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Nov 07. 2022

시간은 늘 상실을 대동하며 나타난다

세상의 모든 아침 - 파스칼 키냐르


여기 삶이 있다. 삶은 가만가만 그리고 고요하게 흘러간다. 어제와 다름없이… 


나는 의식하지 못한다. 의식한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그러니 겸손하게 마음을 낮추고 거기에 어깨를 기대곤 눈을 감은 채 그 흐름에 잠겨본다.


시간은 강물처럼 흐른다. 서서히 때로는 격정적으로 셀 수 없는 감각을 안고서 무심하게 모두와 함께 흘러간다. 시간은 길을 내지만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늘 새롭고 낯설고 까다로우면서도 반가운 존재다. 적어도 길을 찾아 방황하는 나에게는… 


오늘의 아침은 여전히 묵묵하게 변신 중이다. 어제의 달팽이처럼 오늘도 비슷한 궤적을 그리며 기어간다. 아니다 어쩌면 다르다. 때로는 백합 같고 때로는 잔인한 지옥의 묵시록 같다. 나는 그런 변화를 때로 알아차리지 못한다. 다르다고 잠시 느낄 뿐이다. 같다면 무용하고 다르면 그렇지 않은 것인가. 의미는 예민하게 계속 변화하는가? 나는 어제의 얼간이처럼 그곳에 머물러 있는가. 새로운 지점으로 신나게 이동하는 중인가. 시간은 정지되어 있다. 아니, 내가 시간으로 포장된 어떤 의미에 붙들려 있는 것이다. 나, 세상, 그리고 세상의 모든 물질들은 시간의 노예인가, 혹은 시간의 협력자인가, 시간의 이단아인가, 나는 결코 시간과 친밀해지고 싶진 않다. 나는 시간에 나를 냉정하게 채색하고 있다.


시간은 없다. 시간은 없는 것처럼 존재한다. 그러므로 시간은 어느 형태로는 환산이 가능하다. 손바닥을 들면 열 손가락이라는 한계에 직면하지만, 눈을 감고 시간의 무한한 너비와 시간이 상징하는 질서의 안쪽과 바깥쪽을 더듬으면 시간은 또 다른 얼굴로 다가온다. 나를 포함하여, 아니 나를 초과하여 어떤 횡을 길게 긋고서 그 너머에 발을 디디면 분명 시간은 나에게 안개 같은 미소를 지어올 것이다. 그 시간은 작게 무한한 형태로 쪼개어지고 원자의 형태로 점점 작아지다, 어느 순간 보이지는 않지만 다른 존재들과 섞여버릴 것이다. 나는 존재하고 있으므로 시간을 상상하고 시간을 조율할 수 있다고 믿으며, 시간은 나를 무한으로 신뢰한다. 말하자면 우린 서로의 자리를 내어주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시간, 나는 오늘도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빈틈없이 굴러가는 시간에게 배려를 부탁했다. 그리하여 지하철 어느 구석 자리에 앉아서 300페이지가 채 되지 않는 작은 책을 펼쳐놓고서 시간이 나에게 친절한 주문서를 펼쳐놓길 기다렸다. 나는 적당한 메뉴 하나를 고르곤 없는 모자란 시간을 잠시 의식하곤, 바람처럼 저물어가는 시간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불러 모아 내 의식에 집결시켰다. 나는 속으로 긍정했다. 시간은 분명히 존재한다.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 고개를 숙이고 입을 굳게 닫는 행위로써 나는 시간을 경배하는 것이다.


시간은 의식하지 않아도 흘러갔다. 어느 순간을 불친절하게 건너뛰기도 했다. 때론 지하철에서 버스로 버스에서 어느 언덕길로, 구름다리 너머로, 어느 건물의 초라한 카페 두 번째 의자에게로, 싸늘하게 식어버린 사무실의 어두운 의자 속으로, 나는 어느샌가 시간 덕분에 구름에 운반되듯이 의식하지 않고도 시간에 묻혀 살아갈 수 있었다.


그리곤, 어두운 사무실에 빛줄기 여러 개를 그러모아 시간에 또 의지한 채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모두가 시간 덕분이다. 시간에 맞서지 않고 저항하지 않고서 얻어낸 결과다. 어제 완독 한 책을 꺼낸다. 다시 그때로 어느 시간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해본다. 하지만 시간은 떠났다. 시골 간이역에 정차하다, 슬며시 떠나가버린 완행열차처럼 그 책은 열차에 혼자 남은 쓸쓸한 승객의 옆자리처럼, 빈 공간만 남겨놓고 떠나갔다.


어제 읽은 소설을 애써 기억해 본다. 소설《세상의 모든 아침》은 과거 어느 시간 속에 살아가던 ‘마랭 마레’라는 작곡가와 그의 스승인 ‘생트 콜롱브’라는 사람을 두고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이야기엔 ‘비올라 다 감바’라는 첼로와 비슷한 악기가 등장하고 그것을 배우려는 마랭 마레와 스승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리고 거기에 가상으로 창조한 인물인 생트 콜롱브의 딸을 등장시켰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혹은 이름을 바꿔서 음악이란 무엇인가? 모든 걸 품거나 앗아가 버리는 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은 상실의 흔적인가. 죽음의 파도인가. 그들이 추구했던 음악이 대체 무엇이기에 그들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를 배신하고 또 증오하면서도 역설적으로 그리워하는가.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라는 책 속의 문장처럼 내일 아침은 오늘과 같지 않지 않음을 잘 안다. 세상은 늘 똑같아 보이지만 모든 게 늘 새로운 것이다. 우리는 매일 자신의 생과 이별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인식한다. 상실은 우리에게 다른 모양으로 다가온다. 이 책의 첫 문장은 “1650년 봄, 생트 콜롱브 부인이 죽었다”로 시작한다. 상실의 의미, 거기에서 음악은 삶의 어느 순간을 은유하는가. 시간은 늘 상실을 대동하며 나타나는가.


책 속의 한 문장


'고대의 음악가와 시인들은 영광을 중시했소. 황제와 왕자들이 그들을 멀리하면 슬퍼했지요. 당신은 당신의 이름을 칠면조, 닭, 병아리들 속에 파묻어놓고 있군요. 당신은 우리 주님께서 주신 재능을 먼지와 오만한 고뇌 속에 감추고 있단 말이오. 당신의 명성은 왕과 궁에까지 알려졌소. 이제 당신은 그 천 옷을 불태우고, 국왕의 은공을 받들고 페뤼크*를 써야 할 때요.




글쓰기와 독서를 주제로 소통하고 싶은 분은 아래 채팅방에 조인하세요~

https://open.kakao.com/o/gljGHKGd



노션으로 만든 책식지수 페이지 보기

https://wordmaster.notion.site/789363623d044af5be6fc539644c8649


매거진의 이전글 그릇된 신념이 창조한 예고된 파국적 결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