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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우 Oct 22. 2016

낙태금지를 통해 출산율을 올린다는 박근혜 정부의 추태

#세계최초 #창조출산

낙태 이슈가 뜨거워진 이유

낙태에 대한 이야기로 뜨겁다. 보건복지부가 낙태 시술한 의사의 면허를 박탈하겠다는 법안을 입법예고했기 때문이다. 이에 산부인과 의사들은 11월부터 낙태 수술을 전면 금지하겠다고 나섰다. 멀리서보면 의사들이 보건복지부와 합이 잘 맞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오히려 보건복지부에 반기를 들고 있다. 김동석 대한산부인과의사회 회장은 지난 9일 그랑서울 나인트리컨벤션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의사 처벌 위주의 무책임한 정책보다 낙태수술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우선”이라 했다(클릭).


의사들은 여성의 낙태의 권리를 위해 움직인다기보다는 자신들의 면허 때문에 강경하게 대응하는 느낌이긴한데(낙태 시술 자체가 그들에게 쏠쏠한 돈벌이이기도 할 것이다), 의사들의 이런 보이콧은 낙태를 하려는, 그리고 할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위협이 된다. 의사들의 '우리 이제 낙태 시술 안함'은 결과적으로 낙태 권리 박탈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수면 아래에서 할 수 없게 될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다.


낙태를 둘러싼 여러 논쟁

낙태 권리를 둘러싼 논쟁은 크게 다음과 같다. 여성의 낙태 권리와 태아의 생명권 중에 무엇이 중한가하는 논쟁(1), 낙태는 원칙적으로 금지되지만, 특수한 상황에는 허용하는 것은 괜찮지 않냐는 논쟁(2)이 여기에 해당한다. (2)는 이 글에서 다루지 않고 다른 글에서 기회가 되면 다루겠다.


낙태는 여성의 권리라는 주장

낙태가 여성의 권리인지 여부는 따져봐야한다. 이것을 따져봐야하는 이유는 많은 이들이 여전히 낙태를 여성의 권리로 생각하지 않고, 여성의 악행(생명을 죽이는 행위)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낙태가 여성의 권리라 주장되어지는 이유는 여성의 자궁에 씨앗이 머물고, 그 씨앗이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쳐 생명이 되기 때문이다. 즉, 씨앗이 여성의 자궁에 머무는 시점부터 여성은 씨앗과 한 몸이 된다.


이 지점에서 씨앗은 여성에게 있으므로 씨앗에 대한 모든 권리는 여성에게 있다는 것이 낙태는 여성의 권리라는 주장의 한 축이다. 여성이 씨앗을 완전한 아이로 출산하는 것을 원치않는다면 여성은 낙태라는 옵션을 택할 수 있는데, 그 옵션을 채택할 수 없는 경우에 그녀는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을 해야한다. 따라서 낙태를 원함에도 낙태가 이러저러한 이유로 막히는 시점에서 권리 침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부모 중 여성만이 낙태를 원하는 경우

그럼 질문이 던져진다. 부모 중 여성만이 낙태를 원하는 경우에 낙태는 허용해야할까? 강간이 아닌 성관계를 가진 뒤 임신에 성공하였으나 남성만이 출산을 원하는 경우에 낙태는 여성 단독으로 원한다는 이유로 시행되어도 될까? 둘 모두가 아이를 원치 않는다면 이 케이스는 다시 '여성의 권리가 중한가 생명이 중한가'라는 논쟁으로 돌아가지만 이 경우는 다르다.


(참고로 한국에선 강간을 통한 임신을 제외한 임신에는 낙태를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는다. 한국의 법적 환경을 배제하고 사고실험을 해보자는 것이다)


