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수지는 영숙이 주저앉는 모습에 걸음을 멈췄다. 영숙은 마치 영양가도 없이 배만 튼실하게 살이 찐 새 같았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고스란히 밀려나는 꼴이며, 무릎에 힘이 빠지는 듯 발목을 덜렁거리며 걸어가는 모습까지. 그건 마치 산란기에 밀렵꾼의 자비로 날개 한 쪽을 잘린 후 방향감을 상실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수지는 영숙이 손등으로 인중에 맺힌 땀을 닦아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영숙의 이마는 이미 흥건해진 땀으로 번지르르했다. 머리카락을 타고 흐르던 땀은 뚝뚝 떨어질 때마다 딱 달라붙은 영숙의 티셔츠 위로 짙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는 아직 한참이나 남았건만 영숙의 눈은 벌써 반쯤 풀려 있었다. 수지는 일부러 마른 기침을 하는 척 침을 꿀꺽 삼켰다. 영숙을 보고 있으면 오래전부터 알 수 없는 갈증이 자꾸만 밀려왔다.
수지는 주머니에서 간식을 꺼내 영숙에게 내밀었다. 겉면이 초콜릿으로 코팅된 수제 파이였다. 영숙은 몇 차례 주저하다 손을 뻗었다. 영숙 역시 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닦는 수지를 보고 있었다. 영숙은 파이를 반으로 쪼갰다. 자, 너도 먹어 둬. 영숙의 손에는 반쯤 녹은 초콜릿 코팅이 손톱 밑까지 묻어 있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수지가 휴지를 찾듯 배낭 깊숙이 손을 넣고 휘적거렸다. 그러자 영숙이 괜찮다는 듯 팔꿈치로 수지를 툭 쳤다.
조금만 더 걸으면 도착이라지 않니.
반대편 길목에서 몇몇 사람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폭포 쪽에서 내려오는 듯했다. 선글라스를 대충 머리에 걸쳐둔 채 나뭇계단을 따라 내려오던 무리는 하나같이 머리카락과 옷이 조금씩 젖어 있었다. 아니 산행 막바지에 조금씩 마르고 있었던 것인지도. 영숙은 근처 나뭇잎에 제 손을 대충 문질러 닦고는 열이 오르는 듯 손부채질을 했다. 수지가 먼저 일어나 앞서 걷기 시작했다.
넌 젊어서 좋겠다. 오르막길 앞에서 주저하질 않으니.
영숙의 말에 수지가 픽 웃으며 제 얼굴을 영숙의 코앞까지 들이밀었다. 그리고는 전날 저녁부터 간헐적으로 파르르 떨리던 눈가를 가리켰다.
아주머니, 저도 늙어요. 이미 눈 밑에 다크서클보다 돋보이는 주름이 생겨 버렸다고요. 주근깨라고 부르기엔 청승맞아 보이는 기미는 또 어떻고요. 처음엔 여드름처럼 이러다 사라지겠거니 했는데, 쓰고 있던 로션을 몇 만원 더 비싼 걸로 바꿨는데도 한 번 생긴 주름이 도무지 지워지지가 않아 미치겠어요. 이건 정말 진주 말이 맞았어요. ……흉터와 주름은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거요.
수지는 영숙에게 얼른 일어나라는 듯 손을 뻗었다. 영숙은 오래간만의 산행이 체력에 부치는지 하산 중인 등산객들을 마주할 때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더 걸어야 하느냐고 보채곤 했다. 수지는 매년 그런 행동을 하는 영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늘 달랐을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주제넘게 상대를 고려하지 않고 각자의 시선에서 자신이 걸어갔던 길에 대해 이야기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겐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마른 낙엽을 밟는 일보다 쉬웠을 테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타고난 감각과 주어진 환경, 그리고 과학적으로는 전혀 예측할 수 없을 정도의 운이 따라주어야 했을 테니까. 그걸 알면서도 의지가 약한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잊어버린 듯 이미 도달한 이들의 같잖은 영웅담을 좇으며 뭐라도 주워 담기 위해 달려들곤 했다. 이미 몰려든 사람들이 흔적을 남기듯 피워 놓은 바람의 방향이라도 맞춰 걸으려는 영숙처럼. 그러나 결국 사람들이 가늠한 거리는 같지 않았기에 두 사람이 나아가야 하는 길에 대해 알아내는 것 역시 그들 자신의 몫이었다.
산을 중간 정도 올랐을 때에야 수지는 물병을 챙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날 수지는 영숙과 한 방에서 밤을 보내는 바람에 늦은 새벽까지 잠들지 못했다. 평소 착실히 계획을 세우고 꼼꼼하게 스스로를 챙기는 수지였지만 전날만큼은 온종일 멍한 얼굴이 되었다. 그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숙은 협탁을 사이에 두고 바로 옆 침대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영숙은 정말 잠들었던 걸까. 전날 터미널에서 희미하게 웃어 보이던 영숙의 얼굴을 떠올리며 수지는 하필 진주의 기일이 한여름인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 때문에 매년 산을 올라야 하는 것도. 영숙은 앞으로 더 늙어갈 것이다. 진주의 유언은 영숙에게 주어진 시간을 고려하지 않은 것 같았다.
