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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택근무를 어필하는 효과적인 보고서 작성

나의 자발적 재택 감금 일지

다행히 아직까지는 무사하다. 총 두 편의 위험한 글을 발행했지만 회사에서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았다. 회사에서 경고장이 날아오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두 편의 글이 폭발적인 조회수를 기록하지도 않았다. 나란 인간 점점 이 지구상에서 소외되는 기분이다. 화성으로 발사하는 로켓을 타고 날아가면 거기서는 인싸가 되려나. 이런 허튼 농담이나 지껄이고 있는 걸 보니, 그럭저럭 잘 살고 있나 보다.


나의 자발적 재택 감금은 지난 11월에 시작됐다. 벌써 몇 개월이 흘렀는지 감각하기 어렵다. 나이를 먹으면 시간이 통으로 흘러간다고 하는데, 나에게 시간이란 어쩌면 몇 개월 단위의 시간이 냉장고 안에 굴러다니는 닭 가슴살 덩어리처럼 하찮은 취급을 당하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지난 시간에 예고한 것처럼 오늘은 재택근무를 위해 작성했던 보고서를 한 번 꺼내보려 한다. 그렇다고 보고서를 리뷰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문서를 공개할 생각도 없고 어떤 풍으로 작성했는지 그 분위기만 살짝 맛보려 한다. 내가 작성한 재택근무(안)는 발표 장표 기준으로 제목까지 포함하여 총 7페이지 정도의 짧은 분량에 불과했다. 짧다고 하니 핵심적인 내용을 고도로 함축시켰으리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때그때 생각나는 충동적인 아이디어를 즉흥적으로 갖다 붙였을 뿐이다. 단지 재택근무를 위해서라면 촉새처럼 입만 나불나불거릴 게 아니라 진지하게 읽어볼 만한 글도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것,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생각들을 집약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작성한 것뿐이니, 심각한 의미는 두지 말기로 하자.


이 보고서 문건은 디자인보다 내용이 더 중요할 것이다. 그렇다고 초등학생처럼 화면배치를 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요즘은 디자이너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조금만 노력하면 아마추어 디자이너 정도는 흉내 내지 않나? 난 캔바로 그럴싸하게(?) 만들어봤다.


첫 장엔 재택근무(안)이라는 제목을 때려 넣고 그 다음장에는 어젠다가 들어간다. 그냥 목차라고 보면 된다. 어떤 내용이 앞으로 전개될지 미리 예고편 정도를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하자. 세 번째 페이지에는 이제 배경을 보여줘야 한다. 제안서를 쓸 때도 초반에는 사회적 배경, 경제적 배경, 이런 서론에 어울리는 내용을 쓰지 않던가. 이 부분에는 뭔가 거국적이고 거대한 담론이 포함되면 좋다. 개인적인 이야기로 진전하기에 앞서 사회적으로 어떤 분위기가 만들어졌는지 읊어줄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나는 호세 마리아 바레로, 누군지도 잘 모르는 어떤 사회학자의 의견을 덧붙였다. 코로나19로 재택근무가 더 가속화될 거라는 전망 같은 거 말이다. 그리고 국외 기업과 국내 기업의 사례를 보여주는데, 여기서 힌트는 나에게 유리한 사례만 가져오는 것이다. 바보 같이 부정적인 기사를 객관성을 보여주겠다며 어슬프게 갖다 붙이지 말자.


그다음엔 개인적인 사유를 열거한다. 건강, 돌봄, 출퇴근 시간의 낭비, 잦은 환승으로 인한 피로감 누적, 아낀 시간의 업무로의 전환 이런 문제를 보여준다. 개인 사유는 모호하지 않게 구체적으로 쓰는 게 좋다.


