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N은 시계탑 아래에 서 있었다. 나는 맞은편에서 휴대폰을 들고 있는 N을 보자마자 머리 위로 크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N이 나를 알아봤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을 바지 뒷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N의 뒤로 어른 둘과 아이 둘이 동그랗게 모여 있었다. 한 가족으로 보였는데, 그중 아이 엄마와 이제 갓 걸음마를 뗀 듯한 둘째 아이가 몸을 돌려 나무 그늘 아래로 들어갔다. 아이 아빠의 손에는 동네 문방구에서나 볼법한 조잡한 비닐로 만들어진 연이 들려 있었고,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첫째의 발치에는 샛노란 플라스틱 물레가 놓여 있었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말이죠.
횡단보도를 지나 어느새 N의 옆에 온 내가 말했다. 그러자 N이 고개를 끄덕이며 오늘 같은 날은 차라리 불꽃놀이를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이곳 시계탑 앞에서 자주 연을 날리곤 한다고. 이곳만큼 연을 날리기 좋은 장소는 없다고 덧붙였다. N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이 아빠가 연을 제 머리 위로 올린 채 허공을 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첫째가 물레를 손에 쥐기도 전에 돌발적으로 보인 행동이었다. 벤치 아래 앉아 있던 아이 엄마가 첫째의 이름을 불렀고,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아이가 잠깐 시선을 돌린 사이 물레에 감겨 있던 실이 순식간에 도르르 풀려버렸다. 얘야, 물레를 잡아. 잡아야지! 아이 엄마가 검지손가락을 펴 보이며 외치자, 옆에 있던 둘째가 놀랐는지 와앙하며 울음을 터트렸고, 그와 동시에 첫째가 제 앞에 놓인 물레의 손잡이를 힘껏 잡았다. 그때 가로등마다 매달려 있던 스피커에서 뎅뎅- 하고 종소리가 울렸다. 이게 무슨 소리냐고 묻자 N이 시계탑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오요. 지금 막 정오가 지났다고요.
공원 입구에서 이어지는 골목에선 N의 또래로 보이는 이들이 거리를 채우고 있었다. N은 이들 중 대부분이 근처 대학가의 학생들일 것이라고 말했다. 거리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얼굴에 잠자리 모양의 선글라스를 끼고 있거나, 바닥이 그대로 끌리는 카고 스타일의 바지, 또는 제 몸집보다 몇 배는 커 보이는 남방을 아슬아슬하게 걸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N의 옷차림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처럼 어딘지 모르게 촌스럽고, 낯설게 느껴졌는데 그도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펑퍼짐한 소매를 접어 올리며 유명 브랜드의 빈티지 상품이라고 말했다. 요즘은 이런 게 유행이죠. 그가 유행이라는 말에 유독 힘을 주며 말했고, 나는 그것들을 바라보며 알고는 있었지만 인정하긴 힘들다는 얼굴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행인 것들은 그 밖에도 더 있었다. 소라 모양의 버터 발린 빵인 ‘크루아상’을 와플 기계에 얇게 눌러 만든 크로플이 유행이었고,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사이로 유명 댄서들의 춤을 따라 추는 챌린지가 유행이었으며, 오래 방치되었던 골목 곳곳에 위치한 낡은 책방이나 소품샵,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은 듯한 카페를 찾아다니는 것이 유행이었고, 그중에는 SF 장르의 책들이 베스트셀러 코너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것이, 유행이었다.
