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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Sep 07. 2022

지난주의 나는 외로웠다. 이번주의 나도 가끔 그렇지만.

감정일기

지난주의 나는 두려웠다. 이번 주의 나도 가끔 그렇지만.


두려움 때문에 소름 끼칠 때마다 나는 무언가에 철썩 들러붙었다. 그 대상은 내 주변에 무엇이 위치해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동물성 생크림과 단팥이 잔뜩 들어간 생크림 단팥빵이 될 수도, 쑥 향기가 잔뜩 버무려진 쑥개떡이 될 수도 있으며, 어쩌면 원초적인 게 아니라면 책 한 권이나 넷플릭스 드라마가 될 수도 있다. 그 무엇이든.


나에게 두려움이란 주로 외로움이 담당한다. 지난주에 나는 출장지에 있었다. 여러 명이 함께 떠났지만 호텔방에서 나는 언제나 혼자였다. 그러니까 물리적으로 내가 외딴곳에 떨어진 독립적인 존재라는 걸 자각하게 되면, 나는 외로움에 혼자 떨었던 것이다. 물론 언제든 원한다면 나는 누군가와 연결될 수 있다. 스마트폰이든 아이패드든, 게다가 맥북도 있었으니까. 그것들은 언제나 지근거리에서 나를 보호하는 호위무사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들, 즉 네트워크는 본질적인 외로움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 호텔방에 앉아서 창 바깥을 한동안 관망하거나 내부의 구조를 원 없이 나에게 각인시키는 동안에도 외로움은 해결이 되지 못했다.


외로움은 물론 외로울 때 느낀다. 혼자서 감각하는 것이니 여러 명과 무리를 지어서 왁자지껄 떠들며 그 감정을 공유하고 싶어도 그렇게 되지 못한다. 물론 나와 같은 별종은 카페에서 여러 사람과 떠들썩하게 떠드는 와중에도 가끔 기묘하게도 외로움을 느끼곤 하지만 그건 논외로 치기로 하자. 아무튼 중요한 건 내가 호텔방이라는 감옥에 갇히게 되면 곧바로 지독한 외로움에 빠져든다는 거니까.


나는 외롭다. 혼자 있을 때, 누군가와 연결될 수 없다는 한계 때문에 외롭다. 외롭다고 해도 그 외로움을 푸는 방법이 지극히 한정적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 외로워진다. 외로워지면 나는 호텔방을 벗어나서 저 극악한 바람과 폭우가 쏟아지는 거리 한가운데로 나가서 그 길을 묵묵하게 걸어가며 떨어지는 빗방울들과 첨벙첨벙 소리를 내며 놀고픈 충동에 휩싸인다. 그리하여 나는 자동 우산을 펼쳐두고 온 동네를 활보한다. 검은 빗방울이 끝없이 쏟아져 내리며 내 한없이 약한 우산 사이로 파고들려고 할 때마다 나는 비와 세상 사이에 놓은 물체 혹은 작은 존재로서 작동하며 나를 잃어버리고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군중 속의 일원이 된다. 그렇게 내가 하나의 집합을 이루게 되면 나는 외로움을 견디게 된다. 견딘다는 것은 어쩌면 잃는다는 게 아닐까. 잠시만이라도 고의적으로 나는 그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외면한다.


외로움은 여러 부작용을 나타낸다. 나는 외로움을 어떻게 달랠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여러 욕망에 시달리게 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대안을 생각하기도 한다. 바로 고의로 잊는 것이다. 잊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 에너지는 역설적이지만 소모해야만 한다. 나의 소모 대상은 바로 책이다. 지난주에 나는 출장지에 몇 권의 책을 안고 갔다. 그것들은 얀 마텔의 《포르투갈의 높은 산》, 코엘류의 《다섯 번째 산》, 최은미의 《눈으로 만든 사람》이었다. 물론 나는 이 책을 고의적으로 선택하지 않았다. 순전한 우연, 어떤 우연한 설계였다.


그 책에는 모두 상실당한 인간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들은 간혹 뒷걸음으로 걷기도 하고 어딘가로 떠나기도 했으며, 기억을 왜곡시키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숙명을 인정하지 않으며 부르르 떨기도 했다. 세 권의 책을 지독한 외로움에 포위될 때마다 호텔방 작은 책상에 앉아 읽었다. 세 권의 주요 인물들은 무언가를 대체로 잃는다. 누군가에게 고의로 상처를 받아 자신의 인격을 잃기도 미필적 고의로 아픔을 받으며 자신만의 무엇을 잃기도 한다. 결국 그들은 어디론가 떠나게 된다. 상실을 당하게 될 때 인간은 떠남을 선택하게 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집으로부터이든, 아는 모든 사람으로부터든, 아니면 스스로이든 그 존재는 반드시 안전하게 격리되어야 한다. 아마도 나는 그것이 외로움의 부작용이 아닐까, 나 나름의 인식으로 정의해 본다. 외로움과 떨어지게 된다면, 그 상실이 생산한 외로움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멀어질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한다면 그 무엇이라도 선택할 게 아닌가.


나 역시 어리석지만 그러했다. 나는 나 개인이 아닌 집단에 속한 속성으로 작동할 때는 외로움을 느낄 여유가 없다. 나는 기계의 부품 하나로 작동하면 그만이니까. 결국 나에게 외로움이 곁들 시간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혼자 방지하게 되는 상황을 초래하게 되면 나는 혼자라는 사실을 감지하곤 외로움에 곧바로 빠져든다. 외롭다, 외로워 이 지독한 외로움이여, 나는 너와 친구가 되고 싶지도 않고 가까이하고 싶지도 않아. 그런데 너는 내가 혼자 있을 때마다 내 어깨에 손을 얹는구나. 외면하고 싶어도 저절로 찾아오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결국 나는 또다시 호텔방을 나서는 것이다. 문을 열고 바깥으로 폭우가 쏟아지는 어둠 속으로 존재 없는 그런 한낱 평범한 인물로 바뀌는 것이다.


외로움은 어쩔 수 없나 보다. 나는 저 세 권의 인물들처럼 어디론가 떠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떠날 수 없기 때문에 소설을 읽으며 떠나는 사람의 감정을 느껴보고 떠나게 되면 어떨까 상상해 본다. 교훈적인 결론이긴 하지만 결국 외로움을 누를 방법은 책뿐이라는 사실을 내리게 된다. 어쩌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동지들이 한두 명쯤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사실이 나의 외로움을 견딜만한 것으로 바꿔줄 지도. 그런 생각 때문에 나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오늘도 견디고 그것을 작가로서 글로 승화시키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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