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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우 Nov 18. 2017

취업하지 않기로 했다.


내 인생은 방황의 연속이었다. 영화를 하겠다면서 영화학과를 들어갔지만 학과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했고, 본질적으로는 영화 작업 과정에 적응하지 못했다. 스탭들을 모으는 과정은 고통이었고, 지금과 달리 세상에 별로 할 말도 없던 당시에 무조건 영화를 찍어내라던 교수들의 압박은 영화 제작이라는 작업에 그다지 좋은 감정을 가지지 못하게 만들었다. 영화 제작은 그야말로 내게 부담으로 다가왔던 것. 커리큘럼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커리큘럼 탓을 하고 싶지는 않다. 나 외에 적응 잘했던 사람들도 많았고, 정말 희소하지만 그 커리큘럼을 거치고 현재 영화업에 몸을 담고 있는 애들도 있으니. 아, 여기서도 커리큘럼 '덕'에 그렇게 되었다고 평하고 싶지는 않다. 그 사람들의 강한 열정이 그들을 이끌었을 것이라 생각하니까. 난 그들처럼 열정이 강하지 않았던 거다. 그러니 장애물에 고꾸라졌던 거겠지.


영화를 사실상 포기한 뒤 세월호가 터졌고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나 외에 많은 분들도 그랬을 것이지만, 난 좀 이런 부분에 있어서 집착적인 게 있다. 2001년에 쌍둥이 빌딩에 비행기가 박았을 때도 죄책감을 느꼈었다. 내가 뭔가 더 노력했으면 저 지경이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 당시에 내 나이와 직업과 자원과 국적 등을 생각해볼 때 저 지경이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죄책감과 자괴감에 쩔었었던 기억이다.


세월호에도 그런 집착이랄까, '내가 뭔가 할 수 있었을 거다'라는 근거 없는 생각이 머리에 자리 잡았었다. 9.11 때와는 좀 달랐다. 2001년엔 자괴감에 쩔었다면, 2014년에는 분노가 머리에 들어찼고 저런 참사가 또 다시 일어나지 않게하려면 무엇을 하는 게 가장 합리적인지를 생각해봤다. 당시에 한동안 머리에 넣어놓고 돌렸던 질문은 "어떤 직업을 가져야할까"였고, 답은 법조인과 기자로 좁혀졌다. 그렇게 로스쿨을 준비했다. 2년인가 3년인가를 준비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 몇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그다지 열심히 하지 않았다. 리트는 한두달 전부터 기출 문제 조금 푸는 정도로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딱히 레벨업을 하지도 못했다. 결과적으로 리트는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자소서를 또 열심히 썼느냐, 하면 또 그렇지도 않다. 어떤 학교에 자소서 제출할 때는 당일에 써서 제출한 적도 있으니까. 그래도 어찌어찌 서류가 붙은 학교에는 면접까지 갔지만 최종은 통과하지 못했다. 낮은 리트 점수에 기인한 것인지, 내 반골기질을 그들이 감지해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사실, 이유가 뭣이 중헌가. 떨어졌으면 치우면 되는 것이지.


단 한 학교에 대해서 그런 것이긴 하지만 자소서를 당일날 써서 제출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도 안되는 거다. 보통 몇 달 전부터 쓰기 시작하는 게 로스쿨 자소서거든. 내가 그런 황당한 짓을 한 이유는 무기력증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어차피 붙지 않을 거란 무의식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겁나 상향해서 지원한 학교였으니).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무기력증에 빠져있지 않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삶은 내게 즐거움보다는 고통의 연속이다. 살아야하는 이유를 굳이 찾아야 하는 인생에 즐거움이 있을리가. 내게 삶은 내게 살아내어야하는 것이고 예나 지금이나 회색빛이다. 간혹 빛이 들 뿐.


이후에 기자 준비를 하다가 6개월만에 접었다. 기자를 준비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고정적인 월급. 난 지금도 글을 쓰면서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보이고 있고, 앵간한 언론사보다 큰 페이스북 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다. 기자 명함은 없지만 사람들은 내게 제보를 해오고, 나는 그 제보를 기반으로 글을 쓰기도 한다. 더 나아가 이제 1인으로서 미디어를 하기에 더 좋은 환경이 구축되고 있다. 기술적인, 제도적인 제약이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를 만드는 기술은 이제 모두에게 열려있고, 공공기관의 정보도 차근차근 공개되는 중이니 그것을 기반으로 저널리즘을 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런데 이런 나의 활동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돈이 안된다. 간혹 내 글을 보고 후원을 해주시는 분들이 계시기는 하지만, 그 크기가 생계를 유지할 정도는 되지 않는다. 최근에 <뷰티풀 군바리>를 다룬 글을 보고 독자들은 적게는 몇 천원에서 많게는 1만원 정도를 지원해줬는데, 토탈하면 30만원 정도가 입금되었다. 조횟수가 대략 20만 정도되었는데 30만원이 입금된 게 결코 작은 숫자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소위 이런 '대박'(30만원이 대박인 인생을 살고 있다)은 흔히 발생하지 않는다. 그나마 이 글도 이름 모를 브런치 내부의 귀인이 어딘가에 올려줘서 조횟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수 있었다(네이버 웹툰에 대한 빅엿을 의도한 게 아닌가 싶다). 트렌드와 글의 퀄리티와 플랫폼의 트리플 플레이가 있었기에 조횟수 대박과 후원 대박이 이뤄질 수 있었다고 본다.


