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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Oct 13. 2022

내가 벌레가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이야

프란츠 카프카 - 변신

프란츠 카프카는 《변신》을 썼고 나는 그의 짧은 단편을 읽는다. 그 이야기는 채 100페이지를 넘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확신을 갖는다. 이미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다고. 나는 이야기를 아는 것처럼 행세하고 어쩌면 과거 어느 시절인가, 읽었을 것이 분명하다고 자신의 뇌에 망상을 주입시킨다. 그리고 다짐한다. 설마 그렇지 못했을지라도, 언젠가는 카프카를 만날 거라고, 그러니까 그 유명한 곤충인지 벌레가 나오는 《변신》을 읽고야 말 거라고. 그러니 어쩌면 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오랫동안 근거 없는 망상에 취해 있었다. 망상에서 벗어나기까지 적어도 10년? 혹은 20년이라는 끈질기게 버터 내야 하는 시간이 흘렀을지도, 아니 내 생애의 50% 정도를 소진하고 나서야 카프카의 《변신》을 겨우 극복해 낼 수 있었다. 단순하게 읽어 내려가는 행위, 그러니까 페이지의 끝을 결국 마주하고, 배수아 작가의 독후감까지 완벽하게 끝마치고 나서야, 그동안 쌓인 불편함이 해소됐다고 결론을 내렸는데, 그럴 자격이 과연 나에게 주어져도 되는지는 알 수 없다. 이물감은 여전히 해소되고 있지 않다. 모든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고 나는 여전히 망상에 빠져 있다. 내가 벌레가 아닌 게 참 다행이다.


《변신》의 첫 문장은 카뮈의 《이방인》만큼 강렬하다. 강렬한 것은 보편성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이 문장이 전하는 감정의 폭을 이해하고 그 정서를 공유하고 있으니. 전체를 읽지 못했더라도 이 짧은 첫 문장이 낯선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까.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는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침대에서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래, 바로 이 문장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고 그 사실 때문에 분명 이 단편 전체가 전혀 낯설지 않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그 문장, 이 문장이 우리의 망상 증상의 주원인이다.


주인공인 그레고르는 벌레로 변신했다. 어느 날, 갑자기 이유도 없이 그냥 그렇게 된 것이다. 그전까지 그는 정말 깨끗하고 성실하게 살았다. 가족을 위해서, 자신의 회사를 위해서, 자신은 버리고 오직 일벌레처럼 열심히 살기만 했다. 하지만 그 시점에 자신의 자리는 없었다. 자신의 실존이란 건 애초에 고려할 대상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새벽 5시에 일어나서 그의 터전인 회사만 생각하며 일만 해왔던 것이다. 오직 일, 일 뿐이었다. 다른 것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신의 은총과 선물을 받아야 마땅했던 그에게, 벌레, 그냥 벌레도 아니고 흉측한, 이라는 형용사가 붙은 존재로 변하고 말았다. 


나는 바퀴벌레를 바로 연상했다. 이보다 더 심각하게 존재가 훼손된, 끔찍하게 생긴 벌레가 이 지구상에 있을까,라고 생각하니 그보다 더 심하게 더럽고 혐오스러운 형체는 상상할 수 없었다. 물론 이 단편에서는 벌레가 무엇인지 그 정체에 대해서 함구한다. 주변 인물이 ‘말똥구리’라는 표현을 사용하긴 했지만, 그것 외에 다른 구체적인 단어는 쓰지 않는다. 상상은 오로지 독자의 시선에 맞춰져 있다.


그렇다, 그레고르는 어느 날 혐오스러운 존재가 됐다. 그의 전유물이던 성실함의 아이콘을 잃어버리고 쓸데없는 벌레가 되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가족에게조차 버림을 받고 만다. 그는 그저 가족을 위해서 자신의 마음과 몸을 바쳐 일만 했을 뿐인데, 가장 사랑했던 그의 가족은 그의 변신을 목격하고 끝끝내 그를 버린다. 그의 존재 자체를 말살해버린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가 가족에 대한 애정을 상실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가 죽음을 경험하기 전까지, 그의 가족이 그를 혐오하고 그를 그가 머물던 공간에 가둬버렸음에도 가족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의 공간은 치워져버리고 말았다. 그가 살던 작은 방은 끔찍한 지옥의 소굴, 세상의 모든 더럽고 흉측한 존재들을 빨아들이는 숨구멍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는 그 공간에서 잠자코 살아간다. 자신이 어느 날, 벌레로 변신하고 말았지만, 보통의 인간들처럼 현실을 배척하고 원망하지 않는다. 체념을 넘어서 그냥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가 벌레로 변하는 일은 실제로 벌어지지 않는다. 그런 일은 꿈에서나 가끔 일어날 뿐이다. 어쩌면 우리가 벌레로 변신하지 않기 때문에, 삶에 대해 감사하고 내일 또다시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지도 모른다. 단지, 벌레로 변신하지 않아도 되는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 이 삶을 성실하게 살아야 할까? 그레고르처럼 자신이 벌레로 살아가는 현실을 마주하더라도 잠자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과 대면하고 또 고개를 주억거리며 살아가면 되는 일일까?


아무도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면? 친구도 회사 동료도 심지어 가족조차 나를 모른척하거나, 단지 외형만 바뀌었을 뿐인,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실제 똑같은데, 단지 겉모습이 바뀌었다고 나를 무시한다면 나는 과연 어제처럼 똑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 


문학의 장점이란 것은 바로 이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그레고르가 되기도 하고, 그의 여동생인 그레타가 되기도 하고,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의 집에 기숙하는 하숙생이 되기도 하는, 말하자면 실제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도 합법적인 방법으로 여러 인물들의 성격에 - 나를 변신시키지도 않고 - 잠시 머무를 수 있는 지위를 취득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저 자유의지 없이 내 던져진 세상에서, 나와 세상이 존재하는 의미, 내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의 존재 의미와 내가 세상과 함께 존재할 수 있는 합일점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이유가 나를 문학으로 인도하고 카프카를 읽게 만드는, 소위 카프카스러운 상상을 하게 만드는 일이 될지도. 그러니 나는 문학에 취해 문학이라는 꿈을 꾸는 것이다.


카프카를 이해하고 싶다는 사람에게 배수아 작가가 내리는 충고처럼, 우리는 단지 짧은 한 작품을 읽고 나서 그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아니 내가 누군지 알고 싶어서, 그의 나머지 저작들을 읽고 싶다는 동기를 가슴에 품고, 또 다른 세계로 인도된다. 그것이 작가의 세계를 이해하는, 나아가 나를 찾는 중요한 길이 될 거라고 믿으며. 카프카를 읽는 자가 됐다는 사실, 벌레가 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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