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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관장의 본업 (3)

- 우리가 먼저 간다

by 은작


"우리가 먼저 간다."

이 문장이다. 그래, 이거다. 빠르게 질문지 위에 휘갈겨 썼다. 지금 카메라는 돌아가지 않는다. 오늘 이 분을 섭외한 공식 인터뷰의 주제도 아니다. 다만 팬미팅처럼 이야기를 주고받다 나온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이 문장을 꼭 담고 싶다. 혀끝이 기분 좋게 아릿하다.

인터뷰를 하다 보면 딱 한 문장이 올 때가 있다. 그 사람의 마음과 시간을 다 담은 한 문장. 결국 모든 이야기가 깔때기처럼 모이는 곳. 이 문장을 제대로 담고 싶어, 내내 빌드 업을 하기도 한다. 내게는 ‘우리가 먼저 간다’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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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는 자주 이렇게 말했다. “좋아, 지옥에는 내가 간다.” 『허클베리 핀』에 나온 대사다. 그는 선택이 어려울 때 이 문장을 떠올리며 더 힘든 쪽을 택했다고 한다. 그래야 후회하지 않는다고. 그날 내가 들은 “우리가 먼저 간다"라는 그 말과 다르지 않게 들렸다. 이 말을 한 주인공은 바로 박주영 판사님이다.


이번에 가니 무려, '지법장'이 되신!! 판사님 파이팅!

박주영 판사님은 『어떤 양형 이유』 『법정의 얼굴들』 『괄호 치고』 등을 쓰셨다. 유퀴즈에도 나오셨다. 그전부터 범상치 않은 판결문으로 널리 알려진 분이다. 판사님의 책을 읽다 보면 먹먹하고 아련해진다. 내 책은 너덜너덜하다. 그럼에도 책도, 유느님도 판사님의 진면목을 다 담아내진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진짜 얼굴은 본업의 순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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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는 집단 전세사기 사건의 판결 과정을 들려주었다. 피해자 수백 명의 탄원서에는 '어차피 판사는 제대로 읽지 않겠지.'라는 체념이 배어 있었다. 그러나 박 판사님은 끝까지 다 읽고, 판결문에 그들의 목소리를 짧게라도 모두 담았다.

“사기 범죄의 피해자들은 자신을 탓하기가 쉬워요. 하지만 당연하게도 잘못은 피해자에게 있지 않죠. 사기는 교묘합니다. 법원 사람도 당합니다. 저는 ‘당신 잘못이 아니다’라는 말을 꼭 전하고 싶었습니다. 기성세대의 책임을 사과하고, 용기를 건네고 싶었습니다.”

그는 검찰의 구형보다 무거운 법정 최고형 15년을 선고했다. 판례 없는 길을 열기 위해 수많은 논문과 사례를 뒤지고, 한 달 넘게 판결문을 다듬었다.

“후배 판사들은 일이 많아지니까 힘들죠. 저는 이렇게 말해요. '우리가 먼저 가자. 어렵지만 우리가 먼저 가면 판례가 된다. 그럼 다른 이들도 따라올 수 있다.' 사실, 저도 이렇게 왔거든요. 선배 한 분의 전향적인 판결을 보고, ‘아, 저래도 되는구나’를 배웠어요. 그 생각이 여기까지 이끌었죠.”


코로나 시절 처음 했던 인터뷰의 기억들. >< 영광입니다.
2023년 인터뷰의 흔적들. "우리는 누군가의 주석이다" 정말로요!





나는 내 책 『할머니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인터뷰 글쓰기 잘하는 법』에서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어른이란 무엇일까. 내가 생각하는 어른은 여름 땡볕 아래에서도 겨울의 혹한이 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파도가 왔다가 가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나도 아프지만, 누군가는 더 큰 아픔을 안고도 용기 내서 살고 있음을 아는 사람이다. 지금 내가 발 딛고 있는 눈앞의 현실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아내고, 그 마음을 다른 이와 나눌 수 있는 사람이다.”

내가 만난 박주영 판사님은 정말, 그런 어른이었다. 개인사가 왜 없겠는가. 삶이 늘 평온해서가 아니다. 다만 다른 이가 더 아플 수 있음을 안다. 지금 자신의 자리에서, 자기 일로,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살아내고 그 마음을 나누는’ 사람. “우리가 먼저 간다”라고 저벅저벅 걸어가는 사람. 나는 그가 이 사회의 어른이라 생각한다.


*

이렇게 나의 부산 출장은 마무리되었다. 이후 전주, 군산, 서울로 이어지는 출장은 계속된다. 동시에 관장 일도 이어진다. 출장을 다녀오면 원고를 써야 하고, 마을에는 중간중간 새로운 이슈가 터지고, 도서관 행사도 빼곡하다.

나는 당연히 이 모든 걸 다 잘 해낼 수 없다. 괜찮다. 일은 더 늘었지만, 요즘은 목탁을 거의 두드리지 않는다. 이제 조금 알겠다. 나 혼자 하는 일은 없다.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씩 해낸다. 내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우리가 먼저 간다’ 정신으로 앞서 간 이들의 길 위에 있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그것도 못 하면 기대면 된다. 그래서 징징대지 말자고 다짐했다. 언젠가 내가 앞서가야 할 일이 온다면, 그땐 용기를 내면 된다.

어른이 뭘까. 책에는 나름 써봤지만, 나는 아직 길 위에 있다. 그래도 다행이다. 앞서가는 이들의 ‘등’을 보고 걸을 수 있으니. 부족한 나는 버겁다.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안 된다고, 어렵다고 주저앉을 일도 아니다. '내가 먼저 갈게' 하고 앞서 간 어른들이 내 앞에서 이미 보여주고 있으니까. 나는 그 길을 따라 걸어가면 된다.


팬심이 보이는 몹시 붉은 나의 얼굴. 허허허. <어떤, 응원>을 선물로 드릴 수 있어 영광입니다.









추신) 아래는 판사님이 언급하신 전세사기 관련 기사.

정말 감동적이다. 일독을 권한다.



https://news.kbs.co.kr/news/mobile/view/view.do?ncd=7874095


절대로 여러분 자신을 원망하거나 자책하지 마십시오. 제가 기록과 탄원서에서 읽은 바에 의하면, 여러분은 그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아가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마주치는 지극히 평범하고 아름다운 청년들입니다. 한 개인의 욕망과 그 탐욕을 적절히 제어하지 못한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이 여러분과 같은 선량한 피해자를 만든 것이지, 결코 여러분이 무언가 부족해서 이런 피해를 당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 주십시오.
(중략)
하루하루 견디기 힘든 나날이겠지만, 빛과 어둠이 교차하듯 이 암흑 같은 시절도 다 지나갈 것입니다. 이 사건이 남긴 상처가 아무리 크다 해도, 여러분의 마음가짐과 의지에 따라서는, 이 시련이 여러분의 인생을 더욱더 빛나고 아름답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부디, 마음과 몸을 잘 챙기시고, 스스로를 아끼고 또 아껴서, 하루빨리 평온한 일상으로 복귀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 박주영 판사가 전세 사기 피해자들에게 전한 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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