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억한다, 그 한 순간을
“중위님은 고향이 어디십니까?"
“부산입니다.”
부산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뱃고동이 울려 퍼지는 한 여름의 항구를 떠올렸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우리 가족이 모두 부산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우리 가족이 머물렀던 송도 해수욕장의 한 켠에는 조그만 항구가 있었다. 어둠이 내리면 등대가 켜졌고, 오징어잡이 배들이 바다로 나가며 뱃고동을 울렸다. 3일을 머무르며 나는 언제나 배들이 떠나는 모습만을 보았다. 어린 생각에 그 배들이 지구의 반대편까지 흘러가는 줄만 알았다. 멀리 펼쳐진 수평선을 기준으로 내가 살고 있는 세상과 내가 살아본 적이 없는 세상이 나뉘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본 적이 없는 세상을 가슴에 품었다. 아득히 멀리에서 평행선 하나로 나누어지는 세상 저편으로 가기 위해서는 커다란 배에 오르거나, 여권을 가지고 하늘을 날아가야 했다. 나는 둘 중 어느 것 하나도 해보지 못한 때였다.
“부산에도 종종 가봤었죠. 바다는 역시 부산이 원조라는 느낌이 듭니다 전. 다대포라고 있죠. 거기 몰운대에 올라서 아주 맑은 날 남동 쪽을 바라다보면 일본 영토가 보이기도 합니다. 젊을 때는 거기서 하루 종일 그걸 바라보고 있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아, 그러세요. 제가 그 근처에 살았습니다. 저도 학창시절에 종종 그곳에 올라서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곤 했습니다. 거기는 인적이 드물어서 바다가 본연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어요.”
“아하. 본연의 목소리라. 그 표현 참 좋군요. 저도 공감합니다.”
선생과 장 중위의 목소리에는 어느덧 소금기가 서려 있었다. 얼어붙은 저수지의 수면 아래로 흐르는 물소리가 마치 다대포 앞바다의 물결이 밀려나가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전역은 언제 합니까?”
“내년 이맘 때 즈음입니다.”
“아직 멀었군요.”
“그러게요.”
“전역하면 어떤 일을 하실 계획입니까.”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여행을 떠나고 싶습니다.”
“아, 여행 좋지요. 가신다면 어디로?”
“히말라야.”
“하하 히말라야요? 유럽도 미국도 아닌 히말라야라니 놀랍네요. 왜 하필 그곳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어떤 극점까지 저를 밀어가고 싶은 겁니다. 다음은 남극이나 북극으로 가고 싶습니다.”
“뭔가 깊은 사연이 있을 것 같은 젊은이네요. 더 묻는 것은 실례가 되겠지요.”
선생은 말을 멈추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히말라야'라고 발음한 장 중위의 목소리가 가슴에 선명한 발자국을 남겼다. 선생은 히말라야를… 아니다. 선생은 눈을 감은 채 홋카이도를 떠올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불현듯 우리 세 사람이 사실은 히말라야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환각에 빠져들었다. 밖에는 눈을 뜰 수 조차 없는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우리는 3인용 텐트 속에서 휴대용 전기스토브를 켜놓고 몸을 녹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랜 세월 호흡을 맞춰온 등반 동지들이어서 서로 말없이 몸을 녹이고 있더라도 상대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기분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기분. 가슴속 어딘가로부터 묘한 미소가 떠올라왔다. 한 번 떠오른 미소는 다음번 미소를 떠밀어 올리고, 또다시 다음번 미소가 공기 방울처럼 피어오르는 것이었다. 장 중위에게 콘탁스 카메라에 대해서 물어볼 생각이었으나 아무래도 좋다고 여겨졌다. 사람이 사람을 안다는 것은 때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종종 사람들은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을 가장 잘 이해했다. 장 중위도 눈을 감았다. 동이 트려면 아직 30분 정도는 더 기다려야 했다. 나도 눈을 감았다. 저수지의 물길이 내 속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아득한 물소리…….
“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