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 장면 연출의 가이드라인
시작하며
이 글은 <강간 장면, 어떻게 연출되어야 하는가?- 1>에 이어지는 글이다. 나는 앞에서 했던 이야기를 굳이 반복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앞의 글을 먼저 읽고 오시는 것을 권장한다. 참고로 이 글은 영화나 드라마, 애니 등 대중매체에서 연출되는 강간 장면을 중심으로 다룬다. 포르노는 언급될 수는 있을지언정 논의 대상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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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글에서 나는 강간 장면이 왜 금기시, 법적 제재가 아닌, 가 되고 있는지에 대한 썰을 풀었다. 어떤 이들은 강간이 현실 세계에서 금지되고 있는 행위이므로 그런 장면을 찍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고(1), 어떤 이들은 강간 행위를 보는 게 너무 괴롭우니 그런 장면을 찍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고(2), 어떤 이들은 강간 장면 자체가 쓰이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으나 그 장면이 관객이나 시청자를 위한 유희 거리로 활용되는 일은 있어선 안된다고 주장할 것이다(3). 나는 (1)과 (2)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고, (3)의 주장에 동의하는 바다. (그 근거는 앞선 글에서 적었다)
강간 장면에 대한 주장들 중엔 (1), (2), (3)을 제외한 다른 주장들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글은 그런 다양한 주장들을 다루진 않을 것이다. 이 글의 제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겠지만 필자는 애초에 강간 장면 자체를 '금지'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만약 내가 강간 장면 자체를 금지하는 것에 찬성했거나, 혹은 의문을 가졌다면 <강간 장면, 연출해도 되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썼을 것이다. 이 글은 강간 장면이 연출하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으나 그 장면이 어떤 식으로 연출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가, 에 대한 고민으로 시작되었다.
당연한 것에 질문을 던지는 일이 필요한 이유
"그건 그냥 당연한 거죠"라는 답이 나올 게 예상되는 질문들이 있다. "살인을 왜 하면 안 되냐?", "강간은 왜 하면 안 되냐", "범죄를 저지르는 건 왜 안 되냐?"같은 질문들엔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냐"같은 답이 거의 항상 따라붙는다. 하지만 당연한 것에 물음을 던지는 일은 필요하다.
어떤 행위를 반대할 때 그 이유들은 제각각 다르고, 또, 걔 중엔 합리적이지 못한 근거 없는 주장 혹은 반인권적인 대답들도 있다. 예를 들어 인도의 아저씨들은 "왜 강간을 하면 안 됩니까?"라는 질문에 "피해자 여성의 가족에게 수치가 되기 때문이다"라는 답을 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동의하기 어려운 대답이다. 동의하기 어려운 대답들은 솎아내야 한다.
또한 어떤 일을 '당연하게' 생각할 때, 오히려 그것들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적어도 내 주변에 '당연한 답이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질문'에 성실히 답을 하는 이들은 해당 사안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해봤던 사람들이었다.
강간이란 소재를 유희로 활용하는 것
1. 강간이란 소재를 유희(joy)로 활용하는 것은 왜 지양되어야 하나? 이 질문은 소재를 바꿔도 크게 논의의 방향이 달라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살인이란 소재를 유희로 활용하는 것은 왜 지양되어야 하나?"라는 질문으로 바꿔도, 느낌은 크게 다르진 않다. 이 두 질문이 유사해 보이는 이유는 부도덕한 행위로 여겨지는 살인이나 강간을 유희로 활용하는 것에 대한 반감 때문이다.