자, 다음은 이제 본격적으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재택근무 효과를 쓰는 장이다. 말보다 그냥 페이지 전체를 보도록 하자. 내가 생각하는 재택근무의 가장 큰 효과는 생산성의 상승이다. 그리고 약 4개월이 지나가는 시점에서 나는 그 예측이 맞아떨어진다는 것을 결과로 입증했다. 어쩌면 내가 개발자라서 굳이 대면으로 일하지 않아도 모든 일이 원활하게 작동할 거라는 믿음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출퇴근 시간의 절약은 그만큼 업무에 집중하도록 시간을 몰아주는 효과가 있다. 회의에서 문제가 나타날 거라고 예상했는데, 그동안 줌을 자주 써먹은 경험 덕분인지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도 줌으로 모두 해결됐다. 필요하다면 화면을 공유하면 되고 고성능 마이크와 다자간 화상회의를 지원하니 수백 명의 인원이 동시에 참여도 가능하다. 가장 큰 장점은 줌 회의는 녹화본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회의 내용을 따로 종이든 노션이든 그 어디에도 기록할 필요가 없다. 물론 내용 정리는 팀원이 대신 해주니까... 영상 자체가 회의록이 되어줄 테니까. 그리고 나는 노션 전문가답게 프로젝트 관리 시스템을 노션으로 멋지게 만들었다. 돈 주고 살 정도의 퀄리티를 낸다. 나중에 이 템플릿은 무료고 공개하겠다.


대충 이렇게 효과를 정리하고 다음 페이지에서는 추진 계획을 자세하게 쓴다. 재택근무를 하더라도 대면 보고는 정기적으로 실시해야 한다. 회사는 얼굴을 마주해야 신뢰가 가는 묘한 구석도 존재하니까. 그러니 가끔이지만 정기적으로 얼굴을 들이대자. 격주나 주 1회 정도는 꼭 회사에서 만난다. 그동안 일했던 부분은 노션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으니까, 따로 보고서를 만들 필요도 없고 그 화면을 보고 브리핑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외부에서 열리는 회의에는 웬만하면 참석한다. 업무에 차질을 빚지 않는다는 사실을 중역들에게 심어줘야 한다. 물론 나도 중역의 위치에 해당되지만 우리 회사에는 본부장, 부사장, 사장, 이런 직함들을 단 윗분들이 아주 많이 계신다. 하…



모든 업무는 툴로 시작해서 툴로 끝난다. 프로젝트 관리는 노션으로 팀원 간의 의사소통은 슬랙으로 온라인 회의는 줌으로 자료의 공유는 구글 드라이브로 진행 중인 과제는 온라인 시스템에서, 개발 소스코드는 깃허브 형상관리 시스템으로, 서버 역시 AWS 호스팅 서비스로, 내 컴퓨터에서 어떤 흐름이 시작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데이터는 클라우드로 집합하게 된다. 데이터를 유실할 이유도 없으며 커뮤니케이션을 하다 중요한 내용을 놓칠 이유도 없다. 생산성 툴이 모든 업무를 든든하게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chatGPT가 생겨서 어려운 알고리즘이나 로직도 도움을 얻고 있다.


다음 페이지에는 그동안의 업무 실적을 정리했다. 어떤 업무들에서 어떤 실적과 성적을 냈고 앞으로 어떤 업무를 어떻게 할 예정이며 그 업무의 성공을 위해서는 고급 인력이 필요한데, 요즘은 그런 우수 두뇌를 모셔오려면 재택근무가 필수라고 재차 강조한다. 그렇게 재택근무 전까지의 실적과 재택근무와 함께 시작되는 프로젝트들을 나열하며 보고서를 끝낸다.


물론 보고가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진짜 중요한 마술은 그다음 보고서에 입각하여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 나타난다. 소위 말발, 스피치의 위력이 나타나는 시점이다. 그런데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게, 이렇게 치밀하게 보고서를 쓰고 디펜스 할 준비를 마쳤다면 말은 저절로 술술 나올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쓰고 보니 나라는 인간 참 비굴하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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