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명행의 왜곡된 주장 비판 (1)
1. 얼마 전 <진명행의 역사저널>이라는 페이지에 올라온 창씨개명과 영화 말모이에 대한 글을 비판했습니다. 글쓴 이는 창씨개명이 강요되지 않았다 그리고 말모이에서 나타나는 조선어에 대한 탄압은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대해 저는 창씨개명은 충분히 강요되었다. 그리고 진명행이 조선어 학회 사건을 숨김으로 말모이의 배경이 되는 시대상황에 대해 왜곡된 메시지를 전한다고 비판했습니다.
2. 이에 진명행이 반박글을 올렸네요.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3. 1993년 11월 당시 모리히로 일본 총리는 "과거 우리나라의 식민지 지배에 의해 … 모국어 교육의 기회를 빼앗기고 자신의 성명을 일본식으로 개명해야 하는 등... 견디기 어려운 슬픔과 고통을 겪어야만 했던 것과 관련하여,... 사과드립니다"라고 말합니다. 96년도에 류타로 총리도 "창씨개명 등으로 얼마나 많은 한국분들의 마음을 손상시켰는가는 상상하고도 남는다"라고 사죄합니다. 재밌죠? 정작 일본은 몇 번이나 창씨개명에 관해 사과하는데, 피해 입은 자들의 후손은 일본 잘못은 없다고 하네요.
4. 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2차 대전이 시작됩니다. 일본은 39년 10월 국민 징용령을 발하고, 조선어 수업의 금지나 창씨개명 등의 동질화 작업을 진행합니다. 더 많은 자원과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겠죠. 그렇기에 이 모든 일련의 사건들은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5. 무엇보다 조선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언제는 일본식 이름을 가지면 안 된다고 하다 나중에는 모두 씨를 바꿔라 하는 것 자체가 식민지배의 아픔이고, 이 상황 자체가 강요죠. 그런데 일부 정책에 일본이 관대한 척했다고 감사해야 하나요?
6. 창씨개명이 강요가 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40년 1월 4일 미나미 지로 총독이 경찰력으로 창씨개명을 강요하지 말라고 했다 강조합니다. 그런데 미나미는 그럼에도 조선인들이 창씨를 하면 흐뭇할 것이다라는 말을 덧붇힙니다. 독립신문 발행인이었지만 이때는 이미 친일로 돌아선 윤치호의 증언입니다. 아랫 사람들은 이런 말 들으면 뭐라 생각했을까요?
7. 3개월째는 7.6%의 신청률이 6개월 마감시에 80.3%로 늘어난 것이 강제의 증거는 아니라 진명행은 말합니다. 그리고 신청률이 높은 이유는 "설정창씨가 아닌 법정창씨로 가게 되면 혼인 여성의 氏가 남편의 氏로 바뀌는 등의 혼란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기회를 줄 때 하라는 설득이 주효했기 때문"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일본식 씨를 추가한다는 상징적 행위에 대한 반감도 있었지만, 창씨 행위 자체가 여성의 씨도 남편을 따라 바뀌는 것이기에 더 반대가 심했습니다. 실제로 창씨개명의 내용을 담은 민사령 개정의 건 19호는 "씨(氏)는 호주(법정대리인이 있을 경우에는 법정대리인)가 정한다"라고 되어있습니다. 결혼을 해도 아비의 성을 따르던 한국인의 전통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것이 창씨제도의 핵심입니다. 재밌는 건 진명행도 이전 글에는 "한가족 내에 異姓이 존재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 이러한 제도변경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쉽사리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라고 적었네요. 착각했나 봅니다.
8. 창씨 신고율의 월별 추이를 보면 분위기가 바뀌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0.4% (2월) => 1.5% (3월) => 3.9% (4월) => 12.5% (5월) => 27%(6월) => 53.7% (7월) => 80.3% (8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조선총독부 자료입니다. 아마도 매달 1일이나 말일 기준이었는지 3개월 되었을 때의 수치는 다르네요. 어쨌든 마지막 7월과 8월에 갑자기 늘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참 게을러요. 미리 좀 하지… 이렇게 해석될 수도 있겠죠.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9. 초기 신고가 저조하기에 일본은 신고를 기다리는 수동적 자세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홍보하며 독려하기 시작합니다. 총독부 법무국장은 4월 '창씨철저에 관한 건'이라는 문서를 보내며 각 기관에서 어떻게 할 것인지 회답을 요구합니다. 이런 회답이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1. 씨 신고 용지를 제작, “부윤, 읍면장 지시 아래 마을 총대, 구장, 총동원 연맹 애국반 등을 동원하여 씨 설정 신고를 호별로 지도, 알선”한다. 또 부읍면에서는 신고의 무료 대서 등의 편의를 도모한다. 2. “신고가 적은 부읍면 및 벽원지”에 7월 중순까지 재판소 직원을 출장 보내, “면의 알선을 얻어 구장 및 가능한 한 다수의 호주를 소집”하여 “취지의 철저”를 도모하고 아울러 “하나하나 친절한 태도로 알선”을 하도록 한다. 3. 사법 서사회·호적사무 협의회를 개최하여 “창씨 신고의 실행에 몸을 바쳐 협력”하도록 한다. 4. 재판소 호적계 직원을 강화하여 “친절한 지도, 신속한 사무 처리”를 기한다. 5. “도지사와 연락하여 경찰서, 경찰관 주재소 등 재근 경찰관에게 부락민의 창씨개명 상담에 대응”하도록 의뢰한다.
