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선물도 없다
아들에게,
오늘은 드디어 아빠가 돌아와. 우린 인천공항으로 마중 나가기로 했지. 엄마도 옛날에 외할아버지가 해외로 출장 다녀오시면 꼭 공항으로 마중 나가곤 했거든. 네 외할아버지는 해외 출장이 잦으셨던 기자셔서 각종 나라를 다니셨고 돌아오실 때는 이런저런 기념품을 사 오셨는데 제일 기억에 남는 건 독일의 베를린장벽 조각과 러시아의 마트료시카 인형이었어. 너는 이제 올해가 끝날 때까지 아무 선물도 (크리스마스 선물도) 없을 예정이지만, 어제의 일이 있기 전에 아빠가 네 선물을 사놨으니 그건 받는 걸로 해야겠구나.
넌 어제 저녁밥을 배가 부르다고 남겼어. 그리고 한 시간이 지나니 바로 배가 고프다고 하더구나. 이런 일이 매우 잦았지. 엄마는 네가 쑥쑥 자라려나 보다고 생각하면서 간식거리를 줬어. 라면, 케이크, 육포, 과일, 만두, 과자, 아이스크림, 떡 등등 네게 줄 간식 중에 그나마 건강하고 네 까다로운 입에 맞을만한 맛난 게 없을지 골치가 다 아팠지. 어제는 케이크였어. 넌 밥을 먹기 싫다고 배가 부르지 않았지만 부르다고 거짓말하고 네가 좋아하는 간식으로 배를 채운 거였어. 엄마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너는 모르겠지. 보통 정도 이상으로 화가 난 건 너도 알 거야. 분위기 파악에 빠른 너니까. 이런 식으로 몇 달간 해왔다고 생각하니 엄마는 입을 열기조차 싫어지더구나. 엄마는 고민을 했어. 그래도 엄마가 네게 지금까지 거짓말해온 거냐고 물었을 때 바로 사실대로 대답했으니, 그 점은 칭찬하고, 거짓말에 대한 적절한 벌을 고민해 볼지, 아니면 일주일 동안 삼시세끼 라면만 줘서 라면에 학을 떼게 만들어버릴지 (네가 제일 좋아하는 간식이 컵라면이니까), 아니면 엄마는 화가 나고 마음이 아파서 당분간 너랑 말도 하기 싫다고 하며 네 죄책감을 자극할지. 마지막 방법은 별로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최악의 카드니 버리고, 두 번째 방법도 마찬가지로 적절하지 못한 가학적 화풀이 같아서 버렸어.
결국 엄마는 마루에, 너는 방안에 들어가 따로 잠시 떨어져 있다가 너를 불렀지. 솔직히 인정하고 사실을 털어놔주어 고맙다. 그건 참 훌륭하다. 넌 이미 훌륭한 아이니 앞으로 이러지 않을 거라고 예상한다. 그러나 잘못된 행동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니 올해가 끝날 때까지 그 어떤 선물도 없다. 스티커를 다 모아도 아무것도 안 사주고, 크리스마스도 기대하지 마라. 너는 차렷 자세로 서서 대답을 짧게 또박또박 잘하더구나. 태권도장에서 사범님들이 교육을 아주 잘 시키셨다는 생각이 들었어. 우리는 마지막으로 꼭 끌어안았지. 그래도 마음의 안정을 도모할 필요가 있어서, 엄마는 마루에서 책을 좀 읽다 들어가야겠다고 했더니, 너도 마음을 진정하는데 책이 필요하다고 하길래 우리는 반쯤 열린 문을 사이에 두고 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너는 어린이 격주간지 <수학동아>를 읽었어.
잠은 평온한 마음으로 들었어. 시간이 좀 늦긴 했지만, 시간보다 중요한 것도 있으니까 엄만 상관없었어. 이런 날이 올 걸 알고 있었어. 불가피한 것이지 거짓말에 대한 건. 일단 첫 단계는 나름대로 부드럽게 넘어간 것 같아. 거짓말은 자꾸 벌어질 일이지. 그건 또 그때 가서 생각하자꾸나. 오늘은 아빠를 만나는 기쁨으로 채우자고.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내가 널 사랑한다는 사실은 변함없어.
이따 만나.
엄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