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닐라
어떤 일은 그 일에서 손을 놓았을 때 되려 해결이 된다. 한창 고요를 찾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였다. 나는 열을 조금이나마 식히기 위해 다시 수박바를 입에 물었고 학교 근처의 카페에서 학교 회보에 실린 '잃어버린 사랑을 찾습니다'라는 단편소설을 읽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하필이면 엘라 피츠제럴드의 목소리로 '미스티(misty)'가 흘러나왔다. 안개. 영국. 떠나다. 고요. 기브(give). 바닐라 등의 단어들이 연쇄적으로 떠올랐고 영국의 안개 속으로 숨기 위해 떠난다는 고요에게 바닐라를 선물하는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영상은 마치 전생의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져 언제 적의 것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그건 1년 3개월 전의 어느 날의 일일까. 그보다 더 멀었던 날의 일일까. 아니면 내가 미처 기억 못하는 어제의 일인 것일까. 혹은 아직 오지 않은 어느 미래의 일일까. 시간은 한 점에서 한 점으로 흐르는 것 같지만 어느 시점은 더욱 분명하고 어느 시점은 너무 흐릿하다. 시간의 거리와 전혀 무관하게. 마치 시간들의 왕국이 있어 어느 지역은 안개가 잔뜩 낀 날씨고, 어느 지역은 화창한 것처럼.
아무튼 바닐라의 행방은 분명해졌다. 지구 어디에 있든 바닐라는 고요와 함께다. 아스피린을 먹은 것처럼 마음이 안정되었다. 허나 고요가 정말로 영국에 갔는지는 아직 신화 속의 이야기였다. 고요는 무엇 때문에 영국의 안개 속에 숨으려 했을까. 나는 또 무엇 때문에 가장 아끼던 바닐라를 선물하면서까지 고요의 떠남을 도왔을까. 수박바와 어울리지 않게 유리벽 밖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수박바가 입 안에서 다 녹는 동안에도 나는 더 이상 생각을 진행시킬 수 없었다. 기억도 자꾸자꾸 녹아내리고. 비에 씻겨버리는 듯이.
"듀크 앨링턴은 무슨 마음으로 이 곡을 만들었을까."
"나는 숨고 싶어. 모두가 날 보지만 실은 볼 수 없는 곳으로."
"영국은 일 년 중에 80%가 안개 속에 있대. 그러니 사람들이 자꾸 전쟁을 도모할 수밖에 없지. 나라도 그랬을 거야. 아무리 좋은 반 지하 방이라도 그곳이 반 지하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잖아."
"바닐라와 함께라면 마음이 든든할 거야. 지나간 것들을 잃어버리지 않을 거란 느낌이 들어. 수호천사 같은 느낌?"
"가장 중요했던 것이 더 이상 가장 중요하지 않고, 가장 뜨거웠던 것이 내 속에서 온도를 잃어버렸을 때... 어느 날 눈을 떴는데 갑자기 내가 보던 풍경이 사라졌을 때... 그때 나는..."
"늙은 어부가 죽었을 때 클레멘타인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여운아... 나는... 너는..."
"여운아, 요즘 많이 바쁘구나. 그래도 흘러가는 구름을 보면 항상 네가 곁에 있는 것 같아. 다행이야. 참 다행이야."
두서없이 고요가 한 말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개학을 일주일 앞두고부터였다. 나는 서점에서 영국에 관한 책들을 사서 읽고 있었다. <안개의 도시 영국>, <신사의 나라 영국>, <제국의 나라>, <비틀즈와 함께 떠나는 영국> 등의 제목을 가진 책들이었다. 사람들이 영국을 보는 시각은 저마다 달랐다. 어떤 이는 영국을 숨을 곳이 전혀 없는 기계적이고 각박한 곳으로 묘사했다. 그렇지만 고요는 그 어딘가에 숨기 위해 떠났다. 그리고 완벽하게 숨어버렸다. 바닐라와 함께.
고요의 집 전화번호는 양념 통닭 가게에서 이용하고 있었다. 고요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나는 손님이 주문한 양념통닭을 만드는 것이 더 시급한 중년 남자로부터 들었다. 그 뒤부터 고요가 한 말들이... 우물의 밑바닥으로부터 부유물처럼 조금씩 떠올랐다. 의미 없던 말들이 서로서로 손을 잡고 거대한 의미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하루하루 떠올라 오는 고요의 말들을 나는 온전히 감당해낼 수 없었다. 버스 안에 서 있다가, 세수를 하다가, 자전거의 체인을 들여다보다가, 조그만 돌이 발끝에 부딪혀 튀어나가는 것을 보다가... 온갖 무방비 상태에서 고요는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면 여운아, 여운아 부르는 것만 같았다. 영국에 관한 책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눈물이 났다. 책 속의 사진 속에 고요가 바닐라를 안고 멍한 표정으로 삶을 견디고 있는 게 희미하게 그려졌다. 눈물이 났다.
어렸을 적 나는 서쪽 하늘 끝에 있던 구름이 동쪽 하늘로 옮겨 갔을 때, 아... 시간이 흘렀구나 라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대부분 나는 구름의 궤도를 끝까지 지켜보지 못하고 잠이 들어 깨어나 보면 시간이 흘러갔는지 그대로 멈춰 있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내 나이 스물세 살. 늦여름에 통닭가게 아저씨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분명히 느꼈다. 시간이 흘렀다고. 구름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사라져 갔다고. 내가 잠든 사이에.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시에스타 예찬론자가 아니게 되었고. 나 자신을 긍정하는 일에 작은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 '바닐라'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