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병진 Jul 27. 2018

코미디언이 대통령이 된다면?

영화 <맨 오브 더 이어> (Man Of The Year, 2006)

연예인도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배우 출신의 정치인도 있었고, 미국에는 로널드 레이건이라는 영화배우 출신의 대통령도 있었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요원한 길처럼 보인다. 아나운서 출신의 정치인도 아직 뚜렷한 존재감을 보인 사례가 별로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난 10월 25일 치러진 과테말라 대통령 선거에서는 연예인 출신의 후보인 46세의 지미 모랄레스가 당선됐다. 심지어 그의 전직은 배우도 아니고, 아나운서도 아닌 코미디언이라고 한다. 


흥미로운 건, 그가 실제 영화에서 대통령 선거에 나간 남자를 연기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외신에 따르면 ‘솜브레로’라는 제목의 영화에 출연했던 그는 대통령 선거에 나선 카우보이를 연기했는데, 영화 속에서 그가 연기한 남자는 사람들에게 실현될 수 없는 공약을 남발하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영화에서 그는 낙선했다. 모랄레스가 실제 대통령 선거에 나갔을 때도 처음에는 그가 영화처럼 실패할 것이라고 내다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2015년 4월에 집계된 여론조사에서도 지지율은 고작 0.5%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실제 선거에서 70%가 넘는 득표를 기록했다. 


외신들은 그가 정치적 경력이 없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현직 대통령이 뇌물수수로 재판을 받는 등의 사건이 터지면서 선거 당시 과테말라 사람들에게는 정치인에 대한 분노가 상당히 큰 상황이었다. 틈새를 제대로 노린 모랄레스는 부패 척결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안 그래도 기존 정치인에 신물이 난 사람들이 그에게 표를 던졌다는 분석이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간에 과테말라는 자신들을 즐겁게 해주던 코미디언을 대통령으로 뽑은 것이다. 


이 뉴스를 읽는 동안 한 편의 영화가 떠올랐다. 이미 ‘웩 더 독’이라는 훌륭한 정치 풍자 영화를 만든 베리 레빈슨이 연출하고, 지난 2014년 세상을 뜬 배우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을 맡은 ‘맨 오브 더 이어’(Man Of The Year, 2006)다. 주인공인 톰 돕스 또한 코미디언이다. 정치를 소재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던 그는 대통령 선거에 나서고, 심지어 당선된다. 


선거전에 나선 톰 돕스의 무기는 당연히 ‘웃음’이다. 처음에는 ‘농담이 아니다.’란 카피를 내세워 진지한 태도로 각종 현안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그는 첫 번째 TV토론에 나가 자신의 능력을 각성한다. 다른 정치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2분의 시간을 여러 사람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면서 지루한 이야기로 시간을 허비하지만, 관록의 방송인인 그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도 1분을 남긴다. 또한, 그는 ‘강력한 보안정책을 지지한다.’는 상대의 토론을 반박하며 그날의 TV토론을 아예 자신의 무대로 바꿔버리기도 한다.


그가 가진 또 하나의 강점은 바로 기존 정치에 신물이 난 유권자들의 마음이다. 처음부터 톰 돕스가 선거에 출마하게 된 계기는 자신의 쇼에 온 어느 방청객의 제안이었다. “정치계에 정말 실망했어요. 제 친구들도 같은 생각이죠. 돕스씨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 어떨까요?” 이 제안이 방송을 타면서 그는 몇백만 통에 달하는 ‘출마 요구’ 이메일을 받게 된다. 그리고 직접 캠페인에 뛰어든 그가 사람들에게 말하는 출마 이유도 이와 통한다. “제가 도전하기로 결정한 것은 정당 싸움에 지쳤기 때문입니다. 전 공화당에 진력이 났고 민주당에 진력이 났습니다. 별로 다를 게 없어요. 끼워 맞추는 식의 후보자들입니다.” 톰 돕스는 그러한 국민의 마음을 읽었고, 그런 마음과 통할 수 있는 유머를 통해 기존의 정치판을 뒤흔들고자 한다. 


톰 돕스는 수많은 유권자의 지지를 얻지만, 그의 유머가 정말 기존의 정치판을 뒤엎은 건 아니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되지만, 사실상 진짜 당선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집계의 오류로 인해 당선자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톰 돕스가 사실을 밝힐 것인지, 그대로 대통령직을 받아들일 것인지를 놓고 갈등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굳이 영화의 결말을 여기에서 밝히고 싶진 않다. 단 하나, 코미디언인 톰 돕스는 끝까지 자신의 유머와 재치를 이용해 사람들을 감동하게 한다는 것이다. 


‘맨 오브 더 이어’는 한 명의 코미디언을 통해 정치적인 지형이 때로 변화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드러낸다. “정치인들은 기저귀 같은 존재입니다. 자주 바꿔줘야 한다는 점에서 말이죠. 다음 투표할 때는 그것을 기억하십시오.” 하지만 정치인이나 유권자들은 이 영화를 통해 매력적인 정치의 본질을 알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유권자들을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과 공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관객이 생각하는 것, 그들이 알고 있는 것과 공감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유머를 전달할 수 있는 코미디언이 없듯이 말이다. 만약 실제로 톰 돕스 같은 코미디언이 선거에 뛰어든다면, 사람들은 웃음을 통해 자신이 생각하던 바를 콕콕 집어대는 그의 화법에 매료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영화 속의 그를 좋아한 사람들도 결국에는 기존의 정치인을 선택했지만 말이다. 


과테말라의 차기 대통령이 된 지미 모랄레스 또한 유권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20년 동안 사람들을 웃겨왔다. 대통령이 되어도 국민들을 울게 하지 않을 것이다.” 단순히 말을 잘하는 사람의 얄팍한 수사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국민들을 울게 하지 않겠다는 그의 말은 과테말라로부터 매우 멀리 떨어진 한국의 유권자 마음을 흔들기에도 충분해 보인다. 우리는 유권자의 마음을 파고드는 화법과 정책으로 사람들을 웃게 해줄 정치인을 만날 수 있을까? 꼭 전직이 코미디언일 필요는 없을 거다. 톰 돕스 같은 신들린 유머와 쇼맨십이 없다 해도 그가 먼저 들으려 한다면, 충분히 사람들을 웃게 하거나 감동시킬 수 있을 것이다. 


*2015년 11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블로그에 기고된 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생각하는 봉준호 영화의 최고 명장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