N은 SF가 호세를 알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고 했다. N은 내가 호세를 알기 전부터 그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간판이 없는 책방 유리창 안쪽을 바라보자 N이 대뜸 내 한쪽 어깨를 툭 치며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는 인터넷 창을 열어 그가 구독하고 있는 사이언스 채널을 하나씩 보여주었다. 그것을 나에게 보여주던 그의 눈빛은 꽤 심각하고 진지하게 보여서 나는 정말로 그가 호세를 만난 적이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곱창집과 요거트 카페 사이에 있는 전봇대 앞에 서서 그가 내민 휴대폰 화면을 보다 텁텁한 냄새에 시선을 돌렸다. 전봇대 앞에는 몇 명의 남녀가 모여 담배를 피우며 우리를 흘깃 바라보았다. 제 말 듣고 계세요? N이 나에게 조금 짜증을 내었고, 나는 전봇대에서 이어진 전선들이 공중에서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모습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도 여긴 아직 전선을 땅 속에 묻진 않았나 봐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코트 안쪽에 넣어둔 휴대폰 진동이 울렸고, 동업자인 S로부터 N을 만났냐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N은 나에게 이러지 말고 주변에 있는 카페라도 들어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N이 데려간 카페는 유독 엠뷸런스 소리가 자주 들리는 곳이었다. 근처에 있는 대학병원의 응급실과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이런 곳에도 손님들이 오나요? 나는 사이렌의 붉은 조명이 유리창을 무심히 때리고 지나갈 때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고 자주 창밖의 거리를 살폈다. 내 말에 그가 쓰고 있던 안경을 고쳐 올리며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는 나를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애 취급하듯 이런 곳에 자리를 잡는 것도 경쟁, 이라고 덧붙였다. 나보다 열몇 살이나 어린 그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 우스워 나는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자주 코를 문질렀다. 그의 말에 따르면 대학 주변 카페에서 공부를 하는 카공족이 늘어 사람이 많이 없는 카페를 찾는 것도 요령이라고 했다. 이런 곳이라면 손님이 적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일부러 아침부터 자리를 잡고 앉죠. 요즘에는요, 노이즈캔슬링이 잘되는 상품들이 많아서요. 사이렌쯤이야, 게다가 최근엔 저희 학교에 큰 도둑이 들어 입구부터 얼마나 시끄러웠는데요. 저희 세대는 이런 잡음에 익숙해서요. 잘 아시잖아요. 그가 재밌는 이야기라도 꺼낸 것처럼 먼저 푸핫하고 웃었고, 나는 머쓱한 표정으로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그는 이곳에서 UFO에 대한 기사를 수집하며, 유튜브에 외계인과 관련된 소식을 알려주는 콘텐츠를 정기적으로 업로드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실제로 외계인을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의 채널엔 외계인의 능력이나 외양에 대한 설명이 꽤 구체적이고 그럴듯하게 설명되어 있었는데 잘 알려지지 않은 채널이었기에 구독자수는 이제 막 세 자릿수를 넘긴 수준이었다. 그는 UFO와는 전혀 관계없는 전공의 학부생이었다.
카페는 가게 중앙에 화장실을 기둥처럼 두고 주변에 자그마한 테이블이 감싸고 있는 구조였다. 그와 내가 앉은자리는 화장실 문 바로 앞이었다. 그와 이야기를 하려고 할 때마다 화장실에서 사람들이 나왔다 들어가기를 반복했고, 비어 있는 동안에는 종종 카페 직원이 화장실 안쪽을 정리하며 문을 열어두었다. 그 바람에 화장실에서만 나는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풍겨왔고, 그 사이 그가 가져다준 라떼와 케익을 내려다보던 나는 슬그머니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는 이런 일은 익숙하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나에게 물티슈를 내밀었다. 요즘 같은 시기엔 위생이 철저해야 하니까요. 나는 그가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물티슈를 받아 들었다. 흰 부분이 눈에 띄게 긴 손톱 아래 작은 점 같은 때가 끼어 있었다.
그는 호세를 다시 만난 곳 역시 화장실 앞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정확히는 남자 화장실 입구 맞은편에 놓인 물건보관함 앞이었다고. 근처의 지하철역에서 대형마트로 이어진 길목에 있는 화장실 앞에 물건보관함이 있었다고 그는 덧붙였다. 그곳에서 호세를 보았다고 했다.
호세는 어떻게 지내고 있던가요.
내 물음에 그는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날 N은 처음부터 호세를 만나기 위해 작정하고 그곳을 들른 것은 아니었다. 그저 우연히, 자취방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대형마트의 마감 세일 시간에 스쳐 지나가듯 그를 발견했었다고 답했다.
처음엔 형을 알아보지 못했어요. 그저 나같이 늦은 시간에 푸드 코너에서 초밥이나 치킨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죠. 그 시간에 외계인이 대형마트 남자화장실 앞에서 누군가 바닥에 흘리고 간 돛대를 주워들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요.
