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서관에서 만난 내 친구(ft. 버지니아 울프&비타 색빌웨스트)
새 학기가 시작되면 학교 가는 길이 멀었다. 새 교실, 새 친구. 낯설고 거북한 향기. 친한 친구 하나 없이 홀로 떨어진 교실로 들어갈 때의 막막함과 먹먹함이라니. 언제였더라. 초등학교 고학년이었나. 첫 주 어느 날, 점심시간에 밥 먹을 친구가 없었다. 옆 교실로 친한 친구를 찾아갔는데 어긋났다.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리다 그냥 도시락을 들고 운동장 구석에 있다가 다시 교실로 왔다.
6교시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운동장의 뽀얀 먼지에 속이 매스꺼웠다. 집에 도착하니 (실제인지, 내 마음의 효과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동굴처럼 어두웠다. 부엌으로 들어가 툭, 도시락 가방을 올렸다. 조용한 집에 소리가 크게 울렸다. 지퍼를 열고 반찬통을 꺼내니 특유의 눅진한 냄새가 났다. 식어버린 밥과 뒤섞인 콩나물과 멸치. 배가 고팠다. 급하게 숟가락을 밀어 넣다 목이 탁 멨다. 캑캑거리다 눈물이 났다. 급하게 물을 삼키다 보니 허탈했다. 지금 생각하면 별일도 아닌데, 어렸던 나는 비참한 마음이 들어 잠깐 더 울었다. 외로움은 맛이 없었다.
다행히 학년이 올라가며 나는 점차 사회화가 되었고, 앞에 나서기까지 하는 아이가 되었다. 그럼에도 늘 외로운 순간은 있었다. 당연하다. 인간이니까. 인간은 누구나 외롭다. 그러나 동시에 정말, 너무나 행복할 만큼 충만한 관계도 있었다. 연애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물론 연애일 때도 있었지만). 온 우주도 나눌 수 있을 것만큼 행복한 관계. 아무것도 아닌데 그 아이와 함께 있으면 모든 게 달라 보이던 관계. 그런 친구 관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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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와 비타 색빌웨스트도 그런 관계였을 거라 믿는다. 영원히 그랬다는 말은 아니다. 찰나의 만남 속에서 둘은 그런 교류를 했다. 그 결과가 바로 버지니아 울프의 『올랜도』다. 『올랜도』는 비타 색빌웨스트를 모델로 한 작품이다. 버지니아와 비타가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나의 비타, 나의 버지니아』를 보면 둘은 동성 애인이자 뮤즈, 지지자이자 친구였다. 시간이 지나며 형태는 달라졌지만, 끝까지 서로를 아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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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초, 내가 살았던 곳은 신도시였다. 큰아이가 다섯 살 될 때까지 살았다. 모든 것이 편리했다. 우리 집에서 시립도서관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였는데, 나는 유아차를 끌고도 자주 다녔다. 그러나 그곳은 크고 복잡했고, 아이가 울기라도 하면 얼른 나와야 했다. 어떤 관계도 맺지 못했다.
동네에서는 아이의 어린이집과 이웃 어머니들을 중심으로 관계를 맺었다. 몇몇은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표면적인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대부분은 ‘아이의 한글 공부, 파닉스 모임, 가베 수업’ 등이었다. 함께 웃고 있었지만 소모적이고 경쟁적이었다. 그 어디에도 관심이 없던 나는(게다가 당시에는 대학원을 다니고 있기도 했다) 그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내가 학교에 가거나 일하러 가면, 아이를 봐주러 자주 오던 엄마는 그들과 놀이터에서 몇 번 만나더니 “동네 여편네들이 별로니, 가까이하지 말라.”라며 특유의 혜안을 보여줬다.
그러다 공동육아를 하기 위해 동네를 옮겼고, 지금은 <어쩌다, 관장>까지 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나는 전혀 다른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함께 필사도 하고, 책도 읽고, 낭독도 한다. 그들도 나도 아이들을 키우지만, 우리는 어떤 학원을 보낼까 보다(물론 학원 정보도 필요한 경우 공유하긴 한다) 아이들의 ‘귀여움’에 대해서 더 이야기한다. 거짓말이다. 사실 아이들 이야기를 잘 안 한다. 그냥 우리끼리 어떻게 하면 더 놀까,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게 살까를 고민한다. 그러다가 함께 동네 환경문제 의제도 논의한다. 삶과 정치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오늘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친구는 이 친구들이 아니다. 나와 대략 10년 터울 안에 나이가 들어오는 이 친구들은 그동안 수많은 활동을 함께 해온 도서관의 든든한 지킴이다. 내가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친구는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벗, 그리고 나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벗이다.
