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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우 Oct 03. 2016

샤덴프로이데-너의 불행이 나를 행복케하리라, 라는 말


샤덴프로이데라는 단어를 처음 내게 알려준 것은 미드 <Boston Legal>이다. 시즌2의 1~2화에서 변호사인 주인공 앨런 쇼어(위 사진에서 중앙)는 배심제에서 살인 혐의를 쓴 한 여성을 변호하는데, 최종변론을 할 때 "샤덴프로이데"라를 단어를 쓴다. 


드라마 속에서 앨런 쇼어의 최종 변론은 다른 변호사들에 비해 항상 긴 편인데, 그는 이 때 최종변론을 총 세번을 나눠 한다. 최종변론을 하고 '이정도면 배심원들이 설득당했을 거 같냐'는 시선을 그의 동료이자 상사인 대니 크레인에게 보내는데 대니 크레인은 고개를 젓는다. 그래서 최종 변론을 이어가고 또 시선을 보내지만 대니는 또 고개를 젓는다. 앨런 쇼어는 이제 마지막이라는 듯 최종 변론을 잇는다. "샤덴프로이데"


샤덴프로이데 Schadenfreude

샤덴프로이데 Schadenfreude는 독일말이다. Schaden' (손실, 고통)과 'Freude' (환희, 기쁨)의 합성어인데, 뜻은 타인의 고통을 보고 느끼는 기쁨이다. 앨런 쇼어가 변호를 하고 있던 자는 돈이 많은 한 남성의 부인이자 미모의 여성이었다. 그는 남편을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고, 앨런 쇼어를 통해 무죄를 주장했다.



남편이 부자였다는 사실과 그녀가 미모의 여성이라는 점은 중요하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앨런 쇼어가 "샤덴프로이데"라는 단어를 쓴 것이기 때문이다. 앨런은 배심원들에게 '만약 그녀에게 유죄를 선고한다면 이는 당신들이 그녀의 고통을 통해 기쁨을 느끼고 싶어해서다'라는 식으로 변론을 한다. 돈 많은 미녀의 몰락을 보고 싶어하는 추악한 인간들은 유죄를 선고할 것인데-당신들이 그런 종류의 추한 인간들이 아니라면 그녀에게 무죄를 줘라, 라고 약을 파는 거다. 앨런은 이 최종변론을 통해 배심원들에게 무죄를 받아낸다.


(사족1, 한국의 국민참여재판에서 배심원들의 의견은 그저 판사들의 참고 사항일 뿐이지만, 미국은 다르다)

(사족2, 약을 파는 것이라고 한 이유는 "샤덴프로이데"로 시작하는 이 최종변론엔 합리적인 판단 기준이 조금도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변론이 적절한 이유는 어차피 배심원들이나-다른 종류의 재판에서의 판사들-은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변론이 있거나 없거나 어쨋거나 배심원들은 감정을 섞어 판단을 내릴 것이다. "샤덴프로이데" 최종변론은 그 판단들의 방향을 틀기 위한 것이니 해볼만한 변론이라 말할 수 있다)


타인의 감정과 나의 감정

타인의 고통을 보고 느끼는 기쁨을 나타내는 말은 우리나라에도 있다. '고소하다', '꼬시다'가 이에 해당한다. 이와는 반대로 타인의 기쁨을 보고 느끼는 고통을 표현하는 말도 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라는 속담이 여기에 속한다. 이 속담에서 '배가 아픈 자'가 배가 아픈 이유는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볼 수 있다. 


배가 아픈 이유(1)- 땅을 사고 싶었으나 사지 못했다.

사촌이 땅을 샀을 때 배가 아팠던 자는 땅을 사고 싶어했음에도 불구하고 땅을 사지 못했거나 원하는 만큼의 땅을 사지 못했을 수 있다. 그렇기에 이렇게 해석을 해보면 배가 아픈 이유는 타인의 기쁨에 대한 고통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신이 달성하지 못한 것을 타인이 달성했을 때 느끼는 감정과 더욱 닿아있다고 볼 수도 있다.


배가 아픈 이유(2)- 저놈이 기쁜 게 그냥 기분이 나쁘다.

사촌이 땅을 산 게 기분이 나쁜 이유는 '나'는 불행한데 저놈은 자신과 달리 기쁘기 때문일 수 있다. 여기에서 '나'는 중대한 착각을 한다. 사촌이 땅을 샀으니 기분이 좋을 것이라는 착각. 사촌은 그저 땅을 샀을 뿐이고 사촌의 기분이 어떤 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제멋대로 사촌의 기분을 판단내리고 자신이 불행할 이유로 삼아 버린다.


타인의 기쁨은 곧 나의 기쁨-무디타

타인의 기쁨을 기쁨으로 받아들인다는 감정상태를 표현한 말도 있다. 무디타(Mudita, 喜)가 이에 해당한다. 무디타는 불교용어인데 주처 중 하나이다. 주처(住處)-사무량심(四無量心)은 원어로 브라마 비하라(Brahma Vihara)이며, 일반적으로 범주(梵住)로 번역한다고 한다(참고글).


사무량심 四無量心은 중생(衆生)을 한없이 어여삐 여기는 네 가지 마음인데, 여기에는 메타(Metta, 慈), 카루나(Karuna, 悲),  무디타(Mudita, 喜), 우펙카(Upekkha, 捨)가 있다. 무디타는 다른 이들이 행복할 때 질투의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기쁨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완벽한 자립의 상태

책 <미움받을 용기>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자립이다. 자립이라 함은 타의나 타력에 의해 감정에 기복이 생기지 않는 자존감 높은 상태를 말한다. 그러니 자립을 한 상태에선 타인의 평가로 스크래치가 생기지 않고 당연하게도 타인이 뭘하건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타인이 땅을 사건, 타인이 기분이 째지건 나의 불행에는 조금도 기여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자립은 모든 것을 초월한 상태를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자립을 한 상태에선 타인의 불행에 기쁨을 느낄 이유가 없다. 타인의 불행은 그저 타인의 일일 뿐이기 때문이다. 무디타-타인의 기쁨에 기쁨을 느낄 이유도 없다. 그 역시 그저 타인의 일일 뿐이고 나와 직접 관련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혹자들은 샤덴프로이데를 두고 인간의 악한 면이라고들 하고, 무디타가 주처인 것을 보면 불교인들은 그것을 선한 것이라고 판단한 듯 보이는데, 두 종류의 상태는 모두 자립-초월의 상태와는 거리가 먼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타인의 감정 상태에 따라 '나'의 감정 상태가 변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타인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초월하는 자는 무엇을 통해 기쁨을 느끼나? 오로지 자신이 세운 잣대에 의해 기쁨을 느끼고 슬픔을 느끼나? 격한 감정의 격동을 느끼지 않는 고용한 마음의 상태-아타락시아나 어떠한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아파테이아의 경지가 초월자의 경지에 가깝지 않나 생각해본다. 마음 공부는 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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