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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택근무를 위해서 여론을 조작하다

나의 자발적 재택 감금 일지

내가 재택근무를 결심한 이유는 코로나 때문이 결코 아니다. 우리 회사의 복지조건은 딱히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판정하고 싶진 않다. 그저 그런 어디서나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좋좋소' 기업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회사를 폄훼하는 느낌으로 글을 쓰게 되면 이 글을 혹시 오너가 목격하게 되어 불이익을 당할까 우려스럽기도 하지만, 그런 외압에 흔들리지 않고 살아가자,라는 게 지금까지의 내 모토였으니 그런 두려움 때문에 글 쓰는 일을 주저해서는 안된다.라고 쓰고 떨고 있다고 읽는다. 어차피 이런 글을 쓰지 않아도 기존에 지속적으로 당하던 미움은 계속 이어질 테니까. 그냥 날것 그대로 드러내는 게 이 글을 쓰는 취지에 맞을 것이다. 난 언제 잘려도 살아갈만한 인생의 준비를 완벽하게 해놓고 사는 출구전략 전문가니까.


우리 회사는 한참 코로나가 심각해서 하루에 수십 만 명씩 환자가 속출할 때에도 재택근무를 시행한 적이 없다. 심지어 고려조차도 하지 않았다. 재택근무를 고려하지 않은 배경에는 여러 공감할 수 없는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직원을 불신하는 태도가 가장 지배적이었으리라고 짐작한다. 믿지 못하면 당장 자를 것이지! 어쩌면 그 불신은 개인적인 생각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이유 없는 불신은 태어나지 않는다. 다 이유가 있기 때문에 불신이 싹을 틔우는 것이다.


짜증이 대폭발 할 때쯤에 이르러, 나는 그동안 참아왔던 온갖 울분과 설움을 게워 넣고 최악의 경우의 수인 긴급 퇴사 대신에 재택근무를 선언했다. 그나마 감정을 순화시킨 결과가 재택근무다. 그 이유는 체력적으로 지치고 힘들어서다. 물론 정신적으로도 힘들었지만... 강동구 고덕동에서 판교까지 편도로 거의 2시간 가까이 여정을 나서야 한다.(거의 서울에서 대전으로 여행 떠나는 기분) 이제는 나이를 심각하게 많이 처먹어서 더욱 힘들다. 문제는 출근길이 그다지 평탄하지 않다는 데 있다. 진심으로 이건 단테가 구경한 하데스 강 너머 지옥보다 더 끔찍하다. 더군다나 출근 전쟁에서 마주치는 온갖 빌런들의 추태와 아비규환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 여유를 만끽하며 책이라도 한 페이지 읽으려면 의도적으로 1시간 정도는 일찍 출발해야 한다. 그러나 아침의 1시간은 오후의 4시간에 버금갈 정도다. 특히 나는 내추럴 게으른 인간인데, 새벽 1시간이라니 이거 보통 일이 아니다. 하지만 부대끼는 출근 지하철/버스에서 어깨 싸움을 걸어오는 빌런과 그들의 백팩의 공포에서 벗어나려면 그 정도 손해는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자동차로 출근하면 되지 않느냐고 물어볼 것이다. 마치 앙투와네트에게 한 소리 듣는 기분이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출근 지옥 길이 싫으면 자가용을 끌고 다니라고. 그런데 애석하게도 나에겐 자동차가 없다. 몇 년 전에 차를 끌고 다닌 적이 있지만 몇 달만에 팔아버렸다. 나는 지독한 실용 주의자이자 변덕 주의자다. 차에도 금방 싫증을 내버린다. 게다가 사자마자 감가상각이 시작되는 자동차를 유지해야 할 만한 합당한 이유도 갖지 못했달까. 그래서 차라리 뚜벅이로 살지언정 불편하다고 차를 사러 대리점으로 뛰어갈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러니 힘들면 차를 가지고 다니라는 충고는 안 하길 바란다. 그 정도도 생각 안 해본 얼간이는 아니니까. 어쩌면 나는 대한민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희귀종일지도.


아무튼 재택근무를 결심하고 실행하려면 여론의 조성이 필요했다. 여론은 이렇게 조성했다. 지나가는 회사 사람 아무나 붙들고 재택근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다. 동료들과 커피를 마실 때나 탕비실에서 인스턴트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 때, 외부 회사 사람들과의 공적인 회의 석상에서 달아오른 분위기를 식힐 때 넌지시 재택근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농담처럼 물어본다. 물론 회의 자리 옆에는 오너가 어깨에 힘을 꽉 쥐고 앉아 있는 편이다. 또한 회식자리에서 ‘위하여’를 건배로 외칠 때, 농담으로 ‘재택근무’를 혼자서 소심하게 외치는 방법도 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얌전한 낭만고양이처럼 접근해야 한다는 점이다. 드러나지 않게, 마치 재택근무에 몸살을 앓는 사람처럼 그러니까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서두르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슬며시 사람들의 마음속에 재택근무라는 단어가 각인되도록 서서히 접근하는 방식이 필요한 것이다. 회사에서뿐만 아니라 내가 출몰하는 모든 공간에서 입버릇처럼 재택근무를 떠들고 다닐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영화 안경에서 팥을 익힐 때, 사쿠라 할머니가 말한 ‘중요한 건 조급해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처럼. 하수는 본론부터 급하게 다른 수는 절대 없는 것처럼 들이대지만 고수는 주위의 공기부터 내 것으로 만들어놓고 중요한 패는 제일 라스트 씬을 위해서 아껴둔다. 말하자면 서서히 가까운 사람들부터 포섭해 놓고 본론으로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까운 동료들부터 이해시키고 내 편으로 만드는 작업을 펼쳤고 그다음엔 사무실의 기타 동료들, 나아가 본부장까지 포위망을 좁혀가며 마치 노련한 전략가처럼 용의주도하게 행동했다. 그리고 재택근무를 위해서 미리 단단하게 지식을 쌓아뒀다. 평상시 읽는 책에서 메모해 둔 것들 그러니까 커뮤니티에서 읽은 사람들의 재택근무에 대한 효과, 글로벌 기업들이 왜 코로나가 진정되어 가는 상황임에도 재택근무를 끝내지 않는지, 임상적으로 검증된 재택근무의 효과들에 대해 공부했고 반대로는 재택근무를 와해시키려는 어두운 세력들의 농간, 거짓 소문, 주당 69시간 업무의 공포, 직원을 불신하는 태도 등의 나쁜 여론을 잠재우려는 노력도 동시에 필요했다.


이렇게 분위기를 내 것으로 만들어 놓은 이후에는 문서 작업, 즉 보고서 작업이 필요해진다. 다음 글에서는 보고서를 어떻게 작성했는지 사례를 살펴보기로 하자. 다음 글 역시 언제 발행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사이에 회사에서 잘렸을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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