*
수지가 처음 영숙을 마주한 날도 한여름이었다. 수지는 더위를 잘 견디지 못하는 편이었다. 며칠 동안 비가 내린 다음 날이었는데, 유독 먹구름이 껴 있었던 데다 기온은 한층 더 높아져 숨을 내쉬는 것조차 갑갑하게 느껴진다고 생각하는 날이었다. 그러니까 그 한여름에, 더위를 피해 시원한 바람을 맞겠다고 진주를 따라간 곳에서 수지를 맞이하고 있던 것은 끈적끈적한 수증기. 집안 전체가 꿀물에 한참을 담가둔 뒤 건져낸 것처럼 달큰한 냄새가 벽지 표면에 배어있던 진주의 집이었다. 수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밤을 삶고, 으깨고, 둥글게 휘젓고 있는 영숙의 정성부터, 그것이 익숙하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수지를 맞이하는 진주의 행동까지. 수지는 그날 손바닥만 한 유리병 속에 갓 만든 밤쨈을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해 냉장고에 식은 밤쨈을 넣어둘 때까지 손바닥엔 밤쨈에서 전해지던 열기가 식지 않고 뜨뜻미지근하게 계속되는 듯했다. 수지는 그런 걸 좋아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자신의 생각을 확실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마음을 걸어두는 듯한 진주처럼.
영숙은 수지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어른 중 한 명이었다. 그러니까 매주 열 마디 이상 대화를 해 본 어른. 부모님을 떠올려야 하는 상황이 생길 때마다 수지는 막연하게 영숙을 떠올렸다. 그렇다고 해서 영숙이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당시 수지의 사정을 영숙이 알았던 것도 아니었지만 어찌 됐건 수지는 어른의 이미지를 생각할 때마다 어렴풋이 영숙의 몽타주에 대입하곤 했다.
그렇지만 수지는 영숙을 특별히 친밀하게 느낀다거나 진주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는 것은 또 아니었다. 수지와 진주, 두 사람은 모두 사람이 많은 번화가를 피하는 편이었으며, 답답하고 무거운 지하철을 타는 것을 싫어했지만 수지와 다르게 진주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었다. 누군가 자신에게 관심을 주는 것을 선호하진 않는다는 것에서 공통점이 있었지만 진주는 적어도 자신을 알고 있는 타인에게는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는 데 애쓰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면이 있었다. 그런 건 진주가 무의식적으로 영숙을 따라 하는 모습 중 하나였다. 영숙은 수지에게 늘 좋은 모습만 보여주었다. 스터디를 이유로 매주 현관문을 두드려야 했던 진주의 집에서 시간이 늦어져 영숙의 퇴근 무렵에 다다르면 수지는 일부러 풀어내기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답안지를 봐도 이해가 어려운 문제를 꺼냈다. 영숙의 퇴근 시간은 일정하지 않았다. 일곱 시에서 아홉 시 사이. 어떤 때에는 그 시간보다도 오래 걸리는 편이었는데 진주에게 듣기로는 열한 시를 넘겨서 들어올 때도 있다고 했다.
영숙과 얼굴을 마주할 때면, 영숙은 늘 수지에게 저녁을 먹고 가라고 권유하는 편이었고, 수지는 그것이 진심이 담긴 제안이 아님을 알면서도 현관 앞에서 신발을 벗고 어깨에 둘러멘 가방끈을 풀고는 곧장 식탁 위로 올라가 평소라면 먹지도 않았을 밥알을 꾸역꾸역 씹어 삼켰다. 그런 행동을 한 첫날 수지는 영숙의 얼굴에 스친 한 줄기의 당황한 기색을 보고 내심 즐거워했다. ‘봐요, 빈말 같은 걸 예의와 배려하고 생각하는 건 성장하는 데 아무런 쓸모가 없지 않나요? 그건 단지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고 싶은 마음에만 머물러 있는 위선 같은 거지. 어른이 된 지 오래된 사람들이 쉽게 가지고 버릴 수 있는 가벼운 사치 같은 것. 그러니까 다들 애초에 내게 좋은 사람이 아닌 것처럼 굴어. 그렇지 않다면 난 그걸 경멸할 거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수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수지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듯한 과한 친절, 자신이 좋은 사람인 걸 증명하고 싶어 하는 그런 과시적인 배려를 좋아하지 않았다. 보통 수지가 그런 식으로 어른들을 대할 때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지가 듣지 못하는 곳에서 꼭 뒷말을 떠들곤 했다. 수지가 선택하는 단어, 말투, 표정, 자세에 대해서. 심지어는 앞으로의 인생이 파란만장하고 남들보다 운이 따라주지 않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며 눈썹숱부터 귓불의 길이까지 모조리 평가하는 이도 있었다. 수지의 면전에서는 절대로 하지 못하는 말들이었다. 그러니까 그건 비공식적으로 자신에게 그어진 경계선 같은 것이었다. 적당한 이유를 둘러대진 못하지만 색안경에 의해 걸러지는 진심들이 그 속에 담겨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수지는 그걸 확인해야만 마음이 놓였다. 자신에게 보내지는 일말의 온정이나 친절이 정말로 순수한 마음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면 그건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야 자신이 마음을 놓고 세상 모든 것들을 미워하고 괴롭혀도 죄책감이 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영숙을 보아온 몇 년의 시간 동안 오히려 마음에 조금씩 균열이 일어난 건 수지였다. 영숙은 수지가 자정 무렵의 늦은 밤까지 머무는 날이면 회백색으로 허옇게 뜬 화장을 지우지 않은 채 직접 차를 운전해 집에 데려다주었다. 그게 너무 분하고 화가 나서 수지가 재차 거절을 하다못해 입술을 앙 물고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을 때면 영숙은 오히려 당황한 얼굴을 해 보이며 덧붙였다.
