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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꺼움 Mar 15. 2020

[오늘, 책] 먼 바다_공지영

남는 것은 사랑하는 일뿐이니까

  회사에서 정기적으로(?) 떡볶이를 함께 먹는 후배가 있다. 우리는 책과 영화에 대해 때때로 이야기한다. 지난주 오후, 잠깐 만나자는 연락에 양치를 하고 계단으로 내려갔다.(후배는 2층, 나는 8층에서 일한다.) 평소에는 계단을 올라오는 속도보다 내려가는 게 조금 더 빠르다 보니, 우리는 거의 4층 언저리에서 만나곤 하는데 그날은 후배가 7층 반까지 올라왔다. 양치를 하느라 조금 늦었나 보다. 올라오느라 약간 숨이 찬 후배가 종이 가방에 담긴 책을 건네며 묻는다.


  "선배님, 이 책 읽으셨어요?" 읽은 책을 선물하게 될까 봐, 신간 위주로 골라봤다는 마음이 고마웠다. 온라인 서점에 들어가면 메인 자리를 잡고 있는 공지영 작가의 소설을 몇 번 망설이다가 아직 읽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기쁜 마음으로 웃으며 책을 받았다.(조만간 맛있는 즉석떡볶이를 사줘야겠다.) 읽을 책이 아무리 많아도 선물 받은 책을 가장 먼저 읽는다. 잘 읽었다는 인사와 독서 후기를 되도록 빨리 전하고 싶어서다. 공지영 작가가 쓰는 사랑 이야기라면 좋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것도 한몫했다. 어떤 작가가 그 이름만으로도 써내는 소설에 대한 독자의 신뢰를 받는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다. 조금씩 먼 바다로 향하듯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두 사람의 사랑에 서서히 빠져들었다.



먼 바다 - 가닿지 못한 사랑들에게 바치는 헌사



  오랜 시간을 건너 뉴욕에서 다시 만나게 된 두 사람의 이야기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천천히 전개된다. 1978년 춘천행 열차 안, 가톨릭 신학생인 요셉과 성당 고등부에 다니는 미호가 처음 만난다. "훗날 노란 민들레들 틈에서 흰 민들레를 보았을 때 그녀는 그것이 그의 첫인상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하얀 민들레, 하얀 리넨 식탁보, 하얀 구절초, 혹은 하얀 코스모스.(57쪽)" 40년 뒤 뉴욕의 자연사박물관 앞에서 아프고, 슬픈 기억을 품은 채로 두 사람은 다시 만난다. "마치 거센 폭풍우 속에서 언뜻 보이던 별처럼 누군가의 시선이 빛나고 있었고 그녀가 시선을 들자 두 눈은 정확히 마주쳤다. 아무 설명도 없이 그녀는 그것이 그라는 것을 알았다.(61쪽)"


  어쩌면 사랑은 타이밍이 아닐까? 많은 사람의 첫사랑에 실패하는 이유도 사랑을 완성할 수 없는 시점에 사랑하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여고생과 신학생의 사랑에는 이겨내야 할 장벽이 많지만 그것을 뚫고 나가기엔 두 사람은 너무 연약하다. 더욱이 그들 주변에 거센 파도가 몰아친다면 원치 않는 곳으로 떠밀리게 될 수밖에. "광주에서 몇천 명의 사람들이 학살당했다는 소문이 검은 안개처럼 퍼지고 있었던, 환멸이 가득한 서늘한 여름이었다.(179쪽)" 대학교수였던 미호의 아버지는 독재에 항거하다 지독한 고문을 받고 병들게 된다. 그 무렵 요셉은 미호에게 신학교를 그만두겠다고 말하지만, 미호는 어떤 약속도 하지 못하고 도망친다. "그가 그 하느님 말고 인간인 소녀를 택한다고 하자, 소녀는 겁을 먹었던 것이다.(217쪽)"


  다시 만난 두 사람은 그렇게 어긋났던 기억을 조심스럽게 맞춰보게 되는데, 여전히 서로를 향해 있는 애틋함과 그리움이 쓸쓸하고, 슬프다. "에메랄드빛 서해바다는 따스했다. 먼 바다라고 해도 물이 그리 깊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그녀는 그를 따라 헤엄을 쳐서 앞으로 나갔다.(263쪽)" 몽유도의 먼바다에서 수영하던 두 사람의 모습이 아득하게 남고, 릴케가 사랑하는 루 살로메를 향해 쓴 시들은 첫사랑의 이야기 속에서 깊고 진한 빛을 뿜는다. 『먼 바다』를 모두 읽고 나니 어느 책 속의 문장이 천천히 수면 위로 올라온다. 책장에서 정혜윤 PD의 『마술 라디오』(한겨레, 2014)을 꺼내 펼치고, 떠오른 그 문장을 찾아 한동안 쳐다보았다.




아주 깊게 대화를 나눌 수만 있다면, 아주 깊게 들을 수만 있다면, 아주 깊게 말할 수만 있다면, 그다음에 우리에게는 아주 멋진 일이 일어날 거야. 왜냐하면 남는 것은 사랑하는 일뿐이니까.
- 정혜윤 『마술 라디오』(한겨레, 2014) 56쪽 중에서


 <글머리 사진> @ seantookthese,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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