10. 문구만 보면 너무 좋아 보입니다. 강요가 전혀 없어 보이네요. 하지만 총독부에서 각 지역의 창씨 실적을 지속적으로 집계하는 상황에서 게다가 일제 강점기에 문구대로 친절하게 진행되었을까 궁금해집니다. 실제로 당시 기록을 보면 학교를 통한 적극적 홍보가 보입니다. 교직원들의 창씨율을 계속 조사하고, 창씨 신고를 한 학생에게는 '창씨명찰'을 달게 했다고 한 기록도 보입니다. 그럼에도 신고가 적었는지 6월에는 부산의 지방재판소장(일본인)이 관내 기관장들에게 창씨(創氏) 신청률이 저조하다면서 주민 전원의 창씨 신청을 독려한 ‘씨설정독려(氏設定督勵) 관한 건’이라는 행정문서도 보냅니다. 이런 일련의 독려 조치가 현장에서 어떤 결과로 나타났을지 상상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11. 지금까지는 제가 찾은 분명한 근거가 있는 자료만 소개했습니다. 더 많겠지만, 온라인으로 볼 수 있는 자료에는 한계가 있네요. 이외 문정창이 <군국 일본 조선 강점 36년사>에서 제시한 자료도 있습니다. 창씨하지 않은 사람의 자제에 대해서는 각급 학교로의 입학, 진학을 거부하고 창씨하지 않은 아동에 대해 이유 없이 질책 구타하라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아마 창씨개명의 강요 증거로 가장 많이 인용된 자료일 겁니다. 진명행은 이 자료는 거짓이라 주장합니다. 근거로 문정창이 환빠라는 사실과 일제 밑에서 군수까지 지낸 친일파였다는 것을 제시합니다. 해방이 된 후 친일 경력을 숨기기 위해 오히려 더 오버를 한다는 생각이겠죠. 문정창이 환빠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강점기 시기에도 역사 및 사회 관련 서적을 썼고 이후에도 일제 시대에 대한 책을 여러 권 냈습니다. 그렇기에 이건 메시지를 공격할 수 없으면 메신저를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단 넘어가죠.
12. 진명행이 문정창을 믿지 못한다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문정창 책에 나온 창씨개명을 거부하며 목숨을 던진 사람들의 내용이 거짓이라는 겁니다. 이중 설진영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자녀의 보통학교 입학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창씨를 하고 우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알려져 있죠. 창씨개명 관련 기사를 보면 많이 보입니다. 진명행은 설진영이 1869년생인데 어떻게 창씨개명 당시 초등생 자녀가 있을 수 있냐고 소설이라 말합니다. 사실 소설 맞습니다. 흔히 알려진 설진영의 이야기는 카지야마 토시유키라는 일본 작가의 <족보>라는 소설의 내용입니다. 하지만 간과한 사실이 있습니다. <족보>는 실제로 존재한 1869년생 독립운동가 설진영을 모델로 한 작품입니다. 본명인 설진창을 일본이 만든 호적에 올랐다는 이유로 설진영으로 바꾸었고, 창씨개명 의무화에 반대하며 자신의 목숨을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설진영의 이야기가 소설이라는 진명행의 주장은 반만 맞은 거죠. 재밌는 건 진명행은 설진영이 일본군에 쌀을 헌납한 친일파라 말하는데 이것도 소설의 설정입니다. 어쨋든 창씨개명에 반대해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은 실제로 있었습니다.
13. 창씨개명이 강요되지 않았다는 증거로 공무원 채용 명단에 조선식 이름을 그대로 사용되었거나, 알려진 인물 중 끝까지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례가 의미 없는 이유는 스스로 신고하지 않은 경우 기존의 성을 기준으로 창씨가 부여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선총독부는 창씨개명의 결과를 100%라고 발표합니다.
14. 기본적으로 일제 강점기에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창씨개명이 얼마나 강제적으로 집행되었는가의 여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강제로 하지 않았다고 관대한 일본 그러면서 감격할 이유는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러 기록을 통해 당시 창씨개명이 충분히 강압적인 분위기... 아니 좋게 말해 '적극적으로 독려'되었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조선 민족을 일본에 동화시킴으로 자신들이 벌인 전쟁에 조선의 사람과 물자를 더 쉽게 동원하려는 일제의 동기를 잊지 말아야죠. 무조건 일본은 나쁘다는 민족 우선주의도 문제지만, 일제를 미화하는 진명행식의 글쓰기는 더 비판받아야 합니다.
15. 이 글에서 제시한 자료는 미즈노 나오키 저, 정선태 역 <창씨개명 – 일본의 조선지배와 이름의 정치학>에서 많이 참조되었습니다. 정운현 편역 <창씨개명>은 관련 논문에서 이차 인용된 자료를 사용했고요. 이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나 조선총독부 자료, 기타 신문 기사를 참조했지만, 신문기사에 정확한 출처가 명시되지 않았다면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16. 15번까지 페이스북에 올리고 나니 진명행은 창씨개명을 '이름과 성을 바꾸는 일'로 알고 계신 분과는 생산적인 논의를 할 수 없다고요. 제가 그렇게 말한 적이 한 번도 없는데 말이죠. 굳이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원글에선 언급하진 않았지만, 당시 창씨-일본식 씨를 더하는 것은 의무제였고, 개명-이름을 바꾸는 것은 선택이었습니다. 새로운 씨를 선택해서 신고하면 그 씨를 사용하고, 아니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던 성이 일본식 씨로 추가되었죠. 이 내용은 검색 한 번만 해도 알 수 있는데 왜 제가 모른다고 생각했을까요? 게다가 제 글을 보시면 많은 경우 '창씨'만을 언급한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창씨'만이 의무였고 실적의 대상이었기 때문이죠. 이것만 봐도 제가 창씨개명을 '이름과 성을 바꾸는 일'로 생각하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을텐데 제 글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나 봅니다. 나름 정성을 들여서 썼는데 조금 실망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