그는 마치 제가 호세라도 되는 양 카페 벽면에 머리를 기댄 채 한숨을 푹 쉬었다.
*
내가 다닌 학교는 서울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으로, 학교 부지를 중심으로 비교적 낮은 산과 호수, 그리고 대규모의 옥수수밭이 감싸고 있는 구조였다. 옥수수밭을 제외하고는 학교 주변에 몇 개의 카페와 밥집을 겸업한 술집, 가동을 중단한 비료 공장과 인쇄소, 기숙사 사업에 밀려 유독 빈 방이 많았던 몇 채의 원룸 건물이 전부였다. 그래서인지 봄가을 할 것 없이 사막 한가운데에 놓인 것처럼 학교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는 데다 대체로 차분하고, 건조한 분위기였다. 어쩌다 터미널이나 병원이 있는 시내에 가려면 버스를 타고 15분은 가야 했는데, 버스 안에 앉아 있다 보면 뙤약볕 아래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제 키보다 높은 옥수수밭 사이 물레를 손에 쥔 채 연을 날리는 아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학교 근처의 옥수수밭은 연을 날리기 참 좋은 장소였다. 호세 역시 그런 이들 중 한 명이었다. 호세는 그 동네에서 나고 자랐다고 했다. 호세의 집은 학교에서 자전거를 타고 조금만 더 들어가면 나오는 작은 마을에 위치해 있었다.
호세는 나와 같은 전공의 학생이었는데, 그는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인상이기도 했다. 여드름이 많은 피부라고 치부하기엔 전체적으로 지나치게 붉은 피부와 2미터에 달하는 큰 키. 그리고 영화에서나 볼법한 오드아이였다. 그렇지만 그가 학교에서 유명했던 이유는 그가 늘 크고 작은 사건에 휘말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종종 어리석다고 말해주고 싶을 만큼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주변 사람들을 쉽게 믿었고, 신비로운 첫인상과 다르게 저런 사람도 비밀이 있을까 싶을 만큼 속내를 쉽게 들키는 편이었다. 돌려달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에게 몇 번이고 돈을 빌려 갚지 않는 동기부터 뻔뻔하게 대리 출석을 요구하고는 사실을 들키면 잘못을 뒤집어 씌우는 선배까지. 심지어 어떤 이들은 학교에서 비교적 가까운 그의 집을 저들의 아지트로 삼아 걸핏하면 마당에서 술판을 벌이거나 노부부에게서 용돈을 타가기도 했다. 그들은 가끔 노부부의 옥수수 수확을 돕는 것으로 저들의 몫을 다한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한동안 나는 호세 같은 종류의 사람들을 정말로 싫어했다. 일부러 상대의 나쁜 속셈을 눈감아주며 멋대로 관용을 베풀 듯 불쌍하게 여기려는 사람들. 나는 그것을 선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마주할 때면 나는 그 사람의 마음을 힘껏 괴롭혀주고 싶었다.
나는 스물한 살이 되던 해에 내가 살던 서울에서 되도록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 도망치듯 내려왔다. 그 당시 나는 내 계획이 철저하고, 완벽하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돈을 마련하는 과정에선 몇 명의 어른을 배신해야 했다. 어릴 적부터 마음을 영악하게 쓴다는 말을 쉬이 들어오던 나였다. 나는 내 인간성에 충실하기로 마음먹었고, 그래서 더 미안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은 충분히 나를 찾아낼 수 있었을 텐데 아마 내가 떠난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겼던 것 같기도 하다. 다만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나를 꾸짖듯 그날은 이동하는 내내 폭설이 쏟아졌고 자꾸만 속이 울렁거리고 식은땀이 났다. 버스는 톨게이트와 터미널 중 한 곳을 선택해 내릴 수 있었다. 나는 톨게이트에 내려 눈발 사이로 흐릿하게 보이는 학교의 건물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해가 막 뜨기 시작해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던 새벽이었는데, 발목 위까지 소복하게 쌓여 있던 눈은 내가 발을 디딜 때마다 푹푹 꺼졌다.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입학금부터 낼 생각이었다. 가지고 있는 옷 중에 가장 두꺼운 옷만 골라 겹겹이 입었음에도 발바닥 뒤꿈치를 들어 올릴 때마다 앞코가 찢어진 운동화 사이로 쌓인 눈이 들어와 양말 안쪽이 축축하게 젖었고, 무겁기만 하고 바람을 제대로 막아주지 못했던 패딩은 끝이 뭉툭한 깃털이 엉성한 바느질 자국 사이로 튀어나와 볼품없어 보였다. 정문이라고는 따로 없고, 점점 지대가 높아지는 학교 건물까지 낮은 경사로를 따라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걸어가는 동안 조금씩 주변이 환해졌다. 1시간도 채 되지 않는 그 길을 걷는 동안 나는 온통 하얗게 질려 있는 거리에서 조금 울었다. 그건 지금부터는 정말로 모든 걸 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운 마음도, 죄책감도 아니었다. 단지 대상을 명확하게 해두고 싶지 않은 것들을 향한 억울함과 분노가 섞인 원망이었다.