그들과 내가 교류가 많은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그저 도서관에서 스치듯 만날 뿐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을 ‘친구’라고 감히 부르고 싶다. 마을 도서관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들을 만나지 못했을 테니까. 그들의 작은 행동이 내게 주는 영향이 너무 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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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친구는 70대다. 그는 멀리 있다가도 도서관 행사가 있으면 늦지 않게 찾아온다. '어린이나 하는 거지. 난 그림 실력이 없어'라고 모두가 숨는 '띠지 만들기 행사' 같은 것에도 당당하게 도전한다(그는 유일한 어른 도전자였다). 도서관 인문학 수업이나 그림책 테라피 등이 있으면 진심으로 와서 아이처럼 감동하고, 봉사자가 빈 시간이면 기꺼이 도서관을 지킨다. 나도 그도 서로를 이름(물론 뒤에 존칭은 붙는다)을 부른다. 좋은 책을 소개하기도 한다. 그와 나는 마을 노인정에서 요가도 함께 한다.
또 다른 친구는 아직 열 살이 안 됐다. 아홉 살이다. 아마 그 친구는 내 얼굴 정도만 알겠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혼자 ‘친구’라 명명했다. 배울 게 너무 많기 때문이다. 친구는 맑고 고운 얼굴로 궁금한 것을 세상에 쏟아낸다. 그 친구와 나는 <길 위의 인문학>을 같이 듣는데, 그의 질문에 깜짝 놀라거나 감동하거나 웃음을 짓게 된다. 지난주 그는 정지용의 「향수」를 읽었다. 나는 그의 목소리에서 오래 기억될 울림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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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만 비타 색빌웨스트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다. 비타도 그랬다. 비타의 책 『모든 열정이 다하고』의 주인공은 노년의 여성 레이디 슬레인이다. 그는 여든여덟에 이르러 독립을 선택한다. 대단한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다. 다만, 어릴 때부터 살고 싶었지만 살지 못했던 스스로의 삶을 살기 위해서다. 그 삶에 ‘성별’은 없다. 마치 버지니아 울프의 『올랜도』 속 올랜도가 400년을 살며 남자로 태어나 여자가 된 것처럼, 레이디 슬레인 역시 그런 상상을 한다. 내게는 이 부분이 친구 버지니아에 대한 비타의 화답처럼 들렸다. 그것도 “네가 나에게 보낸 마음에 내가 이렇게 답해.”라는 따뜻한 화답. 둘은 그렇게 서로를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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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추] 날 마을 도서관에서는 <그림책 테라피> 수업이 있었다. 주제는 이번 여름의 나를 돌아보기였다. 입추라고 하지만, 여전히 더웠다. 그럼에도 안다. 어김없이 계절은 변한다. 나는 올여름을 어떻게 보냈는지 이야기를 나눴다. 도서관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어린 시절, 혼자 도시락을 먹던 내가 생각하던 ‘친구’와 지금 내가 생각하는 ‘친구’는 다르다. 내 삶의 한 조각을 나누고, 배울 수 있는 사람들이 내게는 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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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인드라망처럼 우리는 서로를 비춰주는 거울이다. 내가 맺는 관계가 곧 나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친구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한다.
그 친구들은 마을 도서관에서 만난다. 작은 마을 도서관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동등한 관계로 이렇게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마을 어르신으로, 동네 꼬마로만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도서관 책상에 나란히 앉는다. 나이와 배경이 다른 이들이 책 한 권을 사이에 두고, 낭독과 대화를 통해 서로의 세계를 건넨다. 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빌리는 공간이 아니라, 삶의 반경을 넓히는 장소다. 나와 닮은 이들을 만나는 기쁨도 있지만, 나와 전혀 다른 이들을 만나는 놀라움은 더 크다. 그렇게 도서관에서야 가능한 친구들이 생겨난다. 아이도, 어른도, 노인도 이곳에서는 모두 ‘함께 사는 사람’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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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늘 ‘친구’라 부른 이들처럼, 마을 도서관은 수많은 관계를 잇는다. 책과 사람, 삶과 삶이 이어지는 그 만남 속에서 나는 외로움의 맛을 잊고, 배움과 환대의 맛을 알아간다. 결국 친구라는 것은 내가 어디서 어떻게 시간을 보내느냐에 달려 있다. 나는 그 친구들이 오늘, 그리고 나의 내일의 삶의 질을 결정한다고 믿는다.
나는 오늘도 마을 도서관에 내 친구를 만나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