이전에도 이런 식의 대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애교에 대해 썼던 글을 직썰의 요청으로 기고했던 적이 있는데 그 글에는 13만 7천원이 후원되었다. 직썰은 원고료로 3만원을 주니까 그 글로 16만 7천원을 벌었다고 보면 된다. 그 글의 좋아요가 1만 정도를 찍었으니까 조횟수는 알아서 상상해보시라. 현금 후원은 이정도이지만, 커피 후원도 포함하면 그 액수가 아주 적지만은 않다. 커피, 치킨, 피자 등의 기프티콘을 비주기적으로 받고 있고, 지금까지 대략 200개 정도의 기프티콘을 후원받았다. 가장 저렴한 커피인 아메리카노 기프티콘을 4천원이라 가정하면 80만원 이상의 선물을 받았다.


그런데 이 돈으로는 생계 유지가 안된다. 글 하나 '대박'쳐봐야 10만원에서 몇 십만원인데, 그런 대박이 매일 터지는 것도 아니니 이걸로 4년 넘은 스마트폰을 새 것으로 바꿀 수도 없다. 스마트폰 하나 못 바꾸는데, 연애나 결혼을 어떻게 할 것이며 집은 어떻게 살 것인가? 더해서, 커피 기프티콘으로 살 수 있는 건 커피 뿐이다. 패턴을 바꾸지 않고 글만 쓰며 생활하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부모에 빌어먹는 삶은 필연적이 되고, 독립은 잡을 수 없는 꿈이 된다.


그래서 언론 스터디를 들어가 언론고시를 준비했으나, 몇 개월하다가 접었다. 일단 언론고시라는 시스템 자체에 불신이 생겼고, 그것을 내가 신뢰한다한들, 내가 뽑히는 그림을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여기서도 열정 내지 의지 문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 '갑질'에 동의를 하면서도 지금도 꾸준히 그 길을 걸으려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나의 경우, 해당 직업에 대한 열정이 그리 크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 고정적인 수입이 가장 큰 동기였기 때문.


언론사 취업을 그만둔 진짜 이유는 따로 있기는 하다. 내 글을 못쓰게되었다. 다양한 언론사들이 어떤 글을 좋아할지에 관심을 가지며 서론-본론-결론으로 깔끔하게 정리되는 특정 형식의 글을 꾸준히 쓰다보니 사람이 점점 둔해져갔다. 내 생각을 담기보다는 타인이 이 글을 어떻게 좋아하게 만들 것이냐에 관심을 가지면서 글을 쓰다보니 글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죽은 글을 계속 써냈던 것. 시사상식은 전보다 더 많이 봄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보는 눈은 더 둔해졌고, 박스 바깥에서 사고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나는 그렇다는 이야기다. 언시생들이 모두 나와 같은 증상을 겪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과정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지 않겠나 싶다. 그런 분들은 이 길을 걷는 게 맞다.


내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 라는 이유로 스터디를 나오고 취업도 접었다. 그게 11월 초다. 얼마 안됐다. 양다리를 걸치는 것보다는 나한테 맞는 길 하나를 선택하고 거기에 전력을 다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었다. 내 글이 대중적으로 잘 팔린다는 것에 자뻑을 한 것도 없지는 않다. 앞에서는 후원이 적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지만, 조횟수나 공유수로 따지면 잘 팔린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게다가 그 후원들은 자발적인 것이었다. 후원하지 않아도 내 글들은 어차피 무료로 공개된다. 그럼에도 후원을 해준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돈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이야기다. 이 세상엔 나만 쓸 수 있는 글이 있고, 나만 만들 수 있는 영상이 있다. 그것을 돈으로 치환하는 과정에서 내가 노하우가 없을 뿐이다. 아직은.


딱히 구체적인 대안이 있는 것은 아니다. 책 쓰고, 영상 만들고 하다보면 뭔가 되지 않겠냐는 막연한 생각이다. 다만, 이 길을 걸을 것이라 다짐하면서 포기한 것들도 있다. 포기라기보다는, 욕망하지 않겠다고 생각한 것들이다. 연애, 결혼, 새로운 IT기기 등등. 아이폰5S나 맥북프로 2011 Late나 i5-2500K나 아직까지는 쓸만하다. 답답하긴한데, 못쓸 정도는 아니다. 이빨이 없으니 잇몸으로 게겨보려고 한다. 현재 내 이름으로 된 집도 없기는 한데, 집에서 쫒겨나면 고시원에 가서 살면되지 않겠나 싶다. 한달 30정도면 적금으로 한동안 비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적금이 바닥나면, 뭐, 그게 내 끝이겠지. 반골에 꼴통이며 만사에 예민한 사람이 '나'로 살아간다는 건 이런 의미다. 한편으로는 이게 장애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떤 시민단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어떤 정신의학자들도 신경써주지 않는 장애.


'나'로서, 1인 미디어로서 살아가는 삶이 내게는 최선이다. 이게 내가 제일 잘하고 좋아라하는 것이기 때문다. 난 점점 예민해지고 있고, 이제 다른 일은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게 방황의 끝일지, 또다른 방황의 시작일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취업을 안하겠다고 배수진을 친 이상 내게 도망칠 구석은 조금도 없다. 내 뒤엔 어둡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바다가 펼쳐져있고 앞에선 바람이 나를 밀어내고 있다. 방심하는 순간 넘어질 것이고 내 형체는 그 순간 간데 없이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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