아직 개강 전이라 그런지 학교는 버려진 동네처럼 고요했다. 입학처 표지판이 있는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땐 발등에 쌓인 눈을 털어냈다. 건물 입구는 자물쇠로 단단하게 고정된 채 잠겨 있었다. 직원들이 출근하기엔 시간이 한참이나 남아 있었고, 나는 유리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운동화 끈에 달라붙어 있던 눈덩이를 손톱으로 털어냈다. 속눈썹 위로 이슬이 맺혔고, 흘러내리는 콧물을 닦았다. 그러자 졸음이 밀려왔다. 그건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나는 품속에 가방을 끌어안은 채 조금씩 저항할 수 없는 잠에 빠져들었다. 마지막으로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리자 멀리서 누군가가 우산을 쓴 채 내쪽으로 걸어왔다.
호세였다.
*
N은 내게 ‘마법의 돌’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느냐고 대뜸 물었다. 마법의 돌이요? 좀 전까지 N의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서로의 머리를 기댄 채 한 몸이 되어 있던 커플을 몰래 보던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하자 그는 손가락으로 동그란 모양을 만들어 보이며 다시 한번 마법의 돌이 맞다고, 또박또박 발음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 조합이었기에 웃음까지 나왔는데, 생각해 보면 호세를 아는 사람이라면 마법의 돌이 그렇게 이질적일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N은 이번엔 제 가방 속에서 표면이 해져 보풀이 일어난 파우치 하나를 꺼냈다. 그 속에는 깨끗하게 닦여진 돌이 들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새까만 표면에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 같기도 했다. 이게 뭔가요? N에게서 ‘마법이 돌’이라는 말이 나올 것을 예상하면서도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다시 물었다. 몇 년 전까지 호세 형이 사람들한테 팔던 거요. N이 손바닥으로 돌을 만지작거렸고, 나는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그것은 호세가 사람들을 속여 투자를 받던 것. 언젠가 정말 ‘마법의 돌’로 불리던 것이었다. N은 호세가 그것을 손에 쥐었을 때 뜨거운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스스로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돌. 사람들이 믿은 것은 그것이었다. 애써 힘을 가하지 않아도 끊임없이 자원을 생산해 낼 수 있는 것. 사람들이 호세에게 거액의 돈을 투자한 것도 그 돌 때문이었다고 덧붙였다.
호세 형은 그 돌이 자연이 만들어낸 잭팟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거라고 했대요. 마치 아이슬란드의 온천처럼요. 전기나 화력을 쓰지 않고도 난방 역할을 할 수 있는. 앞으로 차세대 에너지원으로 자신이 개발한 화학 원료가 주목을 받게 될 것이라고. 사람들은 형의 손에 들려 있던 돌에서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대요. 형이 건넨 돌에 정말 뜨거운 열감이 느껴졌었다고…….
N은 손에 든 돌을 꽉 쥐어보더니 다시 손바닥을 펴고 내게 내밀었다. 나는 N이 건넨 돌을 받아 들었다. 돌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가벼웠고, 구멍 난 표면의 오돌토돌한 느낌이 손바닥에 그대로 만져졌다. 그렇지만 뜨거운 열감이 느껴지거나 에너지 원료로는 보이지 않았다.