아, 우리가 너무 늦게 도착했구나.
함께 저녁을 먹는 횟수는 점점 늘어났다. 저녁 반찬은 첫날부터 수험생활을 마쳤던 마지막 날까지 대체로 비슷했다. 백김치에 콩자반, 그리고 간장을 넣어 졸인 일본식 무조림. 가끔가다 우동이나 카레라이스 같은 메뉴가 식탁 위에 올라오기도 했지만 대체로 고춧가루가 없는 달콤하고 느끼한 반찬이 대부분이었고 결정적으로 진주는 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했다. 대신 올리고당을 듬뿍 올린 약밥이나 밤쨈, 직화 냄비에 구운 고구마 같은 달콤한 걸 유독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사람이 이렇게 단것만 먹으면 고통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 싶은 수준이었다. 수지는 두 사람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들의 입맛을 닮아보려고 한때 애쓰곤 했지만 역시나 그것만큼은 무리였다. 라면과 떡볶이 같은 자극적인 맛에 너무 오래 길들여진 탓이었다. 그런 이유로 수지는 가끔 몸살이 나거나 며칠 음식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할 때에 입안에 감도는 단맛을 느낄 때면 영숙을 떠올렸다. 영숙을 생각하면 이상하게도 자꾸만 침을 삼키게 되었고, 예정에도 없던 갈증이 느껴졌다. 그건 진주와는 공유한 적 없는 오직 수지만의 것이었다.
*
해가 들지 않는 바위틈 아래엔 짙은 녹빛의 이끼가 무수히 깔려 있었다. 수지와 영숙, 두 사람이 앞서간 사람들을 따라 올라갈수록 이끼 낀 바위의 수가 늘어났다. 영숙은 어쩌다 바위에 몸을 기대면 한쪽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영숙은 얼굴을 찡그리며 어깨를 털었다. 수지는 영숙의 느린 속도를 참지 못하고 먼저 앞서나가다가도 얼마 못 가 다시 영숙의 주변을 맴돌 듯 되돌아왔다. 수지는 제 몸집만 한 바위 사이로 발을 밀어 넣다가도 자꾸만 뒤를 돌았다. 이미 바위 위쪽에 자리를 잡고 앉은 중년 부부가 두 사람을 바라보며 실없이 웃었다. 깎아지른 절벽을 바로 코앞에 두고 평평한 면의 한 자리에서 그들은 저를 향해 불어오는 바람을 마주하며 챙겨 온 간식을 먹고 있었다. 영숙은 입안을 채우고 있는 단내가 불쾌하게 느껴졌다. 수지가 건넨 간식들은 평소였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영숙은 이제 그런 음식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바위틈을 지나자 다시 흙길로 다져진 평지가 펼쳐졌다. 수지는 울창한 나무가 빼곡히 들어찬 숲길 앞에 서서 뒤따라오는 영숙의 늘어진 그림자가 천천히 줄어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수지가 생각하기에 목적지까지 도착하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은 것 같았다.
앗, 이게 뭐니.
영숙이 손바닥으로 한쪽 뺨을 닦아내며 말했다. 영숙은 조금 전에 제 얼굴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고 했다. 영숙의 말에 수지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아침만 하더라도 흐릿했던 날씨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맑고 화창했다. 뽀얀 비누 거품 같은 구름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지만 어디에도 비가 올 것 같은 낌새는 없었다. 수지는 허공에 손바닥을 펴 보이며 한참을 서 있었다. 그 사이 수지에게 건네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영숙이 수지가 멈춰 선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굽은 길 너머로 사라졌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수지가 가방을 고쳐 매고는 영숙이 걸어간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같이 좀 가요!
수지가 영숙을 향해 소리를 지르자 그제서야 영숙이 뒤를 돌아보았다. 영숙은 챙이 넓은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비는 아닌 것 같은데요.
