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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Mar 11. 2021

글 쓰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

글을 쓰며 살다 보니 어느 날 작가의 신분을 얻었다. 그 일이 가문의 영광이 될지, 수치스러운 역사가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어쨌든 그저 쓰는 것이 좋아서, 돈을 벌지 못하면서도 이 짓을 커피 마시는 일처럼 놓지 못하고 있다. 


성격이 꽤 급한 축에 속하는 나로서는, 무엇이든 한 번 시작하면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린다고 할까? 그런데 그 끝장이라는 지점이 도달할 때마다 계속 더 상향된다는 게 문제. 그중에서도 글쓰기 분량이 그것이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칙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원고지 10장 이상의 분량의 글쓰기다. 2,000자를 넘기지 못하면 분량을 완성하지 못한 거야,라고 생각하는데, 특별한 기준은 없다. 그냥 그렇게 써야 숙제한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그 덕에 책상 앞에 앉으면 몇 시간이라도 버티겠다며, 승부욕이 가슴속에 꽉 찬다. 어떤 사람은 근성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무모한 짓거리라고 표현하겠지만.


글을 쓰려면 먼저 글감을 찾아야 할 텐데, 매일 비슷한 하루를 보내는 바람(집 -> 회사, 회사 -> 집)에 건질만한 소재를 찾기 어려워졌다. 매일 글쓰기를 실천하면서 난 하이에나가 된 것 같다. 굶주린 육식 동물 같은. 글감 때문에 회사를 퇴사했다고 한다면(일간 공심에서 댓글 달러 퇴사하겠다고 선언 한 바 있음) 그 말을 믿어줄 사람이 있을까? 


일간 공심 중에서


이 말은 반은 사실이고 반은 거짓이다. 어느 쪽에 기울지 스스로에게 공정하지 못하니 확신 있게 대답할 자신도 없다. 또, 어영부영 위기를 넘기는 편을 택하련다. 글감은 멸종 위기에 처한 희귀 동물 같다는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니 글감 하나가 머릿속에서 살살 굴러다니면 나는 샤워를 하다가도 사라져 버릴까 봐 안달복달한다.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기를 바라며 생각 또 생각에 빠진다. 그럴 때마다, 참 성격 급하네,라고 스스로 나무라는 시간을 갖기도 하지만, 어쩌겠나 그게 천성인걸.


글감이라는 녀석은 뜨내기손님 같아서 특별한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자리를 바로 뜨는 편이다. 뜨겁게 환영하는 행사를 치르건, 죽어도 못 찾겠다고 짜증을 부리건, 그런 어깃장을 놓는 일이 한두 번도 아니니 포기할 만도 한데, 그게 또 그리 쉽게 손을 놓게 되지도 않는다. 쓸만한 글감을 낚았다고 해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보장도 없으니 더 환장할 노릇이 되기도 하지만.


나는 아직도 가끔 내 주변에서 미스터리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믿는다. 대체 난 왜 글을 쓰는 거야? 지금까지 쓴 글자만도 수백만 자에 육박할 텐데, 그런 사랑받지 못한 글자들이 쌓아 올린 원망의 무덤에 갇히는 상상은 안 해본 거야? 이런 질문에 말문이 콱 막히고 마는 것이다. 그럴 때면 나는 미안하다는 말보다 더 기계적으로 글을 생산하도록 나를 독려하는 게 작가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여유가 많아서 글을 쓰기 시작했을까. 살아온 날들에 후회만 가득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을까. 쓰려는 행위가 삶을 구원시킬 수 있을 거라 기대라도 했던 걸까. 적어도 글을 쓰면서부터 삶을 성찰하기 시작했으니까, 의식 없이 지나쳐 간 일들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으니까, 온갖 부정적인 사건들까지 포용하기 시작했으니까, 이런 글쓰기가 누군가를 살린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니, 난 이 고마운 걸 누군가에게 전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날부터 나는 하루라도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다만 정해진 시간에만 글을 써야겠다고, 글에게 삶이 함락당하는 그림은 그리지 말자고 다짐한 것 같다. 대신 쓰는 시간만큼은 미친 사람으로 변신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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