외계인 주제에 지구인에게 사기를 치다니요. N이 재밌는 농담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껄껄 웃으며 말했고,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가 의아한 듯 나를 바라보자 나는 코를 막으며 대답했다. 화장실 냄새가 좀 역해서요.
N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그는 내게 호세에 대해 정말 알고 싶은 것이 맞느냐고 물었다. 그는 내가 호세 이야기엔 통 관심을 보이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어 그에게 내밀었다. 명함 위에는 ‘이슈메이커’라는 글자가 형압으로 박혀 있었다. 그는 우리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 법한 사건들을 가져와 콘텐츠를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맥거핀 같은 역할을 했다. 그건 생각보다 큰돈을 벌 수 있는 일이었고, 어디에도 진실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오돌토돌하게 튀어나온 로고를 손끝으로 문지르며 잠시 이마를 짚었다. UFO를 이용해 돈을 벌고 있는 것은 맞지만 호세가 외계인이라는 사실은 정말 거짓말이 아니라고 했다. 나는 이번엔 반대편 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손바닥에 만져지는 단단한 카드 플레이트의 촉감을 느꼈다. 그건 오래전 호세의 집에서 몰래 가져온 그의 사진이 박혀 있는 학생증이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손을 떼고는 라떼를 조금 마셨다. 그러자 입 안에 부드러운 커피의 향이 감돌았고, 긴장하고 있던 몸이 조금씩 풀어지는 것 같았다.
저는 형 이야기로 돈을 벌려고 당신을 만난 게 아니라고요.
그는 내 명함을 테이블 위로 반듯하게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내가 쓰지 않은 일회용 물티슈의 포장지를 벗기고는 제 손을 닦았다.
호세 형을 아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고요. 형이 외계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들을…….
N은 줄곧 호세에 대한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멋대로 떠들고 다녔지만 자신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들을 만나진 못했다고 했다. 호세에게 투자를 했던 이들 중 누구도 N이 말에 귀를 기울여준 사람은 없었다. 그동안 N이 만나고 다녔다는 학교의 동창들 역시 호세가 외계인이라는 사실엔 쉽게 동의하지 못하는 듯했다. 애초에 호세의 이름을 듣자마자 이야기를 자체를 거부했다는 말에 나는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몇몇의 얼굴들을 떠올리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럼 일어날까요. 그가 한쪽에 버려두었던 물티슈로 제 입가를 닦으며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 냄새가 조금씩 익숙해진다고 생각할 즈음이었다.
*
호세는 나를 학생회관으로 데리고 갔다. 그는 동아리실에 가는 길이었다고 했다. 건물 안쪽엔 경비 한 명이 뒤통수가 굵은 TV를 틀어놓은 채 졸고 있었다. 호세는 내게 건물 중앙에 놓인 3인용 가죽소파를 가리키며 직원들이 출근할 때까지 저기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 소파 앞쪽엔 전원이 꺼진 석유난로가 놓여 있었다. 그가 난로의 전원 버튼을 누르자 코를 찌르는 석유 냄새와 함께 무엇인가 달달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푹 퍼진 타이어처럼 난로 내부에서 펑 터지는 소리와 함께 조용해졌다.
기름이 없는 것 같은데.
나는 난로의 한쪽에 표시된 기름 표시등에 불빛이 깜박이는 것을 가리켰다. 그제야 호세가 아, 하며 경비실을 살폈다. 기름이 조금 찰랑거리는 빈 석유통을 들고 경비실 쪽으로 가던 호세는 별 수확 없이 내쪽으로 돌아오는 듯했다. 그러나 그가 돌아온 이후 나는 어딘지 모르게 주변이 따뜻해진다는 인상을 받았다. 난로는 여전히 꿈쩍을 하지 않았지만 어디선가 열기가 퍼지는 듯한 느낌. 호세는 난로가 정상 작동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둘러댔고, 나는 그것이 거짓말임을 알면서도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때로 누군가의 비밀을 깊이 알려고 하지 않는 건 어린 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방패막이기도 했다.
