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설들

우주의 의미 5

소설 <우주의 의미>

by 장명진

5


수연은 내 얘기를 들어준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청소년 보호소에서 알게 된 동생이었다. 우리는 ‘푸른두드림 센터’라는 보호소의 이름을 푸르게 멍들 때까 두들겨 맞는다는 뜻이냐며 함께 비웃고는 했었다. 수연은 내가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지방공립대학교에 사회배려 전형으로 합격했을 때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주었다. 우리는 세 살 차이였다. 3년 뒤에는 꼭 내가 있는 도시로 따라가겠다고 활짝 웃으며 내 등을 밀었던 봄의 아침이 아직도 어느 정거장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수연은 울적한 표정의 나와 달리 잘 웃는 아이였다. 교사들은 내게 수연이처럼 웃어보라는 말을 자주했다. 교사들은 몰랐다. 내가 수연이와 단 둘이 있을 때만 그렇게 웃는다는 것을. 그리고 수연이는 내 앞에서만 나처럼 울적한 표정을 종종 짓는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는 같은 상처를 지니고 있었기에, 세세히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잘 알았다. 나는 사내의 손찌검과 발길질을 피해, 수연은 사내의 혀와 성기를 피해 집을 나섰다. 그날의 일을 얘기하며 나는 캄캄한 밤 하늘을 홀로 밝히던 북극성을, 수연은 자욱한 물안개 속으로 스며들던 시푸른 새벽의 빛을 떠올렸다. 세상이란 게 대체 왜 있어야 하는지 몰랐는데, 이따금 그렇게 깜짝 놀랄만한 예쁨을 보여주는 거더라고요. 어때, 한 번 더 살아봐 하고 약 올리는 것처럼. 수연이 말갛게 웃으며 말할 때 나는 회복할 수 없는 절망을 느꼈다. 그 지독한 절망이 기묘하게 나를 미소 짓게 했다. 그건 이 아이보다는 낫다는 안도감이었을까, 아니면 나 같은 사람이라도 이 아이에게는 웃어줘야 한다는 의무감이었을까.


머릿 속에 저장되는 러시아어의 단어들이 늘어갈 수록 수연과의 거리는 멀어졌다. 함께 손을 꼭 잡고 물가를 거닐 던 시간도, 죽음을 생각하던 밤에 서로에게 소리내 읽어주었던 소설책의 줄거리도, 우리가 좋은 가정에서 피를 나눈 사이로 태어났다면 이라는 가정 속에 부풀려보았던 상상의 이야기들도 점점 안개 뒤로 스러져갔다. 수연이 열여덟이 되었던 해의 여름이 찾아온 후로 다음 해 겨울까지 우리는 아무런 편지도, 문자도 주고 받지 않게 되었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자연스러운 일이었을까. 아마도 어찌할 수 없었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수연의 수능시험이 끝나고 한 주 정도가 지난 토요일이었다. 수연은 갑자기 내가 머무는 도시의 기차역 대합실에 앉아 있다고 문자를 보내왔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던 햄버거 가게의 점장에게 이틀치 월급을 받지 않아도 좋다는 조건으로 간신히 하루 휴가를 받아냈다. 간이역 대합실의 진청색 의자에 수연이 연분홍으로 염색한 긴 머리칼을 늘어뜨린 채,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내가 이름을 부르자, 수연은 다시 그 물안개 가득한 새벽의 어스름 속에서 아침의 빛을 발견한 소녀처럼 말갛게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그 불안한 웃음을 꺼트리고 싶지 않았다. 나도 따라 웃었다. 우리는 3년 만에 다시 만났다. 아무 것도 변한 게 없기를 염원했지만,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다.



2019. 10. 17.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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