섬을 향해 가고 있다. 아니, 우리 멤버들 전부 다.
수의 옆에는 10년 전 무지개다리를 건넌 반려견 코코가 제 발을 핥고 있었다. 수는 코코의 털에 제 손등을 부비적거리며 다른 한 손으로는 멍하니 호숫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그것이 무엇이든 지금 우리에겐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 ‘수’가 작업한 신곡이 당장 필요했으므로.
나는 수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걸음의 속도를 늦췄다. 그리고는 고민했다. 수를 만나면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그러나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멤버들 중 가장 성질이 급한 우영이 먼저 수를 향해 달려갔다. 아니, 정확히는 근처에 있던 돌멩이 중 가장 모나게 생긴 것을 주워 수가 있는 방향을 향해 냅다 던졌다. 그러자 잔잔하던 호수에 파동이 일기 시작했다. ‘수’가 고개를 들고 우리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수의 표정은 반가움과 당혹스러움이 동시에 묻어 있었다. 수가 손바닥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활짝 웃어 보였다.
3년 전 그날도, 수는 그런 웃음을 지었다.
*
10년째 우리와 함께하는 매니저 형이 나에게 전화했을 때는 이미 ‘수’가 센트럴파크에서 사라진 후였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팬들과 함께 별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자기가 직접 쓴 신곡 스포일러를 하던 애였다. 그건 이번 앨범에서 우리에게도 아직 가이드를 들려주지 않은 유일한 곡이었다. 혹시 뇌신경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가 싶어 병원부터 다녀왔던 형은 수가 건강상의 문제로 기브에서 로그아웃을 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수는 여전히 기브에 접속해 있었고 그렇다면 수가 갈 곳은 단 한 곳밖에 없었다. 아무런 소리도, 시선도 없는 곳. 섬이었다.
승조는 낮잠을 자는 듯 가르릉 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는 코코의 털을 쓰다듬고는 수의 눈치를 살폈다. 우영 역시 심통이 난 얼굴로 근처에 있던 꽃을 꺾어 이유 없이 꽃잎을 떼내기 시작했다. 시안은 에라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무에 기대어 낮잠을 자는 듯 눈을 감았다. 전날까지 드라마 촬영을 하고 돌아왔기에 충분히 피곤할 만했다.
- 수야, 무슨 일이야.
나는 수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말랑말랑한 피부의 감촉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손을 뻗고 있는 것은 허공일 것이다. 수가 그렇게 된 이후로 나는 한 번도 수의 몸을 터치해 본 적이 없었다. 이곳 기브뿐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병원에 있는 수는 마치 회생이 불가능한 식물처럼 잠들어 있었다. 의사는 생명유지장치가 없다면 수가 다시 깨어날 확률은 희박하지만 그래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 형, 나 교통사고로 이렇게 된 거 아니지.
수가 말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지난 10년간 수많은 인터뷰를 했지만 나는 그때마다 내 진짜 속내를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나는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만을 해왔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그런 나를 가식적이라거나 거짓말쟁이라고 욕할지 몰라도, 나는 차라리 사람들이 좋아하는 내 모습만을 보여주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수에게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 아무것도 모르던 데뷔 초였다면 아마 수의 목에 헤드락을 걸며 꿀밤을 놓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많은 순간들을 함께했다. 어떤 이에겐 솔직함이 독이라는 것을, 나는 수를 통해 배웠다.
그때 우영이 손바닥으로 수의 뒤통수를 때렸다. 그러자 둔탁한 소음이 들려왔고, 앞에 있던 수가 휘청거렸다. 수가 뒤를 돌아보자 우영은 입꼬리에 힘을 주며 수를 노려보았다.
- 너는 가끔 사랑하는 사람들을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그래서 나는 너를 용서할 수 없어.
나 화장실 좀. 우영은 말을 마치자마자 몇 초간 형체가 깜빡거리더니 화면에서 사라졌다. 화면 속엔 여전히 모래와 풀뿐이었다. 그제서야 우리가 처한 현실이 다시금 실감이 났다. 수는 우리와 함께였지만 함께일 수 없었다.
수는 3년 전에 우리의 곁을 떠났다. 정확히는 우리의 곁을 떠날 뻔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수가 자살 시도를 할 것이라고는 멤버들 중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바로 전날만 해도 단톡방에 아무렇지도 않게 신이 난 말투로 메신저를 보내오던 애였다. 그런 수가 처음 발견된 곳은 첫 정산으로 마련한 차 안이었고, 그 차가 있던 곳은 회사 건물 입구였다. 평소 외로움을 많이 타던 성격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겁이 나서였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멤버들도 모르게 회사와 어떤 비밀이 있었던 것일까. 수만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10년 넘게 같이 활동하면서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수에 대해 모르는 것 투성인 것만 같았다.
‘성준이 형, 팬들이 제발 그 모자 좀 벗으래ㅋㅋㅋ’
‘닥쳐. 넌 살가죽처럼 입고 있는 그 옷이나 버려. 10년 넘게 어떻게 그건 닳지를 않냐.’
