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봄에서 늦가을까지 이어진
"진짜 마지막이야? 엄마? 끝난 거야?"
도서관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길. 아홉 살 서희는 아쉬운 목소리로 몇 번이고 물었다. 집에 가서도. 다음 날도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끝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아이는 가장 어린 참가자이자, 가장 성실한 참가자 중 한 명이었다. 마을 도서관에서 진행된 강의에도,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떠나는 답사에도 거의 빠지질 않았다. 비 오는 경복궁도, 뜨거운 창덕궁도, 가을빛이 좋았던 성북동도 아이는 씩씩하게 함께 걸었다. 아이의 곁에는 동네 오빠들과 이모, 삼촌, 할머니들이 함께였다. 어느 날은 수첩에 질문을 써 와서 하나씩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우리에게는 익숙한 풍경이지만, 아이에게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그 낯섦이 만들어낸 질문들은 오히려 어른들을 깨우곤 했다. 선생님은 엉뚱한 듯한 질문에도 세상 진지한 얼굴로 귀 기울였다. 전문적으로 답했다. 그렇게 우리는 나란히 걷고, 듣고, 느꼈다.
초봄부터 늦가을까지. 마을 도서관의 계절은 <길 위의 인문학>과 함께 흘러갔다.
"수업에 서희같이 어린아이들이 많았잖아요. 그래서 너무 좋았어요. 우리가 똑같은 수업을 들어도 듣는 받아들이는 게 다 다르잖아요. 각자의 눈높이에 따라서. 그것도 너무 재미있는 거야. 우리는 그냥 보면 알지만, 아이들은 낯설잖아요. 그리고 그걸 바로 질문하잖아요. 예를 들면 '인력거' 나왔을 때. 아이들은 어떻게 저걸 차라고 탔나 싶었겠죠. 그렇게 반짝거리게 질문하잖아요. 너무 예뻐요."(최고령 참가자, 금옥님)
“사실 강사 입장에서는 쉽지 않았어요. 아이와 어른이 반씩 있는 수업은 흔치 않거든요.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할지 고민도 많았죠. 그런데 두 시간 동안 아이들이 한 명도 졸지 않고 집중하는 걸 보면서 정말 놀랐어요.
너무 멋졌어요. 저도 너무 좋았습니다” (마지막 수업을 마치며, 김동환 강사)
마을 도서관은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즈넉한 아파트 안에 있다. 원래 거의 버려져있던 장소였던 것을 10년 전 주민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냈다. 그 이후 <평생학습마을> 수업을 비롯해 다양한 사업들과 주민 동아리 등을 통해 다양한 활동들을 하고 있다. 바이올린, 인문학, 바느질, 필사, 낭독 같은 자체 동아리가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고, 다양한 수업이나 모임도 끊임없이 열린다. 늘 활기가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한계와 갈증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오는 사람들이 한정적이고, 특정 연령대에 몰려있다는 것. 특강의 경우는 일회성에 머물러 연계성이 부족하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런 면에서 <길 위의 인문학> 마을 도서관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오지 않던 연령대와 사람들이 왔고, 활동도 다양했으며 무엇보다 주제가 길게 이어진 연계성 강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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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길 위의 인문학 수업을 들으러 걸어오잖아요. 저 멀리서 도서관 불빛이 보여요. 별처럼 반짝여요. 그러면 그게 나한테 신호예요. 마음이 두근거려. 오늘은 뭘 배울까. 막 나도 모르게 달리게 돼요."
금옥님은 늘 20분 정도 일찍 도서관에 왔다. 도서관에서 행사를 준비하는 운영진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였다. 책상을 배치하고, 간식을 나누는 것을 돕는다. 그러고는 노트와 필통을 꺼내놓고 꼿꼿하게 앉는다.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에 눈을 반짝이다, 어른 친구들의 간식을 챙겨주기도 하고, 아이의 질문에 세상 인자한 미소를 보낸다. 꼼꼼한 필기는 기본이다. 인문학을 다 듣고 집으로 가는 길에는 든든하다. 또 무엇 하나를 알았구나. 희열을 느낀다.
"제가 그동안은 역사 같은 걸 들어도, 크게 관심이 없었어요. 중국 여행 갔을 때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한번 가봤어요. 근데 그때 느낀 거와 수업을 통해서 듣는 느낌의 깊이가 다른 거예요. 역사를 단편이 아니고 연결을 시켜주니까 안 보이던 게 보이는 거죠. 무엇보다 강사 선생님들이 너무 좋으셨어요. 제가 이 수업을 들은 후에 인사동도 가고, 경복궁도 가고, 제주도도 갔는데 다 이젠 너무 다른 곳이에요. 예를 들어 4.3을 그전에는 잘 몰랐는데 이제는 아는 거죠. 같이 간 언니에게 막 설명도 해줬어요. 진짜 <길 위의 인문학>이 저의 시야를 확 넓혀준 거죠. 정말 감동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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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정말로 우리는 길 위에서 한 시절을 보냈다. 마을 도서관은 물리적으로는 한자리에 있지만, 사람들이 오고, 이야기가 오가고, 마음이 이어지는 순간마다 끊임없이 움직였다.
길은 흘러가고, 고정되지 않으며, 살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길 위의 인문학’은 누군가의 생각이 다른 누군가에게 닿는 순간마다 새로 태어난다. 아이와 어른이 함께 걷고, 웃고, 질문하던 그 길 위에서 우리의 마을 도서관도 조금씩 자라났다. 한 사람의 발걸음이 또 다른 이의 길을 비추고, 그 길들이 모여 마을이 되고, 마을이 곧 배움이 된다.
다음 계절의 길 위에서도, 또 다른 이야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