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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Sep 09. 2022

나에게 태평양의 끝은 너무나 멀기만 하다

미셸 투르니에《방드리디, 태평양의 끝》

절대적 고독, 고립의 감각을 찾아서 나는 오늘도 여행을 떠난다. 여행을 떠나야겠다고 그것이 진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이해하지만 어디로 떠나야 할지 알 수 없으므로 나는 관성적으로 책 한 권을 펼쳐 든다. 이 글은 따라서 여행기의 형태를 희미하게나마 갖출지도 모르지만, 한 인간의 내부를 깊이 탐색한다는 측면으로 해석할 때, 모두가 생각하는 그런 보편적인 여행기와는 다소 성격이 다를 것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매일 여행을 택한다. 말하자면 현재로부터 매일 달아나는 것이다. 자의적이지 못한 선택이다. 언뜻 보면 자의적인 형태로 비칠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렇게 문장에 마법을 부리는 같은 착각에 빠져서 어쩌면 내 신경이 만들어내는 단순한 환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기묘한 감정에 눌려 이 글을 쓴다. 이 글은 개인의 내적 방황기의 한 끝이라 할 수 있겠다. 각도를 틀어서 살펴본다면 자아 탐색 정도로 판정될지도.


하여튼 간 해석이 어떻게 될지, 그런 건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다만, 내가 어떤 세계를 표현하고자 노력하는 건 분명하니까. 그 세계를 구축하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한계야 감추기 힘들겠지만, 어쨌든 내가 가진 직관들을 동시에 가용하여 생각을 쥐어짜내면 그만인 것이다.


이 글은 거의 형태가 없다. 아니 색채도 모양도 어떤 감각도 맛볼 수 없다. 내가 진술하는 것은 다만 이 글이 내 의사와는 다르게 저절로 작동해나가는 어떤 흐름이 없는 일관성이 없는 체계, 즉 스크리브너라는 프로그램의 합성 모드에서 획일적으로 입력되고 있고, 이것은 내 자율신경계에서 내린 명령의 단순한 모음 들일 뿐이라는 얘기다. 나는 매번 깜짝 놀라고 만다. 나도 모르는 문장들이 방언처럼 수집되는데, 내가 왜 이런 문장을 남발하고 있는 건지, 도저히 해석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커서가 줄기차게 속도를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픽셀을 나르고, 그 픽셀들은 저마다의 밝기로 번쩍거리며, 어쩌면 내 손가락의 연속적인 움직임은 지구라는 거대한 생명체가 만든 중력에 짓눌린 결과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시간에 순응하여 방향은 없지만 전진하고 있다. 어쩌면 시간보다 더 빠를지도 모른다. 초침보다 내 손가락이 더 빠르다. 모니터 오른편에선 nothing, nowhere의 M1SERY_SYNDROME 이 흐르고 있다. 이 선곡도 지극히 자연 발생된 것이다. 내 의도와 부합이 된 것인지 내 성격과 기호에 기초한 것인지 나는 그 흐름을 이해할 수 없다. 


추석이라는 명절을 앞둔 이 시기에 나는 현재 이 집에 고립되어 있다. 왼쪽 독서 거치대에는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리디, 태평양의 끝의 마지막 페이지가 바람 끝에 매달려 펄럭거리고 있고, 내 책상 오른쪽에서는 디카페인 원두가 누런 종이 깔때기에 분수처럼 흩어져 있다가, 잠시 후 혈류처럼 다만 막히지는 않은 채 한 방울씩 뚝뚝 머그컵 위로 떨어지고 있다. 그리고 nothing, nowhere의 M1SERY_SYNDROME 이 끝나지 않은 채, 막장을 치닫고 있다.


글자의 포물선 운동을 쳐다보면 나는 가끔 나도 모르게 눈을 감게 된다. 눈을 감으면 적막과 고요가 흐를 거라고 모두가 생각하지만, 내가 해석하기로는 그럴 때마다 세상의 모든 분노와 소음이 동시에 일어나 자신의 억울함을 피력하는 듯하다. 그리하여 나는 곧바로 눈을 다시 뜨고 모니터 가운데를 뚫어져라 응시한다. 그렇게 내 시야는 잠시나마 커다랗게 확보되고 동공도 그에 맞게 확장이 되지만, 손가락은 여전히 분주하게 어딘가를 향해 전진하고 있다. 그러니까 손가락은 완벽하게 절대적 고독을 맛보는 중이다. 멈출 수는 없다. 거침없이 무언가를 찍어내려 가지만, 나는 그 달아날 듯한 속도에 묻힌 좌절감과 원망이 무엇인지 제대로 해석해낼 자신이 없다. 그러니 계속 고립을 취한다.


나는 미셸 투르니에가 나에게 남긴 고독이 무엇인가. 남태평양 끝에서나 맛볼 수 있는 근본적 고독을 체험하려고 또다시 눈을 감아본다. 여전히 눈을 감아도 태평양의 '스페란차'는 나타나지 않으며 방드리디도 검은 얼굴을 들이밀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그 숙제를 해결하려고 집착한다. 언제 이 숙제를 시작했는지 알 수도 없으니 끝날 시기도 저울질할 수 없다. 아마도 내가 무언가를 타격하는 도중에 그 움직임은 미미하게 시작됐을 것이다. 좌에서 우로 분주하게 지치지만 나아간다. 오른쪽 모니터에서는 여전히 nothing, nowhere의M1SERY_SYNDROME 이 무한히 재생 중이다. 영원회귀, 1분 전의 장면은 지금 이 순간도 똑같이 재생되고 아마 내일도 그리할 것이다. 


모든 타자에게서 분리된 나, 그래서 완벽한 고독을 맛보게 되는 타자에게 격리된 나, 나는 비로소 완벽한 내가 되곤 불순물이 사라진 독립을 맛본다. 의식하지 않은 어떤 순간에 나는 나라는 한 존재의 일각과 대면하는 것이다. 


나는 타자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존재다. 타자를 벗어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존재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 간주한 것과는 다른 형태로 나는 의지라는 측면으로 타자에게 결속된 자다. 아마도 이런 글 따위를 무의미하게 양산한다면 나는 방드리디를 쓴 미셸 투르니에의 본질적 고독, 저 피라미드 상위에 속한 형이상학적인 개념의 고독과는 영원히 만나지  못하게 되겠지. 그러한 연유로 나는 바닥을 기어 다니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인가.


나는 때로 현재 내가 살아가는 세계가 정말로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언제나 회의적인 편에 기울어지는 편인 나로서는 내가 회의론자도 부정론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체 내가 꿈꾸는 완벽한 독립이 무엇인지 그 정체를 논하기조차 힘들다. 나에게 태평양의 끝은 너무나 멀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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