수지가 손바닥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진짜 하늘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는데. 수지의 말에 영숙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제 뺨을 만지작거렸다. 수지는 영숙의 눈앞에 휴대폰을 내밀며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의 일기예보를 보여주었다. 아침만 해도 비가 올지도 모른다는 예보가 있었지만 현재는 비는커녕 날이 점점 개는 데다 심지어 폭염에 대비해야 할 것 같다고 쓰여 있었다.
어디서 이슬이라도 떨어졌나 보죠. 비는 아니에요, 확실해요.
수지가 무심하게 뱉은 말에 영숙이 무안한 듯 괜히 모자를 벗고는 제 머리를 한 번 더 털었다. 영숙이 입고 있던 옷은 이미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영숙은 몸에 바짝 달라붙은 티셔츠를 떼어냈다. 햇빛이 내리쬐는 구간을 지나 비교적 조도가 낮은 곳으로 들어서자 좀 전에 흘렸던 땀은 되려 영숙의 몸을 차갑게 만들었다. 영숙은 매년 여름 심한 감기에 걸려 고생을 했던 진주를 떠올렸다. 진주가 땀을 많이 흘렸던 건 영숙과 닮은 면 중 하나였다. 물수건을 머리에 올려놓으면 열이 끓다가도 금세 몸이 차가워졌다. 그해 여름엔 감기에 걸렸을까. 감기에 걸렸더라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라고 영숙은 생각했다. 자신이 아프다는 걸 알아채지 못하는, 아니 스스로의 마음을 두루 살피지 못할 정도로 둔한 딸이었으니까.
평지를 지나자 이번엔 내리막길이 이어졌다. 정상까지는 이제 반쯤 남은 것 같았다. 영숙은 그 사실에 안도했다. 정상에 점점 가까워진다는 것에. 그러나 정상에 다다를수록 그게 문제였다. 산을 생각하면 무한히 오르는 행위만을 떠올리겠지만 막상 길을 걷다 보면 평지와 완만한 내리막길이 지겹게 이어지다 어쩌다 한 번 가파른 절벽과 숨조차 쉬기 어려운 수백 개의 계단이 등장하는 식이었다. 산을 오르는 일은 늘 그랬다. 영숙은 고개를 들고 제 앞으로 펼쳐진 계단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계단 옆은 울타리로 경계를 만들어 놓은 위태로운 절벽이었다. 멀리 맞은편에는 제 몸체만 한 바위가 듬성듬성 박혀 있었다. 바위 아래 틈에는 이끼와 젖은 낙엽들이 끼어 있었다. 그 옆에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헝클어진 머리카락처럼 엉켜 있었다.
처음 진주가 수지 너랑 떠난다고 했을 때 말이야. 아마 난 네 그 꼼꼼하고 단단한 모습에 의지를 했던 것 같아.
영숙이 허리에 손을 얹은 채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수지가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수지는 영숙의 주먹 쥔 손을 바라보았다. 꽉 쥔 주먹으로 허리를 누르자 헐렁한 겉옷에 주름이 잡히며 불룩 튀어나온 살이 도드라졌다.
의지요. 저한테 의지를 하셨다고요.
수지의 물음에 영숙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비쩍 마른 나뭇계단 위로 영숙의 땀이 방울지며 떨어졌다. 수지는 영숙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의지라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넌 네가 생각하기에 인정할 수 없는 것을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사람이지 않니. 그걸 꼭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그렇지 못하면 상대가 오히려 민망해질 때까지 티를 내는 사람이지 않니. 널 봐온 시간이 벌써 십 년이 넘었다. 내 딸은 아니지만 네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지 않겠니.
계단을 반쯤 올랐을 때 영숙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았다. 영숙은 손바닥으로 무릎을 감싼 채 계단에 걸터앉아 있었다. 층계의 폭이 좁아 뒤를 따라 오르던 사람들이 영숙을 지나쳐 갈 때마다 길을 터주어야 했다. 영숙은 밧줄로 고정해 놓은 펜스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수지 역시 가던 길을 멈추고 영숙의 뒤에서 그녀의 옷깃을 붙잡은 채 구부정하게 서 있었다.
금방 해가 움직일 거예요. 서둘러야 해요.
잠시만 쉬자, 조금 힘들어서 그래.
이미 많이 늦었어요. 봐요, 다들 내려오고 있잖아요.
다 왔다고 하지 않니.
아주머니는 그 말을…… 정말로 믿으세요?
수지의 말에 영숙이 고개를 들었다. 영숙은 수지가 아닌 끝이 없이 이어지는 계단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지는 종종 영숙이 지나치게 너그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상대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눈치채고서도 일부러 속아 넘어가 주는 사람. 그것을 자신이 베풀 수 있는 최소한의 연민과 동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수지는 그것을 모멸감으로 받아들였다. 수지는 영숙이 자신에게까지 그런 모습을 보여줄 때마다 그의 마음을 힘껏 괴롭혀주고 싶었다. 몹시도 악의적으로. 그때 수지에게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꽤 오랫동안 지속된 문제였다.