수가 보낸 메신저에 내가 마지막으로 보냈던 답장이었다. 그날 수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고작 그거였나. 사건이 터진 날, 나는 수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어이가 없음에 정신 나간 사람처럼 피식 웃었다. 평소에도 서로의 패션을 지적하며 티격태격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수에게 도저히 살아 있을 수 없었던 고통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수는 우리의 곁을 떠나려고 했다. 다행히 너무 늦기 전에 발견이 된 수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의식이 없었고, 식물인간 상태로 지금까지 병원에 있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 그저 스케줄이 끝나고 집에 가던 길에 교통사고가 났다고만 알고 있다. 그날 다발로 몰려온 기자들과 수의 팬들이 병원을 가득 메웠고, 우리는 온몸에 주삿바늘과 각종 전자기기를 꽂은 수를 내려다보며 모두들 충격에 빠져 있었다. 처음엔 놀랐고, 그다음엔 수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으며, 더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엔 그 이유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나 우리들 중 누구도 수에게 그날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수를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땐, 수는 그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 사고였어. 우린 모두 네가 사고를 당한 걸로 알고 있어. 그러니까 빨리 기운 차리고 일어나.
나는 수의 질문에 대충 얼버무린 채 호수로 고개를 돌렸다. 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걸어갔다. 그러자 멤버들도 수를 따라 걸었다. 수는 섬의 끝자락이자 오두막이 설치되어 있는 곳을 향해 내려갔다. 수가 입고 있던 옷이 바람에 펄럭이기 시작했다. 수가 입고 있던 옷은 내가 입이 닳도록 버리라고 말했던 유명 농구팀의 유니폼이었다. 이 세계에서도 저런 걸 살 수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할 때쯤에 수는 오두막으로 올라가기 위해 사다리를 타고 있었다. 수는 뭐라 말하며 흥얼거렸으나, 수가 뱉는 목소리는 이전에 내가 알던 그 목소리가 아니었다. 수의 목소리는 이제 과거에 녹음된 것만이 진짜였고, 지금의 목소리는 전문 성우의 것이다. 그건 수가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수의 모습은 꽤 현실감 있는 수의 그래픽이었지만 수의 뇌와 연결된 아바타가 수의 생각과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뿐이었다. 우리 역시 기브를 이용할 땐 수와 같이 생성된 아바타를 이용해 움직였지만 헬멧에 장착된 마이크를 통해 목소리만큼은 수와 다르게 우리의 목소리를 그대로 뱉어낼 수 있었다.
- 그런데 패스워드는 어떻게 알았어? 처음이야, 이 섬에 다른 사람이 접속한 거.
오두막에 올라가 우리에게 손을 뻗던 수가 말했다. 시안이 제일 먼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고, 우영인 멀리서 코코를 품에 안은 채 언덕을 내려오고 있었다. 섬의 끝에선 파도가 거칠게 넘실거렸고, 나는 손가락을 들어 우영이를 가리켰다.
- 쟤가 맞췄어. 네 생일, 우리 데뷔일. 심지어 네 전 애인 생일까지 다 입력해 봤는데 아니더라고. 그런데 우영이가 갑자기 뒤에서 그러더라. 섬이니까 ‘island’로 해보자고. 설마 했는데 역시일 줄은 몰랐어. 네가 그런 점에서 우영이 같은 사고를 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진짜.
내 말에 승조가 키득거렸고, 수 역시 푸훗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언제고 폭풍이 몰아칠 것만 같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예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
수는 우리를 떠나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지 못했다. 수가 그렇게 되고 난 뒤 우리는 정확히 한 달 만에 다시 만날 수 있었으니까. 시안의 드라마 스케줄을 제외하고, 다음 앨범을 비롯한 우리의 일정은 모두 취소가 되었다. 그 덕분에 지난 몇 년간 목놓아 부르던 휴가를 얻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그날 매니저 형은 조금 긴장된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먼저 수를 만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을 내린 모양이었다. 우리는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수를 만났다. 형이 우리를 데려간 곳은 ‘기브’라는 이름의 메타버스 사업을 하는 회사였고, 기브 대표는 우리를 보자마자 회의실이 아닌 스튜디오로 안내했다.
스튜디오는 텅 비어 있었다. 센서가 빨갛게 깜빡거리는 로봇 체어가 우리가 있는 방향을 향해 다가왔고, 대표는 수십억 원이 걸려 있는 이 사업을 성공시키고야 말겠다는 욕망으로 가득 차 보였다. 직원 중 한 명이 우리에게 평소 게임을 할 때나 사용할법한 헬멧을 건넸고, 우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들였다.
처음엔 예능 촬영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종의 실험카메라 같은 것. 그러나 그날 스튜디오에는 보안을 위해 단 두 대의 감시카메라 외에는 어느 것도 없었고, 우리는 그날 그곳에서 수를 만났다. 수는 여전히 병원에서 온몸에 생명유지장치를 부착한 채 누워 있는데, 헬멧을 쓰자 바로 전날 스케줄을 마치고 헤어졌던 것처럼 수가 눈앞에 서 있었다. 현실 세계와 다르게 그 세계에서 ‘수’는 생기 가득한 얼굴로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 오, 이거 신기하다.
그게 수의 첫마디였다.