2. 그럼 부도덕한 행위를 유희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왜 지양되어야 하는가? 한국의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속한 교수들이나 그들을 포함한 꼴통 아재들은 아마 "청소년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라고 할 게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2.5 나는 그들이 꼴통이라서 무조건 반대하는 건 아니다(오히려 그들의 주장 때문에 그들을 꼴통이라 부른다). 그들을 반대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특정 콘텐츠가 '청소년들에게 미칠지도 모르는 가능성' 때문에 어떤 콘텐츠가 제약받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는 필요 이상으로 심각하게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킬 수 있고, 실제로 방심위는 그런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실제로 안 좋은 영향이 끼치는 것이 분명해질 때, 그때 제재를 하는 것은 반대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럴듯한 느낌만을 근거로 제재를 한다? 이건 전혀 다른 이야기다. 둘째, 어떤 콘텐츠가 정말로 누군가에게 유해하다면 '청소년'만이 대상이 되어선 안된다. 또한, 강간 장면을 다루게 될 때, 그 장면을 보게 될 사람은 대부분 성인들이기에 논의는 청소년을 포함한 성인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3.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와 보자. 강간이란 소재를 유희로 활용하는 것은 왜 지양되어야 하나? 나는 어떤 콘텐츠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사실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강간물이 많아진다고 강간이 늘어날 거라 생각하지도 않고, 폭력적인 비디오 게임이 늘어난다고 사회의 폭력이 증가한다고 믿지도 않는다(오히려 유럽이나 미국에선 폭력적인 게임이 늘어날 때 폭력이 감소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폭력적인 게임이 폭력을 늘리는 데 일조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4. 내가 특정 강간 장면에 분노하는 이유는 작가가 강간 장면을 활용하는 방식에 분노하기 때문인데, 이는 성적 욕망을 해소시켜주기 위해서 디자인된 강간 장면 그 자체가 사회에 끼칠 영향 때문이라기보단, 작가나 작가의 시선이 담긴 작품이 천박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어떤 영화의 강간 장면에다 대고 '이건 이래서 잘못되었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라고 하는 건 작가의 천박한 시선에 대한 비판이다. 또한, 그 비판을 통해 그런 시선이 사회에서 점점 줄어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강간은 살인에 버금가는 악한 행위이고, 그렇게 그려져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강간 장면, 어떻게 연출되는 게 바람직한가?
0. 다음부터 내가 쓸 글은 이 기준에 맞게 법적으로 제재해야 된다는 선언은 아니다. 이 가이드라인에 따라 연출하는 게 좋다는 의미다.
1. 강간은 법적으로 범죄이고, 윤리적으로 타인의 자유를 제약하고 침해하는 행위이므로 이는 마땅히 근절되어야 하고 영화나 애니 등의 콘텐츠에서도 '근절의 대상', 사라져야 할 행위,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로 묘사되어야 한다.
2. 강간 장면은 성적으로 소비되며 강간이란 행위의 본질을 흐리게끔 묘사되어선 안된다. 명백히 타인을 고통스럽게 하는 행위는 그런 성격을 베이스로 그려지거나, 상황적 묘사를 하고 구체적 행위의 연출은 생략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적으로 유린되는 여성의 몸매가 부각되는 연출은 지양되어야 한다.
3. 강간 장면의 피해자가 그 강간을 통해 각성을 한다거나 하는 식의 묘사는 있어선 안된다. 이는 자칫 강간의 긍정적인 면인 것으로 포장될 수 있다. 최악은 강간의 피해자가 강간한 자와 사랑에 빠지는 경우다.
4. 한 여성이 강간당하는 것을 통해 각성하는 제3의 인물이 등장해서도 안될 것이고, 각성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감정도 그 강간을 통해 느껴선 안될 게다. 이렇게 되면 정작 강간이란 행위의 피해자가 제삼자를 각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버린다. <왕좌의 게임>에서 산사가 람제이 볼튼에게 강간당하는 장면이 여기에 해당한다.
5. 강간의 구체적 장면이 필요하지 않을 땐 상황적 묘사만으로도 충분하다. 한국 드라마 <굿와이프> 2화에서 강간 장면이 이런 식으로 연출되었다. 해당 드라마에선 술에 취한 한 여성이 침대에 눕혀지고, 다음 쇼트(shot)에서 눈물에 젖은 얼굴로 이불을 덮고 있는 여성이 등장하고, 그다음 쇼트에서 돈을 뿌리는 남성이 등장한다. 하지만 시청자는 이미 강간이 일어났다는 걸 알고 있다. 상황 묘사만으로도 충분할 때는 그렇게 하면 된다. (잘된 강간 연출이나 쓰레기 같은 강간 연출은 다른 글에서 더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6. 강간이란 행위를 정당화해선 안된다. "너는 이런 죄를 지었으니 강간당해야 한다"라는 식의 대사를 치는 남자가 등장하고 해당 매체가 그 남성을 옹호하는 것은 지양되어야 한다. 여자가 X년이건 남자가 상처받았건, 강간이란 행위가 정당화될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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