*
생각해 보면 정말로 진주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사람은 영숙이 아닌 수지 자신이었을지도 몰랐다. 낯선 타국에서 진주와 함께 살았던 삼 년 동안 수지는 진주가 매번 자신에게 얕은수가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보다 마음이 더 무거웠던 건 평소 진주를 대하는 자신의 태도 역시 이미 거짓된 마음으로 몽우리 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지는 진주를 몹시도 떠나고 싶었다. 영숙만 아니었다면 벌써 떠나고도 남았을 것이다.
낮에는 레스토랑의 주방에서 뒤처리를 하고, 일이 끝난 후엔 수업을 듣고 늦게나마 귀가했던 그 집은 부엌과 거실 겸 방이 미닫이문으로 구분되어 있던 원룸이었다. 자세를 돌려 누울 때마다 찌그덕거리는 소리가 묘하게 차갑고…… 또 낯설게 들렸던 싱글사이즈의 벙커 침대 두 개가 두 팔을 벌린 너비만큼의 창문 옆에 딱 달라붙어 있었고, 원목으로 만들어진 캐비닛, 그리고 가로로 40센티미터도 채 되지 않아 보이는 테이블 두 개가 대각선 방향으로 마주 보고 있었다. 그 집은 창문을 열면 바로 옆집의 벽을 손바닥으로 훑을 수 있을 만큼 가까웠다. 옆집은 다홍빛 벽돌을 층층이 쌓아 올린 뒤 노란 페인트를 여러 번 덧칠한 것처럼 보였는데, 유독 지저분한 자국이 눈에 띄었다. 두 사람의 집은 옥상 바로 아래에 위치해 있어 주말 점심이면 담배를 피우러 나온 또래의 남자애들이 매일 귀퉁이의 삽화를 몰래 찾아 읽는 일간지 신문을 꺼내듯 내려다보곤 했다. 그 집은 매달 월세의 칠십 퍼센트를 진주가, 아니 실은 영숙이 더 많이 부담했었다. 함께 사는 동안 수지는 때때로 진주의 사소한 성격 같은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를테면 요리를 할 때 창문을 열지 않는다거나, 카펫에 쏟은 와인이 천천히 스며들며 결국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남을 때까지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다거나 흡입구가 고장 난 청소기를 고치기는커녕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계속 쓰는 것 같은 행동들이었다. 어쩌면 끝내 진주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는지도. 그건 영숙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수지는 한때 진주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진주 같은 종류의 나약한 인간은 이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수지가 보기에 진주는 어린아이 같이 구는 면이 있었다. 보기와 다르게 아둔한 면이 있는 친구였으니까. 이를테면 길을 걷다 실수로 넘어졌을 때, 수지가 무릎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걸어가는 편이었다면 진주는 그 자리에서 다짜고짜 울음부터 터트리는 사람이었다. 함께 들었던 수업에서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 수지가 도서관에 들어가 해결점을 찾을 때까지 나오지 않는 편이었다면 진주는 수업에서 만난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부어라 마셔라 하기 바빴다. 수지는 그런 태도는 딱 질색이었다. 수지는 그때마다 진주의 게으름을 꾸짖었고, 진주는 수지의 몰인정함에 질색했다.
수지는 진주가 종종 영숙에게도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수지가 조금 더 깨끗하고 위치가 좋은 곳으로 이사를 하기 위해 모아둔 돈을 세고 있을 때, 진주는 매달 돈이 부족하다고 말하며 영숙에게 볼멘소리를 했다. 꼭 필요한 책이 있다. 운동화 앞코가 찢어졌다. 기온이 작년 보다 올라 전기세가 모자르다. 진주가 영숙과 통화를 하는 날이면 수지는 매트리스에 누워 베개에 얼굴을 더 깊이 파묻었다. 만일 자신에게도 영숙 같은 존재가 있었다면 진즉에 이런 고생은커녕, 지금보다 더 나은 환경에서 지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수없이 상상하곤 했다. 진주가 얄밉다고 생각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지금도 가끔 천이 두꺼운 암막 커튼을 마주하면 언제고 그때 느꼈던 마음들이 되살아났다. 특히 늦은 아침에 새어 들어온 햇살의 한 줄기 위로 작은 먼지가 폴폴 피어오르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 기억은 조금 더 선명해진다.
영숙은 통화 끝에 진주에게 수지의 안부를 묻곤 했다. 수지도 잘 지내고 있지. 그러면 진주는 발끝을 세워 수지의 침대 가까이로 살금살금 다가가 잠든 척 눈을 질끈 감고 있는 수지를 흔들어 깨웠다. ‘수지는 자. 늘 그렇지 뭐. 아 진짜 수지가 옆에 있는 거 맞다니까. 진짜야.’ 진주의 목소리는 벌건 대낮에 실수로 날아든 배구공터럼 엎드려 누운 수지의 한쪽 얼굴을 자극했다. 그 때문인지 다음 날이면 눌려 있던 얼굴이 발갛게 부어있던 자국은 유난히 쉽게 가라앉지 않는 것 같았다. 언젠가부터 수지는 영숙과의 대화를 피하기 시작했다. 영숙이 자신을 통해 진주가 애써 말하지 않는 것들을 꿰뚫어 보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지는 그런 게 정말정말정말 싫었다. 누구도 바라지 않았는데 혼자 마음을 내어 주고, 혼자 실망하며 민망하게 그것을 거둬들이는 것을. 오랫동안 기대하고, 기다리고, 기억하다 결국 기만당하는 것으로 외롭게 끝을 맺는 것을.