우리는 센트럴파크 내 카페의 야외테이블에 동그랗게 모여 앉았다. 하루종일 누워 있으면 답답하지 않냐는 승조의 물음에 수는 답답하고 그런 건 잘 모르겠다고 했다. 기브에 접속하기 전까진 하루종일 지루하고 심심하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이 세계에 접속이 된 후로는 온종일 자유롭게 도시를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했다. 수는 그곳에서 영화를 보러 가거나 쇼핑을 하기도 했고, 노래를 부르기 위해 노래방에 가기도 했다. 그러다 금방 싫증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센트럴파크에서 조금 더 벗어난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 이전과 달리 수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수의 육체는 항상 같은 자리에 있었고, 수가 가는 곳에 언제든 우리가 따라갈 수 있었으므로.
- 종종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만났어.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었고, 아닌 사람들이 있었지. 그것도 신기한 경험이었어. 현실이었다면 이건 꿈도 꾸지 못했을 일이었을 거야. 무엇보다 언제든 도망가고 싶을 땐 로그아웃을 하면 되니까. 마치 다른 차원의 세계를 여행하는 기분이야.
수는 신이 난 듯 우리에게 자신이 둘러본 이 세계에 대해 말해주었고, 오직 우영이만이 수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나는 팔짱을 낀 채로 그런 수를 내려다보았다. 수에게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어쩐지 모른 척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건 나뿐만 아니라, 회사 식구들과 멤버 모두의 생각이기도 했다.
수가 한동안 센트럴파크에 머무르게 되면서 팬들 사이에서 수의 행방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수를 그리워하던 일부 팬들이 하나둘씩 기브에 접속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수가 머무르던 그 공간은 콘서트 티켓처럼 예약제로 팔렸다. 수는 더 이상 공적인 공간인 센트럴파크에 있을 수 없었다. 그건 공간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존재 자체로 돈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수는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저를 만나러 온 팬들과 함께 친구처럼, 때로는 동생처럼 시간을 보내곤 했다. 수는 이전처럼 더 이상 노래를 부를 수 없었지만 마치 무대를 하던 예전 모습처럼 센트럴파크 중앙 스테이지에서 립싱크를 하며 무대를 하곤 했다. 그 공간 속에서 수가 점차 안정을 찾기 시작하면서 우리 역시 바빠졌다. ‘수’가 잃은 유일한 것은 목소리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습생 때부터 쌓아두었던 작곡 실력까지 상실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수’의 프로듀싱에 따라 앨범 활동을 할 수 있었고, 현실 세계보다 가상의 공간에서 활동을 하는 시간들이 더 길어졌다. 사람들은 현실에서도 가상의 세계에 있는 우리를 볼 수 있었고, 가상공간에서도 언제든 생동감 있는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수’는 이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그곳에서 매일 우리를 맞이했고, 우리는 그런 수가 점점 익숙해져 갔다.
- 나 섬을 샀어.
수가 그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우리가 그런 식으로 활동을 재개한 지 만 1년이 되던 날이었다. 수는 우리들 중 팬의 비율이 가장 높은 멤버였고, 그 덕분에 현실에서는 써보지도 못할 돈을, 깨어나면 평생 쓰고도 남을 돈을 벌었다. 그해 ‘수’는 정산의 일부를 기브에서 쓸 수 있는 화폐로 바꿔 달라고 요청했고, 그 해 벌어들인 수익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았던 대표는 흔쾌히 수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때 누군가 수를 말렸어야 한다고 생각해오고 있었다.
수는 자신이 봐둔 이 세계의 끝에, 아무도 살지 않는 섬을 구입했다. 그리고는 자꾸만 쓸데없는 것들을 주문했다. 이를테면 방울토마토 모종이나, 낚싯대, 간이 해먹 같은. 처음엔 단순히 요즘 유행하는 귀농 체험이나 캠핑 같은 것에 단단히 빠져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계절을 구입하고, 섬 곳곳을 꾸미는데 상상도 하지 못할 돈을 투자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조금 겁이 나기도 했다. 섬에 가 있는 동안 수는 연락이 잘 되지 않았고, 나는 수가 그곳에서의 삶을 만족하고 있을까 봐 덜컥 겁이 났다. 수는 아직 현실 세계에서 숨을 쉬고 있는데, 살아 있는데. 수가 알지 못하는 현실의 사람들은 가끔 수를 죽은 사람 취급하곤 했다. 늘상 장난기가 넘치고 밝은 수이지만 수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비밀이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했던 나는 가끔 현실이 아닌 세계에서조차 또다시 도망치려는 것 같은 수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
언제 발견했는지 시안의 손엔 제 손바닥의 2배 크기나 되는 수박이 들려있었다. 시안은 수박을 든 채로 오두막 쪽으로 걸어왔다. 그 모습을 발견한 우영이 시안을 가리키며 낄낄거렸다.
- 이거 먹을 수 있나?
시안이었다. 시안은 우리 중에 기브에서의 활동을 가장 적게 한 멤버였다. 그렇기에 정해진 무대 스케줄이나 인터뷰를 제외하고는 이 공간에서 자유시간 같은 걸 누린 적이 없었다. 시안의 물음에 내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
- 무거워? 내 쪽으로 던질 수 있겠어?
시안은 한눈에 봐도 무거워 보이는 수박을 제 품에 안은 채 수를 올려다보고는 문득 깨달았는지 한 손으로 가뿐하게 수박을 들어 올렸다. 그러더니 곧 농구공을 굴리듯 검지손가락을 펴고 빙그르르 굴렸다. 수의 표정이 묘하게 굳었다.
