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형감독 <윤희에게> ㅣ
한국계 미국인 배우, 산드라 오가 “봉준호 감독에게서 한국에서 자란 한국인, 즉 한 번도 소수 인종으로서 인종차별적인 사회에서 자라지 않은 사람의 자유로움 그 자체를 보았다"라고 인터뷰한 적이 있다. 나는 산드라 오의 이 말이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참으로 신선했다. 이 말 자체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봉준호 감독은 단지 한국에서 자란 한국인으로 국한시킬 수는 없다. 봉준호 감독은 한국에서 자란 '남성, 이성애자, 비장애인, 고학력자, 가난하지 않은 자'라는 많은 허들을 통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자란 한국인 들 중 많은 이들이 소수 인종으로서의 차별을 받아 본 적은 없다. 그러나 '자유로움 그 자체'를 경험하지 못하는 다른 수많은 변수들이 존재한다. 여성이라서, 이성애자가 아니라서, 많이 배우지 못해서, 가난해서, 장애가 있어서 등등 이유는 다양하다. 게다가 많은 경우 한 가지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이유가 겹쳐 더 강한 억압을 받는다.
특히, 생의 어느 한순간, 자신의 정체성 중 아주 중요한 부분이 부정당하는 경험을 한 사람은 위축되기가 쉽다. <윤희에게>의 윤희도 그랬다. 과거의 어느 순간, 솔직했던 자신의 감정은 사회적으로 가정적으로 아주 노골적으로 부정당하고 폄하당했다. 그 뒤 윤희는 몸속에 박제되었다. 눈빛은 늘 먼 곳을 향했다. 딸 새봄이 엄마는 왜 살아?라고 묻자. 그제야 윤희의 눈빛이 잠깐 돌아온다. '나는 왜 살지?' 어느 순간부터 하지 않은 질문이었다. '자식 때문에 산다'라는 공식적인 답을 내놓지만, 새봄에게도 윤희에게도 겉도는 말이다.
윤희는 봉고차를 타고 출근을 한다. 공장에 갔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리고 골목 어귀 어둠에 기대 담배를 피운다. 나아가지 못하고 맴도는 삶이다. 멀리 쥰 역시 봉고차를 타고 아버지의 장례식에 간다. 둘은 같은 사이즈의 봉고차에 같은 자리에 앉아 있다.
그렇게 텅 빈 삶을 겨우겨우 굴려오는 윤희. 그런 윤희에게 어느 날 편지가 도착한다. 그리고 윤희는 (딸 새봄의 계획대로) 그 편지를 따라 여행을 한다.
영화는 아주 잔잔하다. 배경이 되는 홋카이도의 겨울은 조용하고, 아름답고, 따뜻하다. 나도 홋카이도의 겨울을 경험한 적이 있다. 끝없이 펼쳐지는 눈 위에 서서 윤희처럼 모든 것이 평온해지는 경험을 했다. 윤희는 그렇게 홋카이도의 눈 위에서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자신에게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스치듯 우연히, 만난다. 이 장면에서 두 배우가 눈으로만 보여주는 '서사'는 깊고 황홀하다. 서서히 고이는 눈물이, 멀리서도 반짝이는 그 눈물이, 달빛 같다. (영화의 원래 제목은 '만월'이다)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눈물이 담긴 그 몇 초의 장면은 그 자체로 마음에 스민다.
윤희는 과거의 자신과 직면하고 달라진다. 쥰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편지를 쓴다.
'너는 내가 부끄럽지 않다고 했지? 나도 더 이상 내가 부끄럽지 않았으며 좋겠어. 그래, 우리는 잘못한 게 없으니까.'
오빠의 도움도, 지방 소도시에서의 규격화된 삶도 다 버리고 새로운 시작을 향해 가는 윤희. 그는 햇살이 가득한 카페에 앉아서 이력서를 쓰면서 마침내 조금씩 미소 짓는다.
태양처럼 강렬하진 않지만, 달빛처럼 곱다.
따뜻하고 잔잔하고 아름다운 달빛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