남편과 성관계를 한 여성이 임신을 한 뒤 산부인과를 찾아가서 낙태를 하겠다고 말했다고 해보자. 이 경우에 병원은 남편의 낙태 동의 여부를 요구할 수 있을까? 씨앗은 비록 여성의 몸에 있지만, 그 씨앗은 남성에게서 왔다. 따라서 여성의 뱃속에 태아에 대해서 남성도 권리를 가질 수 있다는 주장은 가능하다. 일명 "싸튀충"(검색해보라)과는 경우가 다르다. "싸튀충"은 권리 주장을 할 수 없는 반면(튀었으니까), 남편은 그 태아에 권리 주장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이런 주장은 씨앗은 여성의 몸에 귀속되어있으므로 이에 대한 전면적인 권리를 가진다는 '낙태는 여성의 권리다'라는 주장과 마찰을 일으키게 된다. 낙태가 오로지 여성의 권리라면 남성이 낙태를 원하건 원치 않건 이는 임신을 한 여성에게 달려 있다. 따라서 이런 경우엔 임신한 여성은 어느 경우에건 병원에서 '남성 보호자의 동의는 구했냐'는 질문 없이 낙태를 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임신은 여성이 혼자 할 수 없는 것이고, 남성도 관여한 바, 남성을 전면배재한다는 주장을 채택하기 어렵다.


이런 경우엔 남성의 권리와 여성의 권리를 저울질해서 무엇이 더 중한 권리인지를 살펴봐야한다.



태아는 여성의 몸에서 장기간 머물고, 또 세상 밖으로 나올 때 여성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고, 출산 이후의 여성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런 책임을 감수하고 싶지 않다면, 그리고 감수할 수 없다면 않다면 여성은 낙태를 할 수 있어야한다는 게 낙태 찬성론자들의 의견이다.


실제로 임신으로 인해 남성이 감수해야할 책임은 여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 육체적으로는 자유롭고, 경제적 책임을 물어야할 수도 있지만 그마저도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법적으로 귀속되지는 않는다. 설사 사회적 합의를 거쳐 임신과 출산 그리고 양육을 감당한 여성에게 물리적, 경제적 지원을 해준다고 해도, 여성의 입장에선 남성이 어느 순간 자신의 인생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 불투명한 미래에 베팅하고 싶지 않다면 낙태는 임신한 여성에게 있어 생존수단 중 하나일 수 있다.


남성은 원하고 여성이 원치 않는 경우

남성은 낙태를 원하고, 여성은 낙태를 원치 않는 경우는 어떨까? 씨앗이 여성에 귀속되어있으므로 여성이 하고 싶은대로 해도된다는 주장을 한다면 낙태는 불가능할 것이다. 게다가 낙태는 애초에 여성의 몸에 칼을 들이대는 것인지라 남성 일방이 원한다는 이유로 낙태가 가능하다는 건 심각할 정도로 여성-개인의 신체를 제약한다고 말할 수 있다.


생명에 대한 이야기

흔히 낙태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면 나오는 이야기들이 있다. 언제부터 태아를 '생명'으로 인정해줄거냐는 거다. 필자는 그 부분에 대해선 다루지 않을 생각이다. 필자가 생물학에 관한 지식이 없어서라기보다는(모르는 건 공부하면 된다), 그런건 별로 중요치 않아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배아나 태아 그리고 출산이 된 아이에 관한 사고실험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어느날 산부인과에서 불이 났다고 하자. 당신은 살아있는 한 아이를 품에 안고 있고 불길에 휩쌓여있다. 더 지체하면 당신과 아이는 죽을 것이다.

주위에는 배아나 태아 세포 등이 보관된 병들이 보관되어있는데, 그것들은 특정한 상황에 놓이게 되면 지금 당신이 안고 있는 아이처럼 하나의 생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것들은 생명이 될 수도 있는 것이지 아직은 생명이 아니다. 당신은 그 병들을 깨뜨려서 불들을 끄며 앞으로 전진하며 탈출을 시도할 수도 있고, 다른 방법을 찾을 수도 있다. 어떻게 할텐가?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필자는 그 병들을 깨뜨릴 것이다. 내 생명과 내 품에 있는 아이의 생명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생명이 될 수 있는 것보다 생명인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낙태를 통해 출산율을 올리겠다는 박근혜 정부

박근혜 정부-보건복지부 같은 경우는 어떤 입장에서 낙태를 더욱 강경하게 금지하려고하는 것일까? 표면적으로 보면 그들은 '생명'의 편에 서있는 듯이 보인다. "낙태는 살인이다"라는 흔한 프레임으로 낙태 이슈에 접근하는 듯이 보인다. 낙태는 '불법'이고 '나쁜 것'이니 그것을 더 엄히 단속하여 '생명'도 살리고 출산률도 올리면 정부의 입장에서 일타쌍피라 생각하는걸까? 이런 프레임은 보건복지부가 주최한 <낙태예방을 위한 사회협의체 공모전>에 입선한 포스터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아래를 참고하라.