- 아니, 너무 현실감 있어서 내가 착각을 했네. 전혀 무겁지 않잖아.
시안이 말했다. 나는 그런 시안을 바라보다 수를 향해 말하듯 분명하게 말했다.
- 그럼 맛도 없는 거야. 아무 맛이 느껴지지 않는 거라고. 상상할 순 있겠지. 우린 수박을 먹어본 경험이 있으니까. 그런데 결국엔 가짜인 거야. 모든 게 다.
수는 오두막 난간에 기댄 채로 섬 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밖으로는 끝없이 이어지는 물결과 지평선이 전부였다. 갈매기 한 마리도, 지나가던 배 한 척도 없다. 그런 걸 원한다면 얼마든지 배치가 가능하겠지만 수는 섬 밖까지 아이템을 구입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한동안 수는 우리에게 자신이 아닌 척하는 장난을 즐기던 적이 있었다. 언제든 마스크 옵션을 바꾸면 수가 바로 옆에 있어도 알아볼 수 없었다. 때문에 신곡 발표를 앞두고 있거나, 콘서트를 해야 할 땐 수가 그런 장난을 시작하면 모두가 그 넓은 공간에서 수를 찾아다니느라 진땀을 뺐다. 그럴 때마다 기브에서 수를 탐지하는 프로그램을 작동시켜야만 했고, 수는 곧 사냥이라도 당한 노루처럼 입술을 비죽거리며 우리 앞에 나타났다. 얼마 동안 수는 실없이 술래 없는 숨바꼭질을 이어나갔고 금세 싫증을 냈다. 멤버들이 아무도 동참해주지 않던 날엔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 다들 왜 이렇게 시시해졌어. 재미없게.
- 수야, 제발.
수는 멤버들의 눈치를 살피며 실망한 얼굴을 했고, 곧 또 다른 장난 거리를 찾아다녔다. 문제의 그날은 기브에서 최대 규모의 쇼케이스가 있던 날이었다. 우리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오고 있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투자의 규모가 커지고 주변의 기대가 높아지면서 모두들 크고 작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연습생 시절처럼 그저 무대 위에서 퍼포먼스를 할 기회가 생기는 것만으로 감사했던 시절은 지나간 지 오래였다. 우리는 이익을, 그다음의 더 큰 이익을 만들어내야만 했다. 가끔 그것이 내 스스로를 미치게 만들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수에게 화를 냈다.
- 10년 차야. 우리 이제 어리지 않아. 우리 사업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지. 언제까지 제자리에 머물러만 있을 거야. 너는 어떻게, 변한 게 없어.
수는 변하지 않았다. 스케줄이 없는 날이면 늘 같은 옷을 입었고(심지어 빨래할 필요도 없었으므로) 다른 멤버들이 피부과에 가서 크고 작은 시술을 받는 동안에도 늘 그대로였다. 병원에서 눈을 감고 있는 현실 세계의 수조차도.
다음 날, 나는 수의 메신저를 통해 사과의 뜻을 보내었다. 답장은 없었다. 찝찝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때만 해도 나 역시 수에게 그동안 쌓인 앙금이 남아 있었으므로, 애써 수의 연락을 기다리지 않았다. 수가 아니더라도 나는 수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매우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만 했다. 아침저녁으로 2시간씩 운동을 해야 했고, 뮤지컬 스케줄이 잡혀 있었으며 3일에 한 번꼴로 인터뷰나 화보 촬영, 광고 촬영이 남아 있었다. 더 먼 미래를 생각하며 틈틈이 외국어 공부도 했고, 라디오나 예능 프로그램 섭외가 들어오면 망설이지 않았다.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24시간이 그렇게 채워지는 동안 수는,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냈을까. 내내 섬을 채우며 시간을 보냈던 걸까. 그것이 지루하지 않았을까. 수는 3년 전 그날도 그런 삶을 원하고 있었던 걸까.
멤버들 모두 오두막에 올라가자 기다렸다는 듯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사다리를 오를 때부터 맑고 깨끗하던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왔는데, 아마도 수가 ‘소나기 옵션’을 구매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센트럴파크처럼 공동 소유의 땅은 ‘기브’에 의해 날씨나 밝기 등이 조절되었지만 개인 소유의 공간에선 쏟아지는 비의 굵기까지도 원하는 대로 조절할 수 있었다. 수는 시안이 들고 온 수박을 칼로 쪼갰다. 속이 붉은, 잘 익은 수박을 예상했지만 내 눈앞에 있는 것은 속이 덜 익어 중심부가 희끗희끗했다.
- 으, 덜 익었네. 시겠다.
- 여기서도 덜 익은 수박 같은 게 있구나, 복불복 옵션 같은 건가?
승조가 미간을 모으며 말했고, 이어 우영이 수박 반쪽을 들고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 환경 때문인 거지. 올해는 섬에 비가 많이 왔거든.
두 사람의 말을 듣고도 수는 듣지 못한 척 다른 소리를 했다. 섬에 비가 많이 오고, 환경에 영향을 받고, 그런 건 없다. 이곳은 현실 같은 가상 세계이지만 현실은 아니므로. 수는 잠을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온종일 이 세계를 현실이라 믿으며 살아가고 있겠지만 우리에겐 아직 이곳을 현실처럼 여기는 것이 불가능했다. 우리에게 그 세계는 여전히 스쳐 지나가는 일생의 한 부분일 뿐.
