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와 바람과 나

사랑 끝, 라이딩 시작 9

by 장명진


음악가 한대수의 초기 명곡 중에 ‘바람과 나’라는 곡을 아주 좋아한다. “끝, 끝없는 바람!”이라는 첫 소절을 듣는 순간 봄 혹은 초여름의 바람이 남국에서 불어올 것만 같은 노래다. 무일푼이었던 내 유년 시절의 유일한 취미는 산 꼭대기의 숲에 앉아 바람을 감각하며, 흘러가는 구름을 멍히 바라보는 것이었다. 봄과 초여름의 바람은 부드럽게 나를 쓰다듬어 주고, 등을 밀어주는 신의 손길과 같았다. 어릴 적에 가장 좋아했던 운동은 달리기였다. 바람을 가르며 달릴 때 느껴지는 하늘의 감촉이 좋았다.


자연스럽게 자전거와 씽씽이가 내 유년의 버킷템이 되었다. 씽씽이는 일고 여덟 살 무렵 엄마 심부름을 다녀오는 길에 슈퍼 앞에 세워뒀다가 잃어버린 후 영영 되찾지 못했다. 자전거는 너무나 갖고 싶었으나, 집안 형편상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타보지도 못한 채 그저 다른 아이들의 자전거를 부러워하며 학창 시절 10년을 보냈다.


한국 대중음악사 싱어송라이터의 시조새. 70년대 히피문화의 첫 장을 연 자유인 한대수.


인생 최초의 (두 발) 자전거 승차는 고2 무렵의 가을 수련회였다. 수련회 프로그램에 무려 ‘산악자전거 타기’가 포함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프로그램 시간이 되자, 내 기억으로는 나를 제외한 모두가 자전거를 끌고 숲으로 달려나갔다. 혼자 남은 나는 오기가 발동해 무작정 남은 자전거에 올라타서 페달을 밟았다. 어찌나 집념이 강했는지,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기 시작해 비틀비틀거리면서도 어찌어찌 앞으로 움직여 나갔다. 천신만고 끝에 교관이 있는 언덕까지 도착했다. 교관은 당연히 내가 자전거 초보(라고조차 할 수 없는)인 것을 모른 채로, 산 비탈길로 빨리 내려가라고 명령했다. 허둥지둥 비탈 아래로 자전거를 이끌었는데, 당시로는 정말 상상할 수 없던 속도의 질주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나는 다만 자전거 브레이크 작동법을 알지 못했다….


100미터 정도 죽음의 질주 끝에 나를 멈춰준 것은 커다란 소나무 기둥이었고, 나는 자전거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허공을 날아 숲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세상의 끝에 잠시 다녀왔던 그때의 감각을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주위에 아무도 없었지만 어쩐지 아픈 것보다 쪽 팔린 마음이 컸다. 가슴속에서 뭔가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작했고, 벌떡 일어나 자전거를 일으켜 세우고 안장에 앉아 페달을 밟았다. 그리고 정말 거짓말처럼 자전거를 제대로 탈 수 있게 되었다.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된 평행세계여서 다행이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니, 이 자전거 최초 탑승 일화는 꼭 지난 내 인생 전체를 대변해주는 것만 같다. 무모하게 도전하고, 크게 한 방 얻어 맞고, 문득 정신을 차려서 끝내 이루어내고 마는 것. 오래전 그날 자전거 앞에서 시무룩한 표정으로 돌아선 채 수련회장 숙소로 돌아왔다면 아마도 나는 지금까지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을 시무룩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았을까. 세계는 내가 벽을 넘어뜨린 만큼 확장된다. 마치, 롤플레잉 게임에서 내가 움직여 간만큼 식별 가능한 지도의 범위가 넓어지는 것과 같다.


과연, 나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정신이나 영혼을 위한 자전거가 있다면 그것은 아무래도 ‘책’이겠지. 물리세계와 정신세계 양쪽 모두 자력으로 가장 멀리까지 가보고 싶다. 씽씽 바람을 가르며. 아득한 섭리의 손길을 느끼며.


2022. 10. 24.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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