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인가?
절망, 미래에 대한 긍정적 전망을 상실하다
내가 말했다, 앞으로 딱히 연애를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아, 그 영역은 내가 발을 들일 수 없는 영역이 됐지. 친구가 답했다, 니가 걔 땜에 트라우마가 쎄게 박혀서 그래. 아니야 그거랑 상관없어, 그리고 나도 쓰레기였음.
트라우마랑 상관없다. 사실 좀 뻔한 얘기다. 취업길이 막막한데, 듣자하니 또래애들은 직장있는 남햏들을 선호한다. 친구놈에게 소개팅을 해달라는 여햏들의 제안이 몇 들어왔다. 다들 직장인을 원했다. 그럴 법하다. 흔히 이 나이 때쯤에는 결혼을 해야한다는 한국의 풍습이랄까 그런 게 있으니까. 딱히 결혼이 아니더라도 나라도 안정된 직장있는 남자를 선호하겠다싶다. 안정된 건 좋은거잖나. 뭐하러 '더' 굴곡진 삶을 만나서 안그래도 피로한 삶을 더 피로하게하나?
그렇다고 내가 막 취업에 열심히냐, 하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 회사에 들어가면 회사에 충설할 것이냐, 하면 얼마 못가서 나올 팔자다. 사주팔자를 보신 분이 '군대에서 자살할 팔자'라고까지 할 정도니까. 굳이 사주팔자가 아니더라도 내가 애초에 어떤 조직에 속해있는 걸 좋아하는 인간이 아니다. 소속감을 가지는 것이 좋을 때로 물론 있긴하지만, 조직들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비효율에 쉽게 역겨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 인생은 안정된 뭔가가 없이 계속 뭔가를 벌리면서 살아가는 삶이 될 테다. 그렇다고 지금의 내가 막 프리랜서여서 뭔가 일거리가 들어오면 일을 해주고 돈을 받는 삶을 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원하는 직장이 일자리를 내기만을 그저 하염없이 기다리는 중이다. 그런데 자리가 안 생긴다. 마음에 안드는 곳에라도 가야하나? 내가 너무 사치를 부리고 있나?
우울한 이유는 앞으로도 계속 이런 길을 걸을 것 같아서다. 혼자 사는 재미도 있기야 하지만, 나는 조직형 인간만 아닐뿐, 꽤나 사람과 이야기하다고 소통하는 것을 좋아한다. 연애하던 때의 나란 인간이 전에 비해 꽤나 밝았던 것도 아마 그런 이유였을 테다. 그런데 앞으로 딱히 내가 다시 그런 인간이 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사랑받을 수 있을 것인가? 딱히, 아름다운 전망이 안된다.
연애, 능력의 문제?
난 내가 잘하는 몇가지들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고, 또 내가 못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인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어떤 사안에 대해 글을 써서 사람들의 공감을 살 수 있다. 그런건 어렸을 때부터 딱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냥 원래 잘했다. 다들 그런 거 하나씩 있잖나. 또, 나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할 때 그에게서 신뢰를 얻어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남들에게 말 못할 비밀들을 털어놓는다. 내가 그들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빠르게 이해하고 공감하기 때문이다. 이것도 내가 원래 잘하던 거다. 애초에 이쪽에 관심이 많아서 여러 서적들을 읽기는 했었지만.
나는 못하는 것들도 많다. 난 순발력이 떨어진다. 대학생 토론대회에서 13회 입상한 적이 있긴하지만, 갑자기 어떤 자리에서-예를 들면 술자리에서 나를 일으켜세워서 "한마디 해봐라"하면 나는 어버버한다. 동아리 토론대회에서 심사위원장이 되었을 때는 사회를 보는 놈이 갑자기 미리 내게 알려주지 않았던 환영사를 시켰는데, 그때도 어버버했다. 애초에 내가 순발력이 뛰어난 인간이 아니다.
토론대회에서 상들을 받았던 건 내가 순발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준비를 철저히 했기 때문이다. 철저한 준비를 하면 자연스레 상대방이 예측하지 못했던 논리를 끌고와도 순발력 있게 대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미래창조경제부가 주관했던 2014년 ICT 대학(원)생 토론대회 결승전에서 연세대팀은 "빅데이터를 관리하는 어떤 정부조직 프로그램"을 가져와서 주장을 펼쳤다. 그 프로그램은 연세대팀이 토론대회를 위해서 기획한 것이니 우리는 미리 그것에 대응할 반박 논리를 짤 수 없었다. 연세대팀은 기업들이 자신들의 빅데이터를 공유하지 않으려 할 것이므로 정부조직이 빅데이터를 주체적으로 수집하게끔하고, 다른 기업들이 정부조직이 수집한 빅데이터에 접근하려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빅데이터를 제공해서 정부 빅데이터에 접근하는 티켓을 얻는 식의 프로그램을 짜왔다. 다른 기업들은 타기업이 제공한 빅데이터를 이용하기 위해 자신들의 빅데이터를 제공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빅데이터가 양적으로 늘어나서 빅데이터가 더 큰 빅데이터가 된다고한 것이다.
가만히 들어보면 뭔가 그럴듯한 프로그램이었다. 그런데 그 때 번쩍하는 뭔가가 머리에 핑 돌았다. 정부의 빅데이터에 접근하기 위해 정부에 빅데이터를 제공해야한다면, 굳이 기업들이 질 좋은 빅데이터를 제공할 이유가 없다. 싼 값에, 그리고 경쟁하는 타기업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주지 않기 위해 기업들은 쓸모가 별로 없는 질 안좋은 빅데이터를 제공하며 타사의 빅데이터를 이용하려 할 것이고 그렇게되면 자연스레 정부가 관리하는 그 프로그램이 수집하고 있는 빅데이터는 쓸모없는 빅데이터들의 집합이 될 터였다. 이런식으로 반박해서 결국 이겼다. 순발력 때문이라기보다는 빅데이터에 관한 여러 생각들을 토론대회 전에 미리 했기 때문에 가능한 대응이었다. 어째 못하는 거 이야기한다는 게 자랑이 됐네(자소서는 이렇게 쓰는 겁니다 여러분).
내가 못하는 것들은 이외에도 많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데 그 사람들이 서로 아는 사이일 때 나는 그 중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못한다. 길거리에서 어떤 여성에게 반해도 말을 걸지 못한다. 흥겨운 노래가 나와도 춤을 추지 못한다. 셀카를 못 찍는다. 그리고, 아마 연애도 이제 여기에 포함될 거 같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가 좋아하는 여성에게 사랑받는 거, 그거는 내가 못하는 영역의 일이 될 듯 하다. 사랑받는 것도 일종의 재능이 아닐런지? 그리고 나는 그쪽으로 재능이 없는 듯 하다. 노오력이 부족한가?
수요와 공급
나는 이별 후에 몇몇의 여성에게 나름대로 들이댔으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내가 들이대는 방식이 잘못되었다면 이건 나의 재능이 문제이고, 방식의 문제인게 아니라 그냥 내가 나인게 문제라면 이건 수요와 공급의 문제일 게다. 내가 그쪽 수요에 맞는 공급이 아닌게지. 그리고 내가 최근에 잠정적으로 확정한 게 하나 있다면, 내가 나를 바꾸지 않는 한 나라는 '공급'을 수요할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단순히 아직 나타나지도 않은 미지의 연인을 위해 나를 바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니까 내 인생은 이미 망했다. 홀로 사는 삶이 무슨 의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