수는 여러 조각으로 나눈 수박을 우리에게 하나씩 내밀었다. 그리고는 한 입씩 베어 물었다. 나도, 멤버들도 수를 따라 수박을 입에 넣었다. 수박은 내가 베어먹은 그대로 자국을 남겼지만 입안 가득 시원한 맛의 과즙까지 느껴지지는 않았다.
- 아, 시원하다. 역시 여름엔 수박이지.
수가 오두막 난간에 팔을 기댄 채 말했다. 수의 말에 누군가 쿡하고 웃었다. 우영이었다.
- 너처럼 섬의 반을 여름과 겨울로 나눈 사람은 없을 거야.
우영이 오두막의 반대편에서 우뚝 솟아 있는 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한여름의 분위기와 다르게 그곳은 설경이 펼쳐지고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피부에 오돌토돌 소름이 돋을 것만 같았다.
- 수야, 이번엔 네가 우리에게 네 마음을 털어놨으면 좋겠어.
그리고 기다릴게. 여기든, 아님 이 세계 밖에서든. 언제든지 마음의 준비가 되면. 우영의 말에 수는 손에 들고 있던 수박을 장난치듯 나무 바닥 위로 집어던졌다. 통나무로 만들어진 나무엔 과즙이 스미지 않았고, 수가 무엇을 조절한 것인지 우리의 손에 들려 있던 수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다시 빗줄기가 굵어졌다. 비 오는 날 특유의 물비린내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빗소리는 언제고 오두막을 무너뜨릴 것처럼 거세게 몰아쳤다.
- 하루종일 겨울에 갇히게 되는 꿈을 꾼 적이 있어. 저렇게 높은 곳에서. 높은 곳은 늘 겨울이잖아.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사실은 쓸쓸하고 외로운 계절이지. 유일하게 겨울만이 시간을 보존하기도 해. 그래서 겨울 속에 갇힌 것들은 변하지 않지. 사라지지도 않고.
수는 고개를 돌려 호수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 겨울을 꿈꿨던 시절이 있었어. 그냥, 겨울은 그런 계절이니까.
- 여름이니 겨울이니, 우린 형처럼 그렇게 감성적이지 않아서, 지금 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있잖아, 우리는…….
시안이 조금 피곤한 듯만 말투로 말했다.
- 확실한 건 하나야. 겨울은 또다시 찾아올 거라는 거.
수는 무릎을 펴고 일어나 오두막에서 뛰어내렸다. 현실 세계였다면 다리가 부러졌겠지만 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겨울 산을 향해 걸어갔다. 따라가자. 내 말에 우리는 수를 따라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겨울 산은 아직 멀리 있는데 산이 있는 방향에서는 간헐적으로 땅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앙상해진 나무의 가지가 갈라지고, 얼었던 땅이 움직이는 것 같은 소리였다. 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로 앞을 향해 나아갔다. 수는 언제나 우리들보다 열 걸음씩 앞서 걷곤 했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찍을 때에도 수는 늘 저만치 앞서 걸었고, 그래서 편집된 영상을 보고 있노라면 한 프레임에 수와 함께 서 있을 때는 많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팬들이 수를 보고 ‘직진하수’라는 별명까지 붙였을까.
수는 두 팔을 엉덩이춤에 걸치고는 앞을 향해 걸었다. 그러나 수가 걷는 길은 사람이 다니는 길 같이 보이진 않았다. 뿌리가 굵은 나무들은 정돈되지 않은 채 숲을 이루고 있었고, 화려한 무늬의 벌레가 손등 위에 앉았다 사라지거나 생전 처음 들어보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수가 걸음을 멈추기 시작했을 때는 본격적으로 설산으로 가는 길목에서였다. 수는 무릎을 굽힌 채 운동화 끈을 고쳐 묶었다. 수가 너무도 진지하게 그러는 바람에 나조차도 입고 있던 옷을 정돈할 뻔했다. 멤버들은 모두 그런 수를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 사실 처음이야, 이 산을 오르는 거.
수가 긴장된 표정으로 산꼭대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산꼭대기는 새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계속해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 산에 뭐라도 숨겨 뒀어?
우영의 물음에 수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끝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수가 운동화를 고쳐 신은 그 순간부터, 우리가 걷는 길은 빠른 속도로 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발을 뻗을 때마다 새하얀 눈길에 발자국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러나 그것은 곧 새롭게 쌓인 눈으로 덮였다. 얼마 동안은 그저 신기하다고만 생각했다. 기브에 접속해 있을 동안은 이런 곳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우리는 늘 스튜디오나 콘서트장 같은 분위기의 공간에서 정해진 대화만을 했으므로, 그곳에선 우리의 모든 것이 다 전시되었다. 사소하게 내비치는 표정들까지도. 그곳에서조차 우리들을 보러 온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들 우리만을 바라보고 있었고, 누가 어떤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야기들이 빠른 속도로 퍼져갔다. 때로는 왜곡된 것이기도 했고, 알려지고 싶지 않은 사소한 비밀이기도 했다.