필자는 지금까지 출산율에 관한 많은 글을 썼었다. 일과 가정의 양립에 성공하여 출산율을 성공적으로 상승시킨 유럽 각국의 정책에 대해 글을 쓰기도 했고, 혼외 자식을 지원해주는 프랑스의 팍트 제도에 대해 글을 쓰기도 했었다. 그 과정에 전세계의 입양, 보육, 출산 정책들을 훑어봤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말이다. 지금까지 세계의 어느 정부도 낙태를 출산율과 연결지어서 정책을 펴진 않았다. (혹여나 타국의 케이스가 있다면 제보 바란다)


낙태를 통한 출산율 정책이 전시 행정인 이유는 지금 우리나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 전혀 감을 못잡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정부의 지원이 턱없이 부족하여 애를 낳아도 생이별하는 케이스가 넘친다. 최근에 한 뉴스가 있었다. 자식을 키울 여건이 안되어서 친척에게 보냈는데 그 친척이 아이를 살해했다는 뉴스. 이런 비극적인 뉴스가 계속해서 나올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경제적인 여건으로 인해 아이를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여성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노오력'하여 아이를 키우라고 하는 것보단 사회가 먼저 사회적인 책무를 다하는 게 먼저다.


"아이는 버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에요.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지, 결코 버린 게 아니란 말입니다"
`입양의 날'인 11일 서울 중구 사회복지모금회 대강당에서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자식을 남의 품으로 떠나보내야 했던 어머니의 한맺힌 절규가 듣는 이들의 눈물을 자아냈다.

김모(37)씨는 "1999년 스물 넷의 나이에 혼자 딸을 낳아 친권포기각서를 쓰고 입양기관에 맡겼다"며 "처음에는 모성애를 못 느꼈는데 막상 아이 얼굴을 보고나니 도저히 보낼 수 없어서 돌려달라고 애원했지만 각서와 경제력을 이유로 들어주지 않았다"고 흐느꼈다.

그는 "어떻게든 키우고 싶었지만 가진 게 없었고, 같이 살 곳이 없었다. 버리고 싶어서 버린 게 아니었다"며 "아이를 보내고 나서 미칠 것 같아서 못 마시는 술도 마시고 별짓을 다했었다"고 고백했다.

김씨는 "내 말 한마디가 다른 미혼모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에 이 자리에 섰다"며 "정부가 나서서 엄마가 혼자서도 아이를 키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그래도 안되면 입양을 추진하는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고 호소했다.

1976년 18살에 낳은 아들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미국으로 입양보냈다가 29년만인 2005년에서야 상봉한 노금주(52)씨도 용기를 내 마이크를 잡았다.

노씨는 "노름에 빠진 남편이 젖도 안 나오는 나를 끌고가 피를 뽑아 팔게 했었다"며 "남편 정신 차리라고 20일 정도 집을 나온 사이 다른 가족들이 아이를 입양 보내버렸다"고 말했다.


타국가에서 입양이 된 아이들은 부모가 없는 고아인 경우가 다반사다. 그런데 Made in KOREA 입양아들은 부모가 있다. 한국의 여성들이 특별히 모성애가 부족하기 때문일까? 아니다. 한국의 보육, 육아에 관한 복지가 엉망이기 때문이다. 이런 고질적인 문제를 고치지 않은 상태로 낙태를 금지해봐야 출산율이라는 숫자만 오를 뿐이다. 출산율이 올라도 그 아이와 부모가 불행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나? 기껏 낳은 아이가 해외로 '수출'된다면 그건 또 무슨 의미가 있나?



미혼모에  대한 지원, 미혼부에 대한 지원, 동거부부의 자식에 대한 지원, 결혼에 대한 지원,  결혼한 부부의 아이에 대한 육아, 교육 비용에 대한 지원 등등에 대한 정부의 책임은 뒤로 밀어둔 채, 여성의 비윤리적인 행태가 저출산의 원인이라는 듯 낙태라는 카드를 들고 흔드는 꼴이 영 불편하다. 무상보육이라는 박근혜 정부의 공약-책임도 지키지 않은 상태에서 시민들에게 저출산의 책임을 묻는가? 적당히 뻔뻔해라. 적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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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스트 박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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