수지는 영숙이 거짓으로 자신에게 마음을 내어 주는 척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수지는 그런 것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실은 몹시 귀찮고 싫으면서, 대체로 관심을 가지고 친절한 척 구는 종류의 사람들. 거짓말쟁이들. 그런 사람들은 수지가 실수를 저질렀을 때도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가르쳐주지 않았다. 멋을 부리겠다고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나왔을 때 야유하지 않았고, 처음 방문한 집에서 허락도 없이 냉장고 문을 열어보거나 함부로 물건에 손을 댈 때 불쾌감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눈에 띄는 곳에서 교복 차림으로 손에 담배를 든 채 서 있어도 나무라지 않았다. 그저 어색한 웃음을 짓는 것으로, 아니면 자신에게 소중한 것들을 말없이 멀리 떨어뜨려 놓는 것으로 수지를 배려했다. 수지는 그런 친절이 미량으로도 자신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는 독이라고 생각했다. 수지는 그런 사람들을 한눈에 알아봤다.
진주는 이미 7년 전에 죽었다.
수지가 다른 도시로 이사를 한 지 육 개월쯤 됐을 때였다. 한겨울에 이사를 했으므로 진주의 죽음을 떠올리면 수지가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은 한여름의 숨 막히는 습도와 잔뜩 성이 난 열기였다. 하지만 진주가 죽어버린 계절은 겨울, 극지방과 가까워 꼬박 하루 동안 해가 지지 않는 무렵이었다. 여름에도 선선한 날씨가 이어졌고, 주기적으로 비가 내리는 지역이었다. 잠깐 동안 손끝에 닿았던 진주의 유골함은 그렇게 서늘했는데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수지가 맞닥뜨린 것은 몇 시간 만에 마주한 구구절절한 여름. 영숙은 수지를 보자마자 입고 있던 제 가디건의 매무새를 괜히 더 다듬었다.
거긴 계속해서 겨울이었다며, 춥게 입었네.
영숙이 수지가 걸치고 있던 카멜색 핸드메이드 코트를 보며 말했을 때 수지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이다 조금 울었다. 그건 한국을 떠나기 전 영숙이 수지에게 사준 것이기도 했다. 종종 진주가 입을 때도 있었는데, 소매 끄트머리에 갈라진 자국은 숙소 계단을 오르다 굴러 떨어진 진주가 남겨 놓은 것이기도 했다. 진주는 늘 어디서든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영숙과 함께 진주의 집을 정리했던 삼일 동안 수지는 진주의 짐이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르다는 인상을 받았다. 마치 다른 사람의 집을 몰래 들어온 것만 같은 정도였는데 진주는 마치 오래전부터 멀리 떠날 것을 계획한 사람처럼 집 안을 깨끗하게 정리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수지와 살 때와는 전혀 다른, 방 안의 풍경은 전혀 진주의 공간 같이 느껴지지 않아 함께 살았던 공간임에도 낯설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수지는 내내 영숙의 눈치를 살폈다. 진주의 죽음을 일주일이나 지나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차마 영숙에게 말할 수 없다는 것보다, 진주와 따로 살고 있으면서 영숙에게 거짓말을 해오고 있었다는 걸 말해야 하는 것이 더 슬프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진주와의 사이가 진즉이 멀어졌다는 걸 인정한다면 영숙의 연락을 더 이상 받을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에. 다만, 그때 수지가 영숙에게 보여준 태도는…… 어딘가에 대가 없이 자신을 생각하고 기다려줄 사람이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나온 미련 같은 것이었다.
