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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우 Mar 29. 2017

<채식주의자>: "왜 살아야 해?

<채식주의자>를 읽은 분들을 독자로 전제하여 글을 작성했습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에는 여러 코드가 담겨 있다. 피해자로서의 여성과 가해자로서의 남성이 존재하기도 하고, 정상과 비정상의 코드도 있고, 삶에 대한 상반된 태도-코드도 내재되어 있다. 흥미로운 부분은 양극단에 속한 코드들이 소설을 읽으면 다르지 않은 듯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가령, 삶을 왜 살아야하는 지 의문을 품는 채식주의자 영혜와 그런 의문을 품지 않고 우직하게 삶을 버텨내는 언니 인혜의 태도는 겉으로 보기엔 서로 다른 듯 보이지만 껍질을 까보면 그다지 다르지 않은 듯한 느낌을 준다. 영혜도 인해처럼 그만의 방식으로 살아있다고 할 수 있고, 인해도 영혜처럼 죽어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다"과 "죽어있다"라는 말이 서로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삶의 이유
'정상인' 인해와 '비정상인' 영혜

독서 모임에서 이 책을 읽고 토론을 한 이후 멤버들은 모두 울적해졌는데 그건 아마 이 책에 담겨 있는 일종의 허무주의 때문인 듯 하다. 인해는 누구보다도 적극적인 삶을 살고 있고 세인들의 눈을 통해 보기의 그녀의 삶은 꽤나 성공적인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쥐뿔도 없는 예술가 남편을 부양하며 그런 남편에게 지점을 차려줄 정도의 여유도 있다.


하지만 알고보면 그는 그를 위해 살기보다는 누군가를 위해 살고 있다. 한 때는 아버지에게 식사를 해줬고, 나중에는 쥐뿔도 없는 예술가를 서포트했고, 그 이후에는 '정신병'에 걸린 인해를 지켜주는 유일한 사람이 된다. 아버지와 예술가와 '정신병'에 걸린 동생이 없었다면 인해의 삶은 어떻게 됐을까? 지켜줘야할 누군가가 없었다면 인해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그는 지켜야할 누군가를 통해 삶을 살아내야할, 버텨내야할 이유를 찾아냈다. 


그런 이유가 사라졌을 때 인해는 인해의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인해의 삶 속에 인해는 없었다. 이런 지점에서 본다면 영혜는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삶에 충실했다고 할 수 있지만, 소설 속에서 영혜는 세인들에게 "정신병자"로 통하고 정신병동에 '치료'를 받는다.


삶에 대한 회의

소설을 보고 우울했던 이유는 소설에 베여있는 삶에 대한 허무주의적인-나는 이렇게 표현할 것이다-태도에 어느 정도 공감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소설 속에서건 밖에서건 많은 이들은 '산다는 것'에 대해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사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어떻게 살 것인가'가 주요 토픽이 된다. 


그런데 소설 속 영혜에게 산다는 건 당연한 게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묻는다. 왜 살아야하느냐고. 누구보다 필사적으로 삶을 사는 인해는 그 질문에 설득력있는 답을 하지 못한다. 아마 아무도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과 무관하게 인해는 설득당하지 않을 것이다.


왜 살아야하나?

인해가 영혜에게 살아야하는 이유에 대해 논리적인 장광설을 펼쳤다면 독자들은 오히려 괴리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채식주의자>는 '왜 살아야하는가'라는 질문 자체를 다루고 있지 그에 대해 명확한 답을 주는 것에는 딱히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긍정을 쏟아내는 소설들에 우리가 익숙하긴 하다.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들이 그렇고, 함께 언급하여 파울로 코엘료에게 죄송한 마음이지만 귀요미, 아니 기욤 미소의 소설에도 삶에 대한 긍정이 담겨 있다. 그의 소설 속에는 거의 항상 삶에 회의를 품는 성공한 전문직종의 남성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얼마안가 삶을 찬양한다. 코엘료와 기욤 간의 차이가 있다면 삶을 바라보는 통찰력의 깊이 정도일까. 한쪽이 바다나 호수정도 깊이의 통찰력을 가졌다면 한쪽은 신도 버린 도시에 남겨진 연못 정도의 깊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엘료나 (필자는 아니지만) 기욤의 소설에 빠지는 자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어쨋거나 삶을 버릴 수 없는 이상 삶을 살아내야하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허지웅이 쓴 <버티는 삶에 관하여>(이하 <버티는 삶>이 일종의 히트를 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버티는 삶"이란 단어 자체가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버티는 삶>이 흥한 이유는 삶이 즐겁고 행복해서 삶을 산다기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티는 인생들이 많기 때문이리라. 


필자는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삶을 버티는 중이고, 삶을 살아야할 이유를 끊임없이 찾고 있다. 동기부여 서적이나 동영상을 찾아보는 이유는 살아야할 이유를 찾고 또 반복해서 숙지하기 위해서다. 그게 정답이라서라기보다는, 그렇게 해서라도 삶을 긍정하지 않으면 삶이 너무도 고통스러워서다. 그런 것들은 '진실'을 잊게해준다. 그리고 할법한 질문을 하지 않게끔 뇌를 굳게 만들어준다. 


<채식주의자>를 나중에 또 읽지는 않을 것 같다. 또 한동안 삶에 대해 회의를 하게 될까봐서다. 누구에게도 추천할 것 같지도 않다. 이 책이 가지는 마력은 가볍지 않다. 오타 아니다. 박정희 때 이 책이 나왔으면 금서로 지정됐을지도 모르겠다. 삶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놓는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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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는 데일 카네기나 스티븐 코비나 읽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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