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서부터 "황폐"라는 단어는 나의 감정 상태를 잘 설명해주는 하나의 단어로서 자리 잡았다. 한 낯선 이가 내게 "황폐하신데요"라고 한 이후부터다. 그가 나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가 몇번 본 적도 없던 '낯선 이'라는 것, 카드 몇 장 뒤집은 뒤에 내 멘탈 상태를 점검했다는 것은 "황폐"가 내게 설득력있게 다가올 때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 여자를 만났다. 평생을 함께할 연인이라고 생각했으나 연애하는 자들이 빠지는 흔한 착각이었을 뿐이고, 꽤나 빠르게, 너무도 늦게라해야하나, 헤어졌다. 당시 그 사람을 만날 때는 "황폐"가 나와 더이상은 관련이 없는 무엇이라 생각했으나 숨죽이고 있던 것일 뿐, 연애 중후반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고, 최근까지도 함께했다.
그러다가 이번에 영상 두 편을 봤다. 하나는 <미니몰리즘>이고, 또 하나는 <토니 로빈스: 난 너의 멘토가 아니다>(이하 <토니 로빈스>다. 원제는 <MINIMALISM>, <TONY ROBBINS: I AM NOT YOUR GURU>다.
두 영상이 서로 완전히 다른 내용을 포함한다고 보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리 다르지 않았다. <미니몰리즘>은 포스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요한 것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에 얽매이지 말자는 것이 핵심이다. 단순히 '적은 소비, 적은 소유'로 미니몰리즘을 이해하면 곤란하다.
자본주의와 기업들이 만들어내는 어떤 물건에 대한 환상, 그것을 가져야 '나'가 완벽해질 수 있다는 최면 등에서 풀려나야한다는 말은 꽤나 설득력 있다. 그런데 내가 <미니몰리즘>이란 다큐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봤떤 부분은 다른 부분이었다.
나는 한 때 미니몰리즘은 한답시고 소비를 줄이고, 만나는 사람도 줄였다. 당시에 쓴 글도 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전화번호들을 삭제하고, 이메일도 삭제했다. 거기까지는 좋다. 어차피 연락을 안하던 사람들의 연락처였고, 앞으로도 그다지 할 것 같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어쩌다보니 아예 사람을 극도로 조금씩 만나기 시작하는 나를 발견했다. 사람을 적게 만나는 것이 정해진 것은 아니었으나, 나도 모르게 그렇게 변해갔다. 사람과의 접촉이 점점 적어졌다.
그런데 다큐 <미니몰리즘>에선 전혀 다르게 미니몰리즘을 했다. 굳이 소유하지 않아도되는 물건은 구매하지 않으니 미니몰리스트들은 주변 이웃이나 친구를 통해 물건을 빌렸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교류를 했다. 아차 싶었다.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 지 깨달았달까? 난 그저 '줄이는 것'에만 집착하고,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사람들과의 교류가 적어졌고, 점점 고립되어서 멘탈까지 상태가 맛이 갔던 거다. 인간이란 생물은 기본적으로 혼자서는 제대로 살 수가 없다고 본다.
<토니 로빈스>는 토니 로빈스가 매년마다 여는 <운명과의 데이트>라는 행사와 그것을 기획하는 토니 로빈스와 크루들의 모습을 담아놓은 다큐멘터리다. <미니몰리즘>과 마찬가지로 넷플릭스에 올라와져있어서 보게 됐다.
여러 인상적인 에피소드들이 있었고, 모든 에피소드들이 심장에 쿡쿡 박혔으나, 내게 가장 인상적으로 받아들여졌던 부분은 "인생은 성장"이라는 코드다. 나는 완벽함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완벽하지 않은 상태에선 일을 잘 시작하지 않으려하고, 완벽하지 않은 무엇에 대해선 항상 불만을 가진다. 이런 잣대는 스스로에게도 적용한다. 시간 별로 정해놓은 일과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자괴감에 빠지고, 하루를 망쳤다는 생각이 들면 추후 일정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한다. 이미 망쳐버렸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리고 내일에는 더 제대로 하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일은 또다른 오늘일뿐이다. 악순환은 반복된다.
수능 시험을 볼 때 내가 가지고 있던 태도가 하나 있었다. 시험을 볼 때는 시간을 어느정도 투자하면 풀 수 있는 문제(1)와 시간을 엄청나게 투자해야 풀 수 있는 문제(2)와 시간을 투자해봐야 풀 수 없는 문제(3)를 판단해내면 (2)와 (3)은 과감히 제꼈다. (2)와 (3)에 집착한다면 (1)을 풀어낼 시간을 잃게 된다. (1)이라도 잘 풀어내야 최선의 시험 성적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지나갔거나, 내가 무슨 수를 써도 잘 해낼 수 없는 어떤 것에 집착하는 것은 삶을 갉아먹는다. 만점에 집착하면 60점도 얻을 수 없을 지 모른다. 100점을 추구하는 건 좋지만, 이미 실전에 들어간 이상 '내가 얻을 수 있는 최선의 점수'를 얻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기 위해선 과거의 어떤 순간에 집착하는 것보단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지나간 시간을 바라보며 괴로워한다고 삶이 개선될리도 없다.
토니 로빈스는 삶은 여정이고 그 여정에 성장이 있어야한다고 말했다. 그저 계속 성장하고, 한 발 한 발 나아가면 된다. 지금 완벽하지 않다고 자괴감에 빠질 필요도 없고, 완벽해질 필요도 없다. 아, 지금에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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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다큐 모두 넷플릭스에서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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