수지가 처음 진주에게 이사계획을 밝혔을 때 진주는 수지가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생각보다 순순히 상황을 받아들였다. 수지는 만일 진주가 저에게 매달린다면 한 번쯤 포기하고 조금 더 시간을 보낼 생각도 있었다. 진주는 저와 달리 함께 있어도 외로움을 많이 느끼는 사람이니까. 혼자서 무엇을 해내는 것에 쉽게 겁을 먹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러나 당시 수지는 진주가 자신이 무력하고 우스운 꼴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묘한 자존심을 세우며 입을 꾹 다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진주는 이곳에서 두 번의 연애를 실패했고, 그중 한 번은 수지가 직접 나서 상대에게 대차게 매달리는 진주를 떼어내기도 했다. 수지가 생각하기에 진주는 마음을 너무 쉽게 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영숙과 닮은 점일까. 영숙은 매번 수지에게도 따로 연락해 안부를 묻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밥은 잘 챙겨 먹고 있는지. 그곳은 겨울이라는데 온수와 난방은 잘 가동되고 있는지. 그래서 언제쯤 돌아올 예정인지. 진주는 마음을 잡고 일과 공부에 매진하고 있는지 같은. 그때마다 수지는 그렇다고. 자신에게 묻는 질문에 답하는 것처럼 전하곤 했다. 영숙은 수지의 말에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뜸을 들이다가 알겠다고 했다. 대화의 말미엔 수화기 너머로 뜨뜻미지근한 온도의 한숨이 천천히 깊게 느껴지는 듯했다. 사실 진주는 사나흘에 한 번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 일이 잦았고, 함께 어울려 다니는 친구들로부터 건네받은 담배에선 전에는 맡지 못한 냄새가 나는 듯도 같았다. 수지는 내내 벗어나고 싶었다. 구질구질한 과거는 한국에서의 시간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 더 이상 아주머니한테 거짓말 못 해. 그러니까 아주머니 생각해서라도 좀 제대로 지내.
수지가 마지막으로 챙겨 둔 가방을 손에 쥔 채 진주에게 했던 말이었다. 수지 한 사람의 이삿짐을 모두 덜어내자 진주의 방은 한쪽 모서리가 뭉개진 그림처럼 어색하게 보였다. 수지가 이삿날을 잡은 후로 두 사람은 조금 어색해졌다.
하나만 부탁할게.
현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신발을 신는 모습을 보던 진주가 수지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진주의 그림자가 수지의 앞으로 드리워지는 동안 수지는 일부러 신고 있던 운동화 끈을 모두 풀었다. 진주는 수지의 뒤에서 팔짱을 낀 채 수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엄마한테는…… 네가 야간근무를 시작했다고 말했어. 엄만 수지 네가 같이 간다고 해서 여기 허락해 준거거든.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진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부엌 찬장에서 쇼핑백 하나를 꺼내 수지에게 내밀었다. 밤쨈이었다. 몇 달 전 진주가 베이커리에서 사 온 밤 쨈을 수지는 스스로도 인정하기 싫을 만큼 맛있게 먹은 기억이 있었다. 수지는 뒤를 돌아 진주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진주는 수지가 아닌 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머니가 금방 눈치채실 거야. 너가 더 잘 알잖아.
그래도 혹시나 네게 전화를 걸어오면 걱정하지 말라고 한마디만 해줘. 엄마들은…… 괜히들 그러니까.
진주가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 실수했다. 진주는 수지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수지가 제일 민감하게 생각하는 말을. 그러나 수지는 진주로부터 미안하다는 말을 들었다는 데 마음이 더 쏠려 있었다. 진주가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조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줄곧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동안 영숙을 이용해 마음을 건드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괘씸하게 느껴졌다.
나 밤 쨈 안 좋아해. 그리고 이런 거 살 돈 있으면 아주머니한테 징징거리지나 마. 좀 보기 그래.
수지는 들고 있던 쇼핑백을 진주의 발치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진주가 몸을 반쯤 돌려 손바닥으로 눈매를 만지작거렸다.
마지막까지 꼭 그렇게…… 너도 똑같아. 날 둘러싼 사람들은 하나같이 진심은 없고 상처만 주더라. 나 사실 다 알고 있었어. 너도 처음부터 나한테 그랬지. 나한테는 관심도 없고, 실은 우리 엄마 때문에 내 곁에 있었던 거지. 내 옆에 있으면 엄마가 네 걱정도 해주니까. 근데 원래 끝까지 징징거릴 수 있어서 가족인 거야. 넌 절대 모르겠지만.
수지는 진주의 우는 모습을 보자 불쑥 화가 치밀었다. 수지는 진주가 줄곧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데 화가 났다.
그럼 내가 너한테 응원이라도 해줘야 하니? 가뜩이나 짐도 많아 죽겠는데, 억지로 웃으면서 받아 가야 해? 지금 네가 구질구질하게 구는 게 눈에 빤히 보이는데? 난 그런 거 싫어. 착각하고 있나 본데, 지금 더 불쌍한 건 내가 아니라 너야. 네 기분 맞춰주는 사람들? 위로랍시고 뱉는 달콤한 말들? 다 거짓말쟁이들이야. 걔네들은 적어도 지들 잇속 챙기면서 좋은 사람인 양 굴어. 넌 들러리처럼 당하는 거고. 아주머니가 너 챙기는 거? 바보야. 그거 네가 등신 같다는 말이야. 정신 좀 차려. 네가 조금 편해지면, 아주머니는 불행해져. 그러다 점점 지치면 네 존재 자체에 대해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지. 가족이란 건 그런 거 아니니? 서로가 서로에게 쓸모없는 골동품을 소중하게 여기는 척 앞다투어 맡으려는 그런 사이.
……너 진짜 못됐다.
어쨌든 다행이지. 이 집에서 난 니가 제일 버리고 싶은 짐이었거든.
