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부스스한 얼굴에 선크림을 바른다. 눈곱이 꼈나 본다. 모자티로 눌린 머리를 덮는다. 오늘은 유난히 가방이 무겁다. 보온 도시락 때문이다.
십 분 전, 냉동실에서 미니 호빵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권장 시간보다 살짝 더. 얼른 꺼내 도시락에 넣는다. 식기 전에 도착해야 하니까. 크록스를 신고, 현관을 나서는데, 재택근무 중인 남편이 묻는다.
“어디 가?”
나는 멀어지며 말한다.
“해자봉.”
해자봉은 내가 관장으로 있는 마을 도서관의 옛 이름이다. 올해로 꼭 10년이 됐다. 처음엔 공간이 둘로 나뉘어 있었다. 어린이 도서관 ‘해자봉’, 어른들을 위한 북 카페 ‘달자봉’. 지금은 하나가 되어 ‘해와달작은도서관’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해자봉’이다.
눌린 머리, 츄리닝, 크록스를 신은 나는 녹색 보온 도시락을 달랑달랑 들고 간다. 수요일 아침 9시, 낭독 동아리의 시간이다. 이미 9시를 넘었지만 괜찮다. 우리는 서로를 안다. 신뢰가 간다. 도착하니 9시 10분. 예상대로다. 역시 단, 한 명만 와 있다.
낭독 동아리는 작년 가을, 우연처럼 시작됐다. 마을 도서관에서 그림책 강의가 열렸다. 누군가 읽어주는 그림책이 그렇게 좋을 줄이야. 강의가 끝나고 장터에서 떡볶이를 나눠 먹으며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이어졌다. 방금 강의에서 나온 단어와 구절들이 드문드문 섞인 수다였다. 그냥 읽는 것과 발화되어 나온 문장을 듣는 것이 얼마나 다르게 다가오는지, 우리는 그날 느꼈다. 저마다의 마음에 작은 씨앗이 내렸다. 그날은 가을향이 솔솔 풍기던 날이었다. 공기는 적당히 서늘했고, 햇빛은 따뜻했다. 물들어가는 나뭇잎을 보며 나는 실존적 고민에 빠졌다. 지금 어묵을 먹으면 더울까? 아닐까? 시킬까? 말까? 인간은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 선다.
그때 누군가 또 다른 경우의 수를 던졌다.
“이렇게 좋은데, 우리도 낭독 한 번 해볼까요?”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해보고 아니면 접으면 된다. 그렇게 우리는 작은 씨앗에 바로 물을 주었다. 매주 수요일 아침, 9시 낭독을 시작하기로 했다. 나도 어묵을 입에 문 채 (결국 시켰다) 우물거리며 말했다.
“느...무 좋아요.” (어묵은 뜨거웠다. 역시)
첫 책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였다. 나는 이미 몇 번 읽었고, 공연도 봤지만 이번엔 달랐다. 글자가 살아 움직였다. 그때 처음 알았다. 왜 영미문학에서 그토록 셰익스피어를 외치는지. 우리는 그렇게 천천히, 그러나 단단하게 읽어 나갔다.
언제부턴가 한 둘씩 간식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귤을 풀어놓고, 고구마를 찌고, 어제 받은 빵을 나눴다. 시간이 지나며 간식은 점점 푸짐해졌다. 9시가 되어도 바로 낭독을 시작하는 일이 없었다. 커피를 내리고, 근황을 나누며, 간식을 집어먹는다. 그러다 한두 명씩 들어오고, 자리가 다 찬다.
그렇게 우리는 먹고, 읽고, 다시 먹으며 일 년을 보냈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다 읽고, 『토지』를 잠시 시도하다 포기하고, 지금은 소포클레스 전집을 읽는다. 비극을 읽다 보면 의외의 위안이 있다. 우리의 평범한 삶이 반짝거린다. 적어도 우리는 신탁을 받지도, 아버지를 죽이지도, 어머니와 결혼하지도, 눈을 찌르고 황야를 떠돌지 않아도 되니까!
