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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우 Feb 06. 2019

주인공과 빌런 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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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 <배트맨 비긴즈>, <다크나이트>의 캐릭터 구성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비긴즈>나 <다크나이트>가 훌륭한 영화인 이유는 영화의 모든 요소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특히, 주인공과 빌런은 공통분모를 많이 가지고 있는 대단히 유사한 존재이면서, 어떤 특징 하나 때문에 완전히 다른 곳에 서서 갈등하게 된다. 


<배트맨 비긴즈>의 테마는 '공포'다. 브루스 웨인은 박쥐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면서 영웅이 되고, 직접 박쥐가 되어 악당들에게 공포의 화신이 된다. 주인공인 브루스 웨인-배트맨은 공포를 이용해 범죄를 예방하고자 한다. 그의 대척점에 있는 인물은 스케어크로우다. 이 인물의 수단도 배트맨과 마찬가지로 공포지만 이 공포를 활용하는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그는 공포를 통해 고담시를 혼란에 빠뜨리고 자기 지배 하에 놓고자 한다. 



또, 배트맨과 달리 <배트맨 비긴즈>의 스케어크로우는 공포를 극복한 경험이 없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만든 공포 가스에 노출되었을 때 공포에 질린 모습을 보인다. 브루스 웨인은 박쥐 공포증을 극복한 경험이 있고, 스케어크로우의 공포 가스도 극복한 경험이 있기에 스케어크로우보다 공포를 다룸에 있어 앞선다. 이런 모습은 배트맨을 주인공으로서 더 비범하게 만들어준다. 스케어크로우는 자신의 무기 하나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존재인데, 배트맨은 스케어크로우가 못하는 것을 훌륭히 해내고 있으니까.


(사족을 달자면, 게임 <배트맨: 아캄 나이트>의 스케어크로우도 마찬가지 모습을 보인다. 재미있는 건 배트맨이 출연하기 전 이야기를 다룬 <고담>에서는 스케어크로우가 본인의 허수아비 공포증을 극복하는 모습이 나온다는 거. 엄밀히 따지면 극복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공포에 질려서 미쳐버린 걸 수도 있으니)




<배트맨 비긴즈>의 또다른 빌런인 라그 알 굴도 배트맨과 대척점에 있다. 배트맨과 라스 알 굴을 사회를 정화해야한다는 것에 있어서는 입장이 같다. 하지만 어떻게 그것을 이룰 것인가에 있어서는 입장이 다르다. 라스 알 굴은 마블의 퍼니셔처럼 악당은 무조건 죽여야한다는 입장이고 자비는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사형제를 옹호하는 남조선인들의 모습과 닮아있다). 라스 알 굴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가망이 없는 사회의 구성원들은 모두 죽여서 사회를 리셋해야한다는 입장을 보인다. 브루스 웨인은 살인을 통해 정의를 실현하

는 라스 알 굴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기에 갈등을 빚는다.



<다크나이트>로 오면 배트맨의 빌런은 조커와 투 페이스인데, 배트맨은 이 둘과도 공통 분모를 가진다. 브루스 웨인과 조커는 모두 불운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브루스 웨인은 어렸을 적 강도에 의해 부모를 모두 잃었고, 조커는 부모의 학대를 받고 자랐다. 하지만 브루스 웨인은 집사 알프레도 덕분인지, 아니면 그의 재력 덕분인지 어찌됐건 삐딱선을 타지 않았고, 조커는 조커가 됐다. 사회가 이 둘을 바라보는 모습도 비슷하다. 배트맨과 조커는 시민들에게 괴짜로 여겨진다. 배트맨이 암만 '선'이랍시고 설쳐대도 대중들은 그를 자경단 이상으로 쳐주지 않는다. 하지만, 배트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을 위해 한 몸을 희생하고, 조커는 테러를 벌인다. 시민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도 둘을 갈라진다. 배트맨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선하다 믿지만, 조커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악하다 믿는다.



투 페이스는 어떨까? 투페이스가 되기 전 하비 덴트는 배트맨과 닮은 점이 많다. 둘은 모두 선을 위해 봉사하고 정의롭고, 부패하지 않았다. 하지만 배트맨은 자경단으로서 불법적으로 범죄를 소탕하지만, 하비 덴트는 검사로서 합법적으로 정의를 실현한다. 브루스 웨인은 사회에 더 필요한 건 배트맨 같은 자경단들이 아니라, 하비 덴트와 같은 부패하지 않은 검사들이라 생각한다. 영화 초반에 총들고 자경단 놀이하는 배트맨 짝퉁들을 대하는 배트맨의 태도를 보라. 