수는 우리 중에 가장 비밀이 많은 애였다. 우리는 친구처럼, 때로는 가족처럼 오랜 기간을 함께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지는 않았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고 생각한다. 수는 가끔 기분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곤 했다. 기분이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어딘가 걱정이 있는 것 같기도 한 표정. 언뜻 보면 멍 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그건 절대로 멍 때리는 표정 같은 건 아니었다.
언젠가 진행했던 인터뷰에서 50년 후에 대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원로 MC가 진행하는 토크쇼였고, 늘 톡톡 튀고 발랄한 컨셉으로 인터뷰에 임했던 우리는 그날만큼은 누구보다 진지한 진행자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인생 상담을 하듯 얼굴에서 장난기를 지운 채로 각자의 대답을 이어나갔다. 인간의 수명은 계속해서 길어진다고 하지만 50년 뒤라면 우리가 노인의 범주에 들어갈 때일 것이다. 나는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다들 입술을 떼었다 다물기를 반복했는데 모두 언제고 그때가 온다는 사실을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것 같았다. 진행자는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하는 우리를 보다 껄껄 웃으며 말했다.
- 지금 이 시절이 언제까지고 영원하진 않을 거잖아요. 그냥 단순하게 생각해 봐요. 예를 들면, 산속에서 농사를 짓는다거나, 아니면 그때에도 국민가수로 사랑받는다거나, 막연하게 어떤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그런 것?
-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단 한 사람의 기억 속에라도 저희가 좋은 모습으로 남아 있는 그런 아티스트가 되고 싶습니다.
나는 거울 앞에서 수천 번이고 연습했던 미소로 카메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들 그런 생각을 할 것이다. 진행자는 한쪽 눈썹을 치켜뜨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아마도 그런 사람들로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승조가 소리 없는 박수를 치며 입술을 동그랗게 모았고, 시안은 파이팅하는 제스처를 보였다.
- 글쎄요, 그때까지 우리가 함께일 수 있을까요? 어쩌면 지금 이 순간만 기억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수의 말에 모두들 그를 바라보았다. 생방송이었고, 누구든 뭐라도 답을 이어가야 했다. 그러나 우리들 중 누구도 수의 말에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다. 늙는 걸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진행자의 재치 있는 답변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그다음 날 불거졌던 멤버 간 불화설, 해체설에 오래도록 시달렸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수가 뱉은 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가끔 시간을 되돌려 그 순간을 떠올릴 땐 그건 수가 모두에게 남겼던 마지막 신호였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가끔 생각했다.
다음 날 포털은 ‘수’의 이름으로 도배가 되었고, 연관 검색어는 안 봐도 뻔했다. 사람들은 들은 적 없는 이야기들을, 보지 않은 이야기들을 사실처럼 옮기기 시작했고, 이에 우리가 과거에 촬영해두었던 인터뷰 영상이나 쉬는 시간에 치던 장난 같은 것들이 왜곡된 채로 해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수’가 그룹 내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까지 퍼져갔다. 악의적으로 편집해 놓은 멤버 각각의 굴욕 이미지들이 올라왔고, 심지어 시안은 촬영 중이던 작품에서 하차를 하게 됐다. 다음 날 우리는 대표실에서 다시 만났다. 수는 전처럼 웃는 얼굴로 우리를 마주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에게 사과를 하지도 않았다. 대표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수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 수야. 네 말 한마디가 얼마나 무거운지 알겠지? 이젠 네 푸념 하나에 걱정해 주고, 이해해 주던 그 시절은 지났어. 나는 이제 너희들이 각자의 행동에 책임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너희 믿으니까 더 이상 아무 말은 하지 않을게. 상처받는 일이 생겨도 꿋꿋하게 잘 이겨내고, 조만간 스케줄 잡아 줄 테니까. 이번 일은 수, 네가 직접 해결했으면 좋겠다.
일주일 뒤, 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그 일에 대해 직접 해명했다. 50년이란 시간은 너무 까마득하게 보였고, 그때까지 현존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먼저 생각했을 뿐이었다고. 수는 오히려 팬들에게 걱정시켜 드린 것 같아 미안하고, 멤버들에게도 따로 사과를 전했다고 했다. 그리고는 그날 방송국까지 찾아온 팬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여유까지 보이며 예의 그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사실 수는 우리에게 그날 이후로 사과는커녕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수가 우리에게 사과해야 하는 일은 없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세계 속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만 같은 수가 나는 처음으로 낯설게 느껴졌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함께 보냈던 시간들이 무색하다고 생각될 만큼.
수로 인해 사건은 금방 잦아들었지만 그 일이 있고 얼마 되지 않아 수는 도망치듯 우리의 곁을 떠났다. 아무런 말도 없이. 수의 고통은 차마 우리에게 털어놓을 수 없을 만큼 부끄럽고 괴로운 것이었을까. 겨울 산을 오르는 일처럼 수없이 바라보기만 하다가 올라보지도 못하고 내려와야만 하는, 그런 것이었을까.