그렇게 한 바퀴 돌아, 다시 가을이다. 도서관에 도착해 도시락을 연다. 호빵은 따뜻하고 말랑하다. 먼저 온 멤버와 둘이 나눠 먹는다. 팥의 단내가 입안에 번진다.
그 사이 사람들이 들어온다. 간식도 온다. 고구마, 감, 토마토, 크루아상.... 역시, 오늘도 풍성하다.
이야기가 무르익을 즈음, 갑자기 누군가 시계를 보며 소스라치며 놀란다. 그제야 다 같이 주섬주섬 책을 펼친다. 둥글게 앉아 한 사람씩 읽는다. 누군가는 한 줄, 누군가는 두 쪽을 읽는다. 옆 사람이 긴 문장에 걸리면 나는 슬쩍 빵을 베어 문다. 우리의 낭독은 리듬이 있고, 간식은 박자가 있다.
책을 읽는 일과 무엇인가를 먹는 일은 닮았다. 문장을 씹고, 삼키고, 가끔은 되새김질한다. 누군가는 허겁지겁 읽고, 누군가는 천천히 음미한다. 간식과 낭독이 어쩐지 함께인 이유도 거기에 있다. 둘 다 삶을 소리 내어 나누는 일이니까(우리가 먹는 걸 좋아해서 그런 건 아니다).
게다가 지금은 절기상으로는 추분.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때다. 균형의 계절, 그 한가운데에서 생각한다. 낮과 밤처럼, 간식과 낭독도 어느 한쪽이 먼저일 수 없다. 둘이 함께일 때 가장 자연스럽고, 그래서 우리 모임은 언제나 균형 위에 선다(라고 해두자).
마을 도서관을 굴러가게 하는 건, 책이 아니다. 사람의 몸이다. 손으로 문을 열고, 의자를 옮기고, 커피를 내리고, 책장을 넘기는 몸. 누군가는 고개를 숙이고, 누군가는 웃으며 듣는다. 그 움직임들이 공기를 데우고, 공기가 목소리를 태워 나른다. 도서관은 그렇게 매일 새로 태어난다. 책은 그저 그 사이에 놓일 뿐이다.
어느 날, 우연히 들른 주민이 푸짐한 간식상을 보고 물었다.
"간식이 먼저예요, 낭독이 먼저예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햄릿』의 대사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는 민음사 버전에서는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번역되어 있다. 각주를 보면, 단순한 생사의 선택이 아닌 존재의 있음과 없음에 대한 고뇌를 드러내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의 낭독 역시 그렇다. 정말 낭독을 위해 모이냐, 아님 간식을 먹고 싶어 모이는가는 사실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인생은 이분법이 아니며, 허세 가득한 고뇌보다 구체적 행동이 중요하다(햄릿도 그런 거 고민할 시간에 오필리아에게 잘했으면 인생이 그렇게 꼬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침 시간에 눈곱만 떼고 이 시간에 모여 앉은 우리는 셰익스피어를 읽고, 박경리를 읽고, 소포클레스를 읽는다. 얼핏 대단해 보이나, 그 문학세계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그냥 막장 드라마처럼 읽고, 오은영 선생님이 금쪽이에게 말하듯, 셰익스피어의 문학성(?)에 대해 토론한다. 고전의 문장을 통과해, 현실을 본다(『리어 왕』은 정말 부모라면 읽어야 할 교본이다. 아이를 잃고 싶다면 리어 왕처럼 해라).
이 모든 걸 마을 도서관에서, 함께 한다. 몸을 움직여 만나고, 입을 열어 문장을 나누는 일. 그 자체가 중요하다. 생활 반경 안에, 슬리퍼 끌고도 갈 수 있는 마을 도서관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매주 수요일이면 아침이면, 우리는 그렇게 문장과 간식. 시간과 마음을 나눈다.
아, 든든한 가을이다.
추신)
그래도 굳이 햄릿처럼
'간식이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외쳐야 한다면, 정답은 정해져 있다.
있음 쪽, 그것도 푸짐하게.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