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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해발 0m 산지천 하구에서 첫 발을 떼다

by 그라미의 행복일기

한라산 제로포인트는
제주 해발 0m 지점, 산지천 하구 용진교에서 시작된다.


지도로 확인했고,
사진으로도 여러 번 살펴보았고,
이 길이 바로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고 걷는 것과
몸으로 걷는 것은 언제나 조금 다르다.


새벽의 제주시 도심은 고요했다.
가게 간판 아래 남겨진 희미한 빛,
차갑게 가라앉은 공기,
간간이 들리는 바람 소리.


해발 0m에서 첫걸음을 떼고
성판악 방향으로 걸어갈 때,
나는 낯설면서도 익숙한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20여 년 전, 우리는 이 도시에서 1년을 살았다.
작은 골목, 오래된 가게 간판,
그때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던 풍경들이
이른 새벽 다시 내 앞에 놓여 있었다.


그 시절 제주에서의 1년은
우리 집에 많은 사람들을 머물게 했던 시간이었다.
숙소가 넉넉지 않던 시절,
“제주에 아는 사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지인들은 하나둘 우리를 찾았다.
그 소란스러움이 그때는 조금 버겁기도 했는데,
이제 와 돌이켜보니
그 모든 순간이 다 지나간 따뜻한 시간이었다.


그 기억 속을 조용히 걸어 나가며
나는 길을 계속 성판악 방향으로 이어갔다.


도시의 새벽을 지나,
이제 산으로 들어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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