장시간 기브에 접속해 있던 탓에 눈이 아프다고 생각했을 즈음엔 이미 산의 중턱까지 올라온 후였다. 언제고 설정만 한다면 금방이라도 정상에 오를 수 있겠지만 수는 그보다 직접 산을 오르는 쪽을 택했다. 시안은 다음 스케줄 때문에 잠시 기브에서 사라졌고, 섬에 남은 사람은 수와 우영, 그리고 승조와 나뿐이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수에게 지금 곡을 받게 되더라도 스탭들은 이미 촉박한 일정으로 무리하게 진행할 것이 뻔했다. 더 이상 수의 장난 같은 말에 맞장구를 쳐줄 순 없었다. 그건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수는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뒷짐을 쥔 채로 우리에게 뒤통수만 보여주며 앞으로 걸어갔다. 설산에 맞지 않는 여름 반바지와 반팔 티셔츠를 입고서. 나는 고민 끝에 수를 불러 세웠다. 그러자 수가 뒤돌아봤고, 그와 동시에 수의 머리 위에서 가지 위에 소복하게 쌓여 있던 눈이 우수수 떨어졌다. 수가 제 머리 위에 맺힌 눈을 털어내며 왜 그러냐고 물었다.
- 언제까지 여기에만 있으려고 그래.
그 말에 수는 산의 정상을 바라보고는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언제든 나를 만날 수 있는데 그게 뭐가 중요하느냐고 물어왔다.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나는 수의 무책임한 말과 태도에 조금 화가 난 표정으로 지금 네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있는 것인지는 알고 있느냐고 화를 냈다. 옆에 있던 승조가 내 앞을 막아서며 참으라고 말했고,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 너한테는 지금, 이 세계가 전부겠지만 우린 아니거든.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널 기다리는 줄 알아? 너 이런 식으로 일할 거면 어제 팬들한테는 왜 그랬냐. 차라리 사고 나던 날부터 조용히 평범하게 지내던가. 이 일을 계속하겠다고 한 건 너야. 그럼 책임을 져야지. 네가 시작한 건 네가 마무리해야지. 왜 이렇게 너는.
나는 기브를 종료하기도 직전에 헬멧을 벗어던졌다. 그러자 수가 누워 있는 병실 안의 풍경이 들어왔다. 어느덧 해가 저물어 있었고, 창밖으로는 가로등 불빛 아래 몇몇 사람들이 산책을 하고 있었다. 나는 허리춤에 손을 얹고는 핏기 없이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수를 바라보다 근처에 있던 물병에 손을 뻗었다. 마음이 너무 답답했다.
-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진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모두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만 같았다.
*
다시 기브에 접속했을 때, 수는 이미 제법 멀리까지 이동한 후였다. 나는 내비게이션으로 수의 좌표가 찍혀 있는 곳을 찾아내었다. 잠깐 사이 수는 내가 걸어서는 따라잡을 수 없는 거리만큼 떨어져 있었는데, 그래서 내가 수의 앞에 나타나자 수는 나를 보고는 잠시 멈칫했다. 일부러 수의 앞을 가로막으려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수가 나를 무시하듯 지나쳤을 때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그 길은 사람이 전혀 다닐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평지가 아닌 가파른 경사로 이루어진 암벽이었고, 곳곳에 뻗어져 있는 나무는 날카로운 가지로 위협하듯 금방이라도 미끄러질 것만 같았다.
- 아래를 봐! 우리가 있었던 곳이야.
- 아니, 지금 우리가 그런 걸 얘기할 때가…….
내가 수의 앞을 다시 막아서자 수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두 손으로 내 얼굴을 잡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지금까지 우리가 올라왔던 섬의 풍경이 한눈에 담겼다. 일정한 간격으로 파도가 넘실거리고 있었으며, 섬의 중심부에는 보랏빛을 띠는 호수가 반짝이고 있었고, 오두막 주변으로 색색의 꽃과 열매가 모여 있었는데,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 탁 트이고 좋네. 진짜가 아니라는 게 안타깝지만.
한참 동안 산 아래 풍경을 바라보던 수가 갑자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수는 울고 있었다.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수는 멤버들 중에서도 눈물이 없기로 유명한 멤버였다. 그런 수가 처음으로 우리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수의 울음은 아이처럼 우렁차고 서러워 보였다. 우영이 수의 어깨를 감싸며 안아주었지만 수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 보였다.
수는 무엇 때문에 울고 있는 걸까. 수가 슬픈 이유는 어떤 시절이 끝나버렸기 때문인 걸까. 아니면 수의 기억이 돌아왔기 때문인 걸까. 수를 향해 있었던 날 선 시선들이 모두 다른 방향을 향해 날아갔고, 나는 또다시 수가 우리를 떠나버릴까 봐 겁이 났다. 수 혼자 모든 마음들을 짊어지게 될까 봐. 내가 할 수 있다면 수를 이 섬으로부터, 겨울 산으로부터 최선을 다해 구해내고 싶었다. 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섬에서 벗어나 때로는 집채만 한 파도를 넘어 다시 우리에게 돌아올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다. 그것이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판단이더라도.
- 괜찮아. 수야. 미안해. 우리는 다 괜찮아질 거야.
우영이가 말했다. 우영이 역시 목이 메는 듯 목소리가 떨렸고, 나는 이마를 짚었다. 두통이 밀려왔다.
- 기억이 돌아온 거구나. 그날 그때의 기억이.
