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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Feb 10. 2022

아내에게 보고서 결재를 올리는 남자가 있다

맥북프로를 사는 방법 feat 노션 템플릿

맥북이 필요했다. 그것도 보급형(?) 모델인 Air가 아닌 M1 프로. 난 타칭(?) '프로 일잘러'가 아닌가. 진정한 프로는 프로라는 황금 인장이 새겨진 모델을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프로가 과거의 영광에 취해 사는 퇴물 물건들처럼 깡통 노트북이나 차고 링 위에 올라서야 되겠는가.


아무튼 나의 치밀한 작전은 맥북프로를 반드시 내 손아귀에 넣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시작됐다. 용의주도하게,라고 쓰고 허술하게,라고 읽힐지도 모르겠지만.


여기서 잠깐, 왜 맥북프로가 필요한지 언급을 해보자면,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런 일반화된 선입견으로 내 글을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 스타벅스 입장할 때, 맥북인지 다른 브랜드의 노트북을 소유했는지 점검하는 프로세스가 있다는 은밀한 소문 때문이라거나, 알루미늄으로 코팅된 프레임 위로 좔좔 흐르는 유니바디와 사이즈업 된 애플 로고의 반짝반짝 윤기 때문에 내가 M1 프로를 사는 것이라며, 분명 그런 음흉한 의도 때문일 거라며 내 글을 의심한다면 여러분은 이 글을 계속 읽지 않아도 된다.


만약 그렇다면 '뒤로 가기'를 꾹 눌러주기를 바란다. 나는 애플이라는 브랜드 때문에 맥북프로를 선택한 것이 절대로 아니니까. 여기서 절대라는 단어에 여러분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는 글을 쓰는 작가로서, 나아가 카카오 브런치 브런치북 공모전에서 금상을 수상한 자존심 센 작가로서 웬만하면 ‘절대’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 그 첫 번째 원칙을 스스로 무너뜨려 버렸다. 원칙은 깨라고 있는 거니까.


어쨌거나 저쨌거나, 맥북프로를 사기 위해 그럴듯한 스토리텔링이 필요했다. 내가 누구인가? 전자책으로 어떤 정보든지 귀신같이 찾아내서 바로 써먹는 4차 산업혁명이 낳은 시스템의 귀재가 아닌가. 논픽션 스토리텔링의 대가라고 알려진 <퓰리처 글쓰기 수업>을 밀리의 서재에서 바로 확인하곤, 어떻게 서사를 구사할 것인지 고름 짜내듯 아이디어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래, 나는 영웅이다. 아니 영웅이 되기 위해 작은 마을에서 이제 막 여정을 시작하려는 보잘것없는 시골 뜨내기 같은 놈이다. 나는 고난과 위기를 스스로 극복해야 하고, - 물론 가끔 지인의 도움도 받겠지만... - 최종적으로 온갖 괴물, 이무기 따위 같은 것들을 물리치고 고향으로 복귀하는 영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뭐 이런 스토리라인이 과연 최종 결재 권한을 가진 아내의 마음을 움직여줄 수 있겠는가,라는 의심이 든 건 사실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빈약한 스토리밖에 짜지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맥북프로 M1, Pro 24 코어 CTO 애플 로고가 눈앞에서 아른거리는데, 어떻게 작전을 멈출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다시 심기를 가다듬고, 어지럽게 널린 책상 위의 물건을 마치 빗자루로 먼지 쓸어 내듯, 양팔로 모조리 날려버린 후, 나는 다시 설계도를 짜기 시작했다. 지금의 스토리라인으로는 너무 빈약하니까, 앞뒤가 촘촘하면서도 설득력이 뛰어난, 그러니까 구구절절하면서도 마음을 건드릴 수 있는 이야기. 나란 인간이 어떻게 여기까지 성장해왔으며 앞으로도 어떤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을지 청사진을 보여주자,라는 결론을 맺게 되었달까.


중요한 것은 구입하려는 맥북 프로가 아니다. 나라는 인간 자체다. 내가 누구이고, 앞으로 어떤 인간이 될 것인지 그 모델을 제시해야 한다. 먼바다, 즉 대양을 바라봐야 한다. 내가 타려는 배가 중요한 게 아니다. 또한 그 배를 움직이는 사람, 컨트롤하는 사람, 즉 선장의 가능성을 보여줘야 한다. 그게 내가 추구해야 할 본질인 셈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스토리라인을 보강해도, 논픽션 글쓰기 스토리텔링 기법을 공부하고 적용해도, 묘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나도 모르게 양손바닥을 강하게 때렸다. 뭔가 그럴듯한 아이디어가 튀어나온 것이다. 그것은 세스 고딘의 오래된 마케팅 철학이었다.


마케팅의 핵심은 고객의 변화를 일으키는 행위다. 나의 고객은 누구인가. 나 자신이며, 나를 포함하는 우리 가족이다. 나에게 맥북프로 M1이 필요한 이유는 궁극적으로 가족이 행복해지기 위함이다. 내가 행복해지면 아내도 행복해진다. 오, 그럴듯한 변증법이다. 또한 세스 고딘은 마케팅은 개선을 이루기 위한 불평이다,라고 했다. 나의 불평은 현재 10년 넘게 사용 중인 구닥다리 ASUS 노트북이다.


내 문제는 곧 아내의 문제다. 아내의 불편함은 곧 나의 불편함이다. 불편한 것들은 반드시 개선이 되어야 한다. 개선 없이 미래는 없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적체가 아닌가, 고인 물이 아닌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잠자코 기다리라는 말, 그 말이 가장 듣기 싫지 않았는가. 그러니까 ASUS 노트북이 수없이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결국 이 이야기의 결론은 나를 방치해둔다는 말과 거의 흡사하다. 가족을 버리는 범법 행위라는 것이다.


문제점을 먼저 도출하자. 현재 어떤 문제점들이 내 삶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지 조목조목 열거하자. 그리고 그 문제점들을 강하게 부각시키자. 마지막으로는 문제점들의 개선 방안, 해결 방법을 피력하자. 설득력의 스토리라인을 만들자. 자료와 팩트로 들이대자.


나는 그래서 그 문제점들을 정리하는 방법으로 노션을 사용했다. 노션 템플릿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차분하게 정리했다.


1. 현 시스템의 문제점 강조 -> 불편함, 문제점 정리

2. 앞으로 해야 할 일 : 그러나 현재 AUS 노트북이 가진 문제점

3. 새로운 맥북프로의 장점

4. 작가로서의 나의 비전

5. 구입하려는 맥북프로의 용도

6. 구입하려는 맥북프로의 사양 -> 도표로 작성(사려는 모델을 상대적으로 그리고 시각적으로 부각시킬 것)

7. 구매처와 구매 방법 정리

8. 카드 준비


나는 위의 1번부터 7번까지의 내용을 노션에 작성하여 아내에게 결재를 올렸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일이 단 번에 해결됐으면 얼마나 좋겠냐만, 그런 드라마틱한 결과는 현실에 없다.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이 바다에 없는 것처럼, 해피엔딩은 내 삶에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노인처럼 사투를 펼쳐도 남는 건 거의 없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글을 쓰는 걸지도 모른다. 쓰는 행위가 해피엔딩에 조금 가깝게 만들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에. 노인처럼 치열하게.


아래는 아내에게 전송했던 보고서 원문이다. 노션 템플릿으로 제작했으나 필요한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복제를 허용으로 두련다.


https://www.notion.so/wordmaster/2d357472551c4beba981c355875a15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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