마을의 이정표를 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옥수수밭을 지나면 호세의 집이 있었다. 호세의 집은 낮은 산이 감싸고 있는 끄트머리에 있었는데, 아직도 그런 집이 있을 수 있을까 싶은 두꺼운 한지를 덧대어 문을 만들어놓은 초가집이었다. 그래서 여름 장마철마다 비가 억세게 쏟아지는 날이면 호세네 집을 감싸고 있던 흙담이 무너져 그 위로 차오른 물이 골골골 소리를 내며 흐르곤 했다. 호세는 종종 집에서 떨어진 곳에서 연을 날리는 것을 취미로 삼았다. 시내에 볼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종종 버스를 타는 대신 한 시간 거리를 둘러가며 호세네 옥수수밭을 지나쳤다. 그때마다 그는 부러진 나뭇가지 몇 개를 끈으로 묶어만든 물레를 손에 쥐 채 입을 쭉 내밀고는 연을 날려 보내는 데 열중해 있었다. 옥수수밭 사이로 호세의 머리통이 불쑥 튀어나와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호세의 주변엔 기상이변처럼 삼십 도를 아우르는 한여름의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한 번은 옥수수밭의 샛길로 걸어 나온 호세가 나를 불러 세웠다. 그는 대뜸 내게 연을 날려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가 내민 것은 철지난 달력을 뜯어 그 위에 나무젓가락을 쪼개 만든 허접한 것이었다. 그날 나는 시내에 나갈 작정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스키니진을 사 입기 위해서였다. 나는 내가 생각하던 기대치보다 뒤떨어진다는 소리를 들으면 분한 마음을 쉽사리 잠재우지 못했다. 나는 주머니에 넣어둔 지폐 몇 장을 더듬거리며 그가 손짓하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사방이 옥수수잎으로만 둘러싸인 곳에서 나는 호세를 따라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잠자리와 날벌레 몇 마리가 귓가에서 위잉 소리를 내며 가까워지다 멀어지는 사이 나는 호세가 던져놓은 물레의 손잡이를 밟고는 아차, 하며 멈춰 섰다. 바람은 내 정수리를 손바닥으로 찍어 누르듯 묵직하게 불어왔다.
셋을 세면 나는 이걸 들고 네게서 멀어질 거다.
호세가 제 머리 위로 팔을 쭉 펴며 연을 들어올렸다. 신문지를 이어 붙인 연의 꼬리가 흔들거렸고, 나는 팔짱을 낀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내게 장난을 치려고 이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여기서 바람을 타기 시작하면 그 다음엔 모든 건 물레를 쥔 사람의 책임이 될 거야. 실을 너무 팽팽하게 잡고 있으면 이건 높이 날지 못할 거고, 너무 느슨하게 풀어두면 오히려 끌려다니는 꼴이 될거다.
선배. 뭘 그렇게 진지하게…….
이번 학기는 내 등록금을 빌려줄테니,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는 말이야.
호세는 머리가 좋았지만 경쟁하는 법을 몰랐고, 나는 평범했지만 잔머리를 쓸 줄 아는 데다 눈치가 빨랐다. 그래서인지 호세는 늘 기회를 놓쳤고, 나는 남의 것을 빼앗더라도 내 몫을 지키는 편이었다. 호세는 내가 몇몇 교수들의 부정을 눈감아주는 대가로 나보다 성적이 좋았던 동기 몇몇의 장학금을 가로채고 있었다는 사실을 진즉에 알고 있었다.
나는 호세의 말에 오히려 코웃음을 치며 선배나 등신같이 당하고 살지 말라며 충고했다.
