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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Jan 01. 2023

잠도 안 자고 안나 카레니나를 읽은 여자

무라카미 하루키 - 《 잠 》


이 책은 하루키가 그리스와 터키를 오가며 《먼 북소리》를 집필하고 나서 쓴 분량이 조금 있는 단편소설이다. 이 책에도 《이상한 도서관》, 《빵가게를 습격하다》의 삽화를 그린 카트 맨쉬크의 기괴한 삽화가 포함됐다. 이 소설을 쓸 시점에 하루키는 《노르웨이의 숲》, 《댄스 댄스 댄스》로 이미 성공을 거둔 상태였다. 그런데 그때 여러 가지 힘든 일들과 씁쓸한 상황 때문에 소설을 쓸 수 없는 상태, 어쩌면 작가 블록에 진입하고 말았다고 하루키는 후기에서 언급한다. 그러다 이 단편소설을 쓰면서 위기에서 벗어나서 다시 소설을 쓸 수 있는 상태에 접어들었다고 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한 여자다. 이 여자는 한 남자의 아내고 아들의 엄마이기도 하다. 여자의 하루는 거의 매일 비슷하게 반복된다. 남편은 아이와 함께 출근하고 아내는 남편을 배웅한다. 그리고 혼자 남겨진 아내는 쇼핑을 하거나 음식을 준비하며 하루를 보낸다. 어제와 오늘 거의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다 이 여자에게 뜻하지 않은 사건이 생긴다. 그 여자에게서 잠이 갑자기 제외된 것이다. 그것은 불면증도 아니다. 단순히 기묘한 가위에 눌린 이후로 잠이 사라진 것이다.


잠이 사라짐과 동시에 여자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읽기 시작한다. 이 여자는 밤새도록 《안나 카레니나》에 빠져들어 1,500페이지 넘는 소설을 몇 번 반복해서 읽는데 지루함이나 피곤함조차 느끼지 못한다. 남편과 아이는 여자가 몰래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고 초콜릿을 씹어가며 소설을 밤새워서 읽는지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어쩌면 여자는 이 가족 내부에서 존재감이 거의 없는 셈이다.


하루키는 왜 여자에게 《안나 카레니나》를 읽도록 지시했을까?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에 그저 깜짝 놀라는 것이 감정의 전부인 여자, 그 여자는 자신의 욕망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살아가지만 별다른 대책은 없다. 그 여자에게 잠재된 어떤 무의식이 《안나 카레니나》를 읽도록 유도한 걸까? 하루키는 왜 잠이라는 찰나의 죽음에 직면했을까? 인간은 잠을 충분히 자야 죽지 않는데, 잠이 짧은 죽음이라고 가정한다면 죽음은 인간에게 필연적인 것이 아닌지 왠지 역설적인 기분이 든다.


이 단편소설은 89년에 쓰인 소설이지만 2010년에 하루키가 재작업하며 다른 가능성을 추구했다고 하니 하루키의 팬이라면 충분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겠다.


종합 책식지수 : 4.71


책 속의 한 문장


어제와 그제가 뒤바뀌어도 거기에는 아무 지장도 없다. 이게 대체 무슨 인생인가, 때때로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허망함을 느낀다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냥 단순히 깜짝 놀랄 뿐이다. 어제와 그제의 구별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그런 인생에 나 자신이 끼워 맞춰져버렸다는 사실에. 나 자신이 찍은 발자취가 그것을 인정할 틈도 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바람에 날려가버린다는 사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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