수지는 다시 몸을 구부린 채 운동화 끈을 매듭지었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매듭이 풀리지 않기를 바라며 평소보다 세게 묶어 발등이 뻐근해짐을 느꼈다. 사실은 버리고 싶은 짐이 아닌 남기고 싶은 비밀이 진주에게 있었다고 그때 말했어야 했다. 그러나 수지는 진주가 일부러 자신을 붙잡지 않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진주의 거짓말이 사실은 그것이었다는 것을.
*
마침내 목적지인 산의 정상에 도착했을 때, 수지는 그동안 들이마시기만 했던 잔숨들을 한 번에 몰아쉬었다. 주변은 언제 흐려졌었냐는 듯 밝아졌다. 잠깐의 시간을 보내고 내려오자마자 들른 계곡 주변에는 몇몇 사람들이 돗자리를 펴고 누워 있거나 튜브에 바람을 채워 넣으며 한창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누군가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고 있는지 한쪽에서는 익숙한 멜로디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영숙은 내내 끈적끈적해 얼른 씻어내고 싶다던 손바닥을 물속에 푹 담갔다. 집채만 한 바위 위에서 대충 팬티만 입은 남자가 입과 코를 막으며 수직으로 떨어졌다. 남자가 떨어지던 순간 잔잔하던 계곡물에 큰 파동이 일며 남자들 주변으로 동그랗게 물결이 일었다. 몇 초간의 정적. 남자의 일행으로 보이는 이들이 그 잠깐의 순간 동안 남자가 사라진 쪽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고, 그중 몇몇은 낄낄거리며 기괴하게 웃었다. 남자는 얼마 되지 않아 푹 젖은 머리카락을 수면 위로 흔들어 보이며 폭포가 있는 쪽으로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수지는 가끔 그런 상황들이 우습게 느껴졌다. 가족으로 묶인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끙끙거리고 있는 꼴이며, 상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 주는 것까지. 그게 다 사랑이기 때문이라고 철없이 둘러대던 진주를 떠올리면 가끔은 영숙이 불행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진주와 떨어져 지내는 시간 동안 수지는 영숙으로부터 연락을 받을 때마다 거짓말을 했다. 처음엔 그것이 영숙과 진주, 두 사람의 마음을 괴롭혀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차라리 진주에 대해 솔직하게 말해주었으면 어땠을까.
수지는 자신의 거짓말이 실은 영숙에 대한 배려였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던 행동을 한 것이다. 해가 거듭될수록 수지는 자신이 오랫동안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실은 헛된 짓거리들이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수지를 둘러싼 사람들은 여전했지만 수지 역시 누군가에게는 수지 자신이 극도로 싫어하는 종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발가락 끝이 오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다만,
수지는 영숙과 진주를 사랑해오고 있었던 걸까. 두 사람을 아꼈던 걸까. 실은 괴롭혀주는 것이 아닌 영숙을 배려하고 있었던 걸까. 누군가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란 그런 것일까. 그렇지만 결국 진주를 죽음으로 몰아간 데는 엉성하기 짝이 없는 사랑과 배려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한동안 수지는 그것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스스로의 마음가짐이 점점 뒤틀려간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마치 얼굴을 찡그릴 때마다 결이 난 방향으로 생겨나던 주름 같았다. 생겨나기 전에는 미리 대비하지 못했던, 천천히 밀려오지만 결코 없었던 일이 될 수는 없어 흉터가 되어 버린 상처 같기도 했다. 매년 기일에 영숙과 함께 산의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봐 달라는 진주의 유언처럼. 그런데 진주는 여름과 겨울 중 어떤 풍경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어찌 됐건 진주는 시간 앞에서 변하지 않았고, 수지는 점점 변해갔다. 수지는 이제 영숙 앞에서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 될 줄 알았다. 수지는 영숙이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주였더라도, 그게 자신이 아닌 진주였더라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수지는 생각하고 있다.
수지는 뒤따라 내려오는 영숙의 그림자를 밟으며 운동화 앞코를 조금 세워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영숙의 그림자는 후들거리는 영숙의 다리만큼이나 빠르게 모양을 바꾸며 움직였다. 수지가 뒤를 돌아 영숙의 손목을 잡았다. 손을 잡기엔 자신의 손바닥에서 배어 나온 땀이 불쾌하게 느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영숙이 한쪽 걸음을 조금 휘청이며 어색한 표정으로 수지를 바라보았다.
조금만 더 걸으면 도착할 것 같아서요. 내려가는 길이 위험해 보이기도 하고…….
어머, 내리막길이 무서울 게 뭐가 있니. 이럴 때면 너도 참 아직 멀은 것 같다.
수지의 말에 영숙이 수지 쪽으로 기댄 몸에 힘을 실으며 작게 웃었다. 두 사람은 우연히 뿌리를 맞닿은 나무처럼 서로의 팔을 휘감은 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 길엔 지난 겨울에 버려진 생명들이 유난히 많았고, 그것들은 더 이상 바람에 흔들리지 않을 작정인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