호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호세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였다. 호세네 할머니는 호세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년도 되지 않아 지병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늦가을이었는데, 이불 빨래를 하다 잠깐 지쳐 평상에 기대 쉬려던 것이 저세상 가는 길인지도 모르고 영영 일어나지 못했던 것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호세네 할머니를 처음 발견한 것은 산에서 내려온 개 때문이었다고 했다. 배가 고파 침을 질질 흘리며 내려온 개가 집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으르렁거리며 울고 있는 것을, 그 집을 지나 산에 밤을 주우러 가려던 마을 사람이 발견한 것이라고. 이런 경우엔 보통 며칠이 지나 발견되는 경우도 있는데 호세네 할머니는 복이 많아 죽은 지 세 시간도 되지 않아 발견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니까 이만하면 호상이야, 호상. 병원에서 손자 고생도 시키지 않고 한 번에 가버렸으니 호상인 것이라고, 들어 보니 하나 남은 손자가 사람을 잘 믿어 사기를 크게 당해 그걸 메꾸느라 물려줄 재산 같은 건 없을 것이라고, 그날 차를 타고 시골 마을로 들어가는 길에 동행한 선배 중 한 명이 호세네 집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상복을 입은 호세는 키가 크고 머리가 작아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붉은 얼굴에 삼베로 만든 상복은 영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마루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제기 위엔 찐 문어와 생선, 가마솥에 삶은 돼지고기와 집 앞 대추나무에서 따왔을 대추나 사과, 옥수수 같은 것들이 풍성하게 차려져 있었다. 나는 검은색 원피스의 앞자락을 손으로 쥐며 호세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했다. 호세는 나를 본체만체하며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맞절을 하고, 마당에서 소주병과 맥주병을 까는 마을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평소의 호세라면 바닥 위에 날카로운 병뚜껑 하나 놓여 있는 것을 참지 못했을 테지만 호세는 결국 마을 사람 중 한 명이 병뚜껑의 날에 찔려 손바닥을 움켜쥐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정말로 가만히,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선배, 술 했구나.
나는 호세가 앉아 있는 마루의 끄트머리에 앉아 그 애를 등으로 진 채 물었다. 그러자 호세가 내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는 마루 중앙의 디딤돌에 제 발을 올려놓으며 나와 나란히 앉았다. 호세가 움직일 때마다 오래된 마루에서는 찌그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무가 조금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내 옆에 앉은 호세에게서는 옅은 술 냄새가 났다. 나는 호세의 얼굴이 붉은 것이 취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호세네 할아버지는 소문난 애주가였고, 대학 시절 종강 무렵이면 호세가 고향 집에 들러 할아버지의 술친구가 되어주었다는 건 마을에서 잘 알려진 사실이었으니까. 그렇지만 그날 호세는 내가 알던 그 시절의 호세와는 조금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조금. 호세가 손톱으로 마룻바닥에 힘을 주어 긁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런 호세를 훑어보다 한숨을 푹 내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하얀 벽지를 받치는 서까래 사이로 옅은 실금이 그어져 있었다.
내가 너무 바보 같았던 것 같아. 순진하고, 착하다는 말을 칭찬으로 알아들었어. 그래서 이렇게 된 거야.
말을 마친 호세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며 몸을 들썩였다. 나는 근처에 있던 두루마리 휴지를 호세에게 내밀었다.
선배 잘못이 아니야. 그게 진실이지.
나는 몸을 일으켜 거의 다 타들어 간 향불을 새것으로 교체하고는 호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호세야, 밥은 먹었니? 어느새 사람들이 모여 앉은 테이블에서 벗어난 조문객 중 한 명이 호세와 눈을 맞춰 앉은 채 물었고, 호세가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얘, 여태 밥도 먹지 않았던 거야? 그는 호세의 뺨을 매만지다 마루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상을 차리고는 호세 몫의 밥과 국을 가지러 부엌에 갔다.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던 호세가 느릿느릿 말했다.
맞아. 내 잘못이 아닐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선한 마음만으로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것 같아. 너는 내가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지.
호세의 말에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머뭇거리다 내 이름을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향하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그 말이 내내 머릿속에 남았으나 나는 끝내 호세에게 들려줄 수 없었다.