하지만 하비 덴트는 약혼녀를 잃은 후 투 페이스가 되며 타락한다. 이 지점에서 하비 덴트는 검사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히 잃고, 배트맨과 더 격하게 대비된다. 배트맨은 사랑하는 여인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타락하지 않았는데 하비 덴트는 복수의 화신이 되어 무자비하게 살인을 일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비 덴트가 배트맨과 같은 자경단이 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는 마피아 두목들을 살해하는데 그치지 않고 범죄를 예방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고든 경감의 가족들까지 죽이려고 하니까. 일종의 자경단이기는 하지만, 경찰에게까지 총을 들이민다는 점에서도 배트맨과 결을 달리 한다.


주인공과 빌런 간의 이런 관계는 넷플릭스의 <데어데블> 시즌1, 2, 3에서도 반복된다. 주인공인 데어데블은 헬스키친을 더 나은 도시로 만들려고 하고, 윌슨 피크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윌슨 피스크는 이를 위해 살인도 마다하지 않기에 데어데블과 마찰을 빚는다. 시즌2로 가면 빌런 아닌 빌런으로 퍼니셔가 등장하는데 퍼니셔는 데어데블과 달리 악당들은 교화의 대상이 아니라 보기에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다. 둘은 죽이지 말아야한다, 죽여야한다고 치고박고 싸운다. 그렇다고 윌슨 피크그와 퍼니셔가 완전히 겹치는 캐릭터인 건 아니다. 윌슨 피스크는 자신의 길을 막아선다 판단하면 그게 누구든 죽음으로 응수한다. 하지만 퍼니셔는 오직 살인자나 아동 포르노를 유포하는 자들처럼 명백히 악한 자들에게만 총알을 박아넣는다.


이런 식으로 캐릭터를 구성하면 어떤 점이 좋을까? 

작가 입장에서는 작품의 주제 의식을 명확히 하기에 더 없이 효과적이다. 주인공과 빌런의 갈등을 통해 주인공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 어떤 사안에 대한 작가의 입장을 분명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는 사람 입장에서도 편하다. 주인공과 빌런 간의 갈등이 보다 클리어해지기 때문이다. 히어로 영화가 재미있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구조가 단순해서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또, 주인공의 입장이 분명하다면 주인공이 마주하게 될 빌런을 설계하기에 편리하다. 주인공을 잣대로 삼아서 그를 변주해 빌런을 설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배트맨의 공포를 잣대로 삼아 스케어크로우를 만들 수도 있고, 배트맨의 정의관을 바탕으로 조커와 투 페이스를 만들 수도 있다. 배트맨의 지성을 잣대로 삼으면 이니그마와 같은 캐릭터를 만들 수도 있다. 


캐릭터를 구성하는 이런 방법론이 통하지 않는 캐릭터도 있다. 슈퍼맨. 얘는 힘만 쎈 근육돼지 외계인 컨셉이라 얘를 상대하는 빌런의 설정도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슈퍼맨과 힘이 비등한 근육돼지 혹은 슈퍼맨보다 힘이 약하지만 슈퍼맨의 약점인 크립토나이트를 보유하고 있는 '인간' 렉스 루터. 신적 존재인 슈퍼맨이기에, 그를 상대하는 빌런은 렉스 루터와 같은 평범한(?) 인간일 수록 좋다는 게 내 생각인데, 아직까지 영화화된 슈퍼맨 작품에선 매력적인 렉스 루터가 없었다. 엄청 오래 전 작품의 렉스 루터나 최근의 렉스 루터나 또이또이하다.


슈퍼맨의 빌런을 설계하기 힘든 이유는 슈퍼맨이란 캐릭터가 충분히 입체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슈퍼맨은 마블의 초록 피부 괴물과 비슷하다. 헐크가 "헐크! 부신다!"한다면 슈퍼맨은 "슈퍼맨! 부신다!"할 뿐이다. 유명하고, 힘이 가장 쎄고, 오래됐다는 이유로 DC 코믹스에서 배트맨과 투탑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영화판에서 슈퍼맨이 매번 빌빌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코믹스는 너드들만 홀리면 되지만, 영화는 너드가 아닌 사람들까지 홀려야된다. 그런데 슈퍼맨은 캐릭터 자체가 너무 평면적이라 매력이 없다. 주인공이 매력이 없으니 빌런도 함께 매력이 없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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