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은퇴, 질문에서 시작된 여정

닫힌 문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의 문

by 그라미의 행복일기

퇴직의 문 앞에서, 나는 ‘은퇴(隱退)’의 뜻을 찾아보았다. ‘숨길 은(隱)’, ‘물러날 퇴(退)’ —
직무나 사회 활동에서 물러나 조용히 지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은퇴는 단순히 물러남이 아니었다. 그것은 삶의 무대가 바뀌는 전환, 또 다른 문을 여는 시작이었다.

퇴직이 직장의 문을 닫는 일이라면 은퇴는 내 인생의 새로운 문을 여는 일. 서양의 리타이어(retire)라는 말에도 ‘물러남’과 동시에 ‘다시 숨 고르기’의 의미가 있듯, 은퇴는 멈춤이 아니라 삶을 더 깊이 들여다보는 과정이었다.


“퇴직 후, 뭐 하실 건가요?”
요즘 가장 자주 듣는 질문이다.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어김없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그건 정말 아무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다.
너무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떠돌아 어느 하나 붙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10년 전에도 같은 질문 앞에서

나는 오래 앉아 있었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은 뭘까?’

‘소유가 아니라 의미로 산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던 그날, 조급함과 불안이 동시에 밀려왔다. 앞으로의 삶이 설레기보다, 불확실한 미래가 두려웠다.그래서 나는 여행을 떠났다. 혼자서, 때로는 친구들과 함께.


여행길에서 만난 시니어들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유럽의 어느 광장에서 내 시선은 젊은이보다 시니어들에게 머물렀다. 카페 안에서는 커피 향과 웃음소리가 섞였다. 그들은 진지하면서도 유쾌하게 서로의 이야기를 들었다. 산책길을 따라 걷는 그들의 발걸음은 느렸지만 그 느림 속에는 ‘충만한 삶’이 있었다. 광장의 음악, 아이들의 웃음, 햇살 속 커피 향. 그들은 그 모든 순간을 충분히’ 누리고 있었다.

스위스 융프라우로 향하는 케이블카 안, 한 할아버지가 두 소년을 챙기고 있었다. 나는 당연히 손주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은퇴 후, 지역의 아이들을 돌보는 봉사자였다. 프랑스의 카페에서도, 스페인의 박물관에서도 비슷한 이들을 만났다. 그들은 박물관 해설사, 지역 봉사자, 그리고 여행자였다.

그때 깨달았다.


은퇴란 단절이 아니라 받아온 것을 세상에 되돌려주는 시간일 수도 있겠구나.


지금, 나는 퇴직을 눈앞에 두고 있다. 임금피크제가 시작되면서 회사에서의 권한과 역할은 줄었다. 워킹홀릭이었던 나는 작아지는 내 모습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주 28시간 근무. 하지만 여전히 출근은 가장 먼저,

퇴근은 가장 늦게였다. 후배들이 “선배님, 아직 안 가세요?” 하고 묻는 순간마다 내 마음은 괜스레 작아졌다.

출근을 늦춰보기도 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평소 해보고 싶던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의 여유가 곧 충만함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제 뭐든 할 수 있겠지”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마음은 더 복잡해졌다. 자유는 달콤했지만, 그 안에는 공허가 있었다.


그 무렵, 회사는 임금피크 직원들에게 새로운 부서 근무를 제안했다. 서울, 인천, 충남… 여러 지역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남편을 홀로 두고 타지 생활을 한다는 것은 마음에 걸렸다. 40대 시절 우리는 10년 넘게 주말부부로 지냈다. 아이들이 사춘기였던 그때 나는 혼자서 1인 3역을 해내야 했다. 그 시절은 고단했지만, 서로를 응원하던 시간이었다. 남편의 격려로 박사과정을 마치고 강단에 설 수 있었다. 그의 응원이 있었기에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올 수 있었다.

이제 아이들은 제 길을 갔다. 집에는 우리 둘뿐이다. 남편은 여전히 나를 응원하면서도 가끔 투덜거린다. 그가 있기에 나는 이 길까지 올 수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를 홀로 두지 않기로 했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다.


이제는 ‘하고 싶으면 하는 시기’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삶’을 고민해야 하는 시기였다.


결국 나는 지역 내 신설 부서를 택했다. 주변에서는 굳이 고생을 자처하느냐며 말렸지만, 내겐 다시 초심으로 돌아갈 기회였다. 20년 전, 여성창업지원센터를 처음 세웠던 그 시절처럼 모든 것이 새로웠다.매뉴얼도, 시설도, 사람도 없던 시절. 처음부터 하나하나 만들어가던 그 시간. 그때 만난 창업자들은 지금도 내 인생의 동행으로 남아 있다. 그 시절의 열정과 설렘이 다시 살아났다. 나는 아직 정답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급하지 않다. 정답이 아니라, 발견으로 살아가면 된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퇴직 후의 시간은 완성된 그림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그려나갈 도화지다. 빈 도화지를 앞에 두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설렌다.


“퇴직 후 뭐 하실 건가요?”

이제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재미있을 것 같아요.”

계획 없는 시간, 알 수 없는 내일.

그러나 그 알 수 없음이,오히려 나를 설레게 한다.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그 미지의 하루가 조용히 나를 부르고 있다.


은퇴 이후의 인생학 – 다음 화 예고

2화. 내 시간의 주인이 되다

: 멈춤의 시간 속에서, 나만의 리듬을 되찾기 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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