호세가 동창들을 상대로 사기를 치고 다닌다는 소문이 들려온 것도 그즈음이었다. 호세가 고향 사람들의 주머니를 탈탈 털다 못해 빚더미에 앉게 만들었다는 이야기까지.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 소문이 거짓이기를 빌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호세는 내가 알던 호세로 남아있기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빛나는 붉은 머리칼을 가진 멋진 사람으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
골목길을 크게 둘러가며 다시 역까지 가는 길은 인공 장미가 모여 있는 광장을 가로질러야만 했다. 나는 그 광장의 중앙에 있는 시계탑을 바라보다 문득 N이 그것을 탑이라고 부른 것에 피식하고 웃음을 보였다. 그것은 탑이라고 부르기엔 꽤 아기자기한 편이었다. 요즘엔 스스로를 외계인이라고 부르며 유튜브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그런 게 유행이라고 N이 했던 말을 곱씹으며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생각지도 못한 사이 부재중 전화가 두 번이나 와 있었다. 회사 선배로부터 온 연락이었다. 이어 메신저로도 연락이 와 있었다. N을 만났냐는 것부터 호세에 대해 알아낸 것이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나는 가방에서 N에게서 받아 든 마법의 돌을 꺼내 사진을 찍어 선배에게 보냈다.
선배에게 처음 호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나였다. 악의는 없었다. 요즘 서점가엔 SF가 유행이니까. 우리도 외계인에 대한 콘텐츠를 다뤄보면 어떻겠냐는 선배의 물음에 자연스레 호세를 인터뷰할 것을 떠올린 것이었다. 사실 호세가 진짜 외계인이든 아니든 그건 중요하지 않은 것일지도 몰랐다. 우리에게 필요했던 건 사람들에게 마이너가 가진 환상을 채워주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시골에서 살던 외계인이, 열에너지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그 외계인이 어떻게 지구에서 사기를 치게 되었는지 그런 사연 같은 건 너무 거짓말 같아서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사람들은 다만 호세가 다른 행성에서 왔다는 것, 우리와 함께 사는 존재가 아닌 다른 특징을 지닌 존재라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다. 이를테면 주식으로는 무엇을 먹는지, 지구인을 사랑해 본 적이 있는지 같은 시시껄렁하고 무용한 것들.
나는 가끔 호세의 이름을 포털사이트에 검색해보곤 했다. 호세가 그렇게 큰돈을 벌어 어디에 사용했을까. 실제로 호세가 벌어들인 돈은 서울의 가장 비싼 건물 몇 채를 사고도 남을 만큼 큰 액수였다. 내가 마지막으로 호세를 본 이후, 어떤 이들은 호세가 인적이 드문 작은 산을 샀다고도 했고, 또 어떤 이들은 호세가 다른 나라로 날랐다고도 했으며, 또 어떤 이들은 호세가 죽은 것 같다고도 말했다. 그러나 그중에 분명한 사실은 호세가 N이 아는 사이언스 커뮤니티에서 스스로를 외계인이라 주장하고 다니는 이들을 만나고 다녔다는 것이다. N이 그를 아는 것은 한때 그도 외계인을 사칭하며 호세를 만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N은 호세로부터 함께 살던 행성으로 돌아가는 제의를 받았다고 했다. 얼마 못 가 정체를 들키는 바람에 구체적인 계획까지 들을 순 없었지만 그때의 호세는 꽤 진지한 얼굴이었다고 N은 정말로 호세가 외계인이었던 것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아니라고 말할 땐 정말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왜냐하면 그때 형이 매우 실망한 얼굴을 했는데, 사실 처음엔 호세 형이 나 같은 코스프레를 하는 거라고 생각해서 공통의 관심사를 공유할 수 있는 친구를 만들고 싶었던 거였거든요. 그런데 너무 진심으로 지구를 떠나자고 얘기하니까……. 그리고 마트 앞에서 다시 마주쳤을 때, 그 형은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닌 것 같았어요. 그러니까 아마도…… 무언가를 완전히 포기한 것 같은 사람의 얼굴.
마법의 돌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장미를 둘러보는 사이 선배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그래서, 호세인지 호수인지 그 사람 섭외는 되는 거고? 나는 선배에게 아무래도 안될 것 같다고 답장을 보내고는 역 입구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백색으로 빛나던 인공 장미 중 하나가 파바박 소리를 내며 옅게 불꽃이 튀더니 힘없이 불이 꺼져버렸다. 나는 전구가 깨진 꽃 위로 언젠가 호세의 숨결이 닿았을지도 모르는 마법의 돌을 올려놓았다. 그래도 여전히 그 자리는 움푹 패인 구덩이처럼 어둠으로 푹 꺼져 있었다. 우리가 정말로 미안해.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그곳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