내 말에 승조가 수를 바라보았다. 수의 얼굴은 다시 울기 직전의 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아마도 수는 또다시 감정을 숨기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수의 앞에 마치 다가설 수 없는 가시넝쿨이 있는 것처럼 그 자리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뭐라고 말을 덧붙일 수도 없었다. 수는 눈앞에 보이는 돌멩이를 주워 허공을 향해 던졌다. 돌멩이는 공중에서 아래로 추락했지만 어디에 떨어졌는지, 떨어질 때 어떤 타격을 입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곳은 보이는 것만으로 상처를 입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수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 얼마 전까진 그 ‘책임’이라는 말이 참 듣기 싫었어. 그게 나를 옥죄는 것만 같았거든.
- …….
- 성준이 형. 나는 이 섬 밖으로 나가는 방법을 잘 몰랐던 것 같아. 이 섬 밖의 저 수많은 파도는 아마도 실패로 이루어져 있을 거야. 물에 젖어본 적 없는 사람은 축축하다는 표현이 두렵게 느껴지겠지. 그것이 영원하지 않을 텐데. 왠지 지금까지 잘 간직해 오던 시절의 어떤 것을 빼앗겼다는 생각도 들 거야.
수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산의 정상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제 정상까지는 약 스무 걸음 정도 더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계단처럼 층층이 엮여 있는 눈길을 밟으며, 길을 걸을 때마다 뽀드득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직접 끝까지 걸어가 보자. 수는 언제 울었냐는 듯 씩씩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말했다.
어느새 시안이 다시 기브에 접속해 있었다. 시안은 지금 촬영을 마치고 다른 스케줄로 향하는 차 안이라고 했다. 시안의 목소리가 잠겨 있는 걸 보니 꽤 피곤해 보였다. 시안 역시 이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와 있었다는 사실에 놀란 듯 보였다.
- 같이 가자. 언젠가 다 같이 꼭 이 산의 정상까지 올라가 보고 싶었어.
정상까지 올라가는 동안 유독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회오리치듯 불어오는 바람은 금방이라도 살갗을 에이는 추위를 몰아올 것처럼 귓가에 살벌한 소음을 만들어내었고, 눈앞으로 시야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내리던 진눈깨비는 한층 짙어졌다.
산꼭대기에서 바라본 풍경은 이전에 봤던 것보다 더 대단하다거나 멋있지 않았다. 온 세상을 다 가진 듯 풍요로웠던 마음조차도 다 허상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눈과 암석으로 뒤덮인 벼랑 끝에서 섬을 내려다보고 있는 수는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 성준 형, 우영아, 시안아, 승조야.
수가 고개를 돌려 우리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수의 얼굴은 늘 익숙했지만 그 순간 진짜 현실 속의 수를 만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수의 목소리는 수의 것이 아니었지만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그 애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 나 사실은, 지금 너무 무서워. 이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와 본 게 처음이라. 언젠가 내려가야 하는 이 길을 영영 잃어버릴까 봐. 그리고 모든 게 망가져 버릴까 봐. 다 같이 올라가는 이 길에서조차 누군가 상처받고, 다치게 될까 봐. 나는 그게 항상 무서웠어. 그러니까, 애초부터 산에 오를 준비가 되지 않았던 거야.
수의 목소리 끝이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수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하는지 알고 있다. 수는 예전에도 지금도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 수야. 우리는 언제든 함께할 거야. 그러니까 같이 무서워하자. 나도 사실 지금 되게 무섭거든. 그러니까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면서 걸어가 보자. 천천히, 다시 천천히 돌아오자. 네가 이 섬에서 우리를 기다렸던 그 마음만큼, 우리도 널 기다릴게.
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활짝 웃고 있었다. 나 역시 수를 보며 활짝 웃었다. 그와 동시에 눈앞에 있던 수가 점점 흐릿해졌다. 그제서야 내가 하루에 기브에 접속할 수 있는 시간을 다 써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면은 점점 흐릿해지더니 이내 깊은 어둠에 잠겼다. 수에게 더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헬멧을 벗자 다시 병실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수는 병실 침대에 누워 느린 호흡을 뱉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생생했던 수와의 기억은 마치 몽롱한 어느 날 밤의 꿈 같았다. 나는 일정한 간격으로 소음을 만들어내는 병실 안의 기계들을 바라보았다. 수는 여전히 현실을 인지해야 하는 만큼 감각하지 못했다. 이제 그만 꿈에서 깨자. 형이 진짜 여름 수박 사줄게. 나는 수가 단지 꿈을 꾸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수의 빛바랜 머리카락이 새벽녘의 조명에 반사되어 날카로운 가시처럼 가슴을 찌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는 여전할 것이다. 우리를 만나면 언제 울었냐는 듯 장난을 칠 것이다. 수의 온기를 다시 느낄 수 있게 된다면 수에게 내가 아는 섬을 보여줄 것이다. 절대로 혼자가 아닌 진짜 섬의 모습을. 바다를 수놓고 있는, 반짝거리는 빛의 조각 중 하나인 그것을. 그리고 함께 헤엄쳐 갈 것이다. 수없이 가라앉고, 뜨기를 반복하며.
수의 손등에 내 손을 포갰다. 섬에서는 느껴볼 수 없었던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이 느껴졌다. 수의 목소리가 그리웠다. 일어나.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 나는 수의 마른 뺨을 바라보며 말했다.
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