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발적 재택 감금 일지
“도대체 왜, 재택근무를 하겠다는 겁니까? 1년 전 재계약 때, 분명히 전일제로 주 100시간 근무라도 불사하겠다고 천명해놓고 왜 이제 와서 말을 바꾸는 거냐고요. 그러려면 차라리 퇴사하세요. 개발은 외주 맡기면 됩니다. 당신 없다고 회사가 안 돌아가는 줄 알아요?”
내가 재택근무를 하겠다고 공개 석상에서 의사를 분명히 밝혔을 때 만약 이런 대답을 들었다면 나는 바로 사직서를 날려버렸을 것이다. 항상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사는 나로서는 물론 난이도가 꽤 높은, 그러니까 신변을 위협하는 위험한 발언을 접했을 때,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놓고 미리 이런저런 궁리를 했던 것도 사실이며 그 매뉴얼에 따라 나는 가차 없이 사직을 당당하게 밝히면 그만이었다.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게 되면 그것은 인간을 움직이게 만든다. 나와 같은 '프로 게으르머'들 조차도, 최악의 상황을 시뮬레이션하면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다행히 최악은 연출되지 않았고 무사하게 재택근무를 실현할 수 있었다.
오너가 재택근무를 기피하는 이유는 아마도 과연 이 인간이 얼마나 충실하고 성실한 태도로 업무 시간 동안(9 to 6 or 10) 혹은 그 이상으로 열심히 업무에 임할 것이냐, 그러니까 집중이라는 측면 때문일 거라고 나는 짐작한다. 재택근무 의사를 밝혔을 때, 내 소신에 대해 본부장님은 내 눈치를 보고 이런 말을 걱정하는 투로 남겼다.
“사람이 시야 안에 들면, 그러니까 사무실 내 100미터 근방 안에라도 있으면 실제로 그 인간이 코딩을 하는 건지, 회의를 하는 건지, 아니면 바깥에 나가서 커피를 마시며 농담을 따먹든지, 무슨 짓을 하든 일단 그 인간을 믿게 되는데, 시야에서 멀어지면 저놈이 일을 할지 어디 놀러 다닐지 의심부터 하게 마련 아니겠어요?”라고. 이런 걱정을 하는 본부장님의 표정은 진심으로 근심하는 얼굴이었다. 오너는 몰라도 자신은 전적으로 나를 신뢰하지만, 오너들은 보통 그렇지 않다고. 물론 내가 그런 걱정을 일시에 불식시켜버릴 만한 한 방안을 가진 인간도 아니고, 재택근무가 아니면 퇴사를 달라고 의사를 표시한 마당에 그런 기우 따위에 흔들릴 나도 아니었다. 강행은 그냥 강행이다. 결정했으면 그 어떠한 장애물이 나타나더라도 돌진하는 게 내 인생의 모토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뭔 모토가 이리 자주 바뀌는지…
하지만 내가 자신만만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는데, 그것은 나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랄까. 실제로 재택근무가 펼쳐지게 되면 회사에서보다 더 주도면밀하게 땡땡이를 칠 것인가, 아니면 더 고도의 생산성을 낼 수 있는 프로그램을 통하여 더 성실하게 일하는 직장인이 될 것인가. 나는 그 탈바꿈 혹은 인간 혁신 문제를 놓고 냉정하게 내가 후자가 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자신감은 메타인지에서 나온다. 메타인지가 무엇인지 굳이 설명하지는 않겠다. 나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안다. 나는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정확히 안다.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깝죽거리고 다니며 아는 체하는 인간들이 도처에 좀비처럼 싸돌아다니지 않나? 나는 내 미래를 예측할 수 있었다. 어떤 불성실한 자세가 업무에 나쁜 지장과 낮은 성과를 만들지, 그래서 그 요인이 나라는 인간을 절망적으로 흐트러뜨리게 만들지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달까.
프로 게으르머에게 최적화된 공간인 재택근무가 어떤 유혹과 그 유혹의 부작용이 어떤 미래를 낳을지 분명하게 인식한 마당에 집에서 일한다고 회사에서 나를 시기하는 인간들의 날 선 눈총을 받게 된 지금, 그들의 의도대로 미래를 그대로 만들 수 있겠냐는 말이다. 바보가 아닌 마당에 나를 시기하는 당신들의 예측대로 불성실한 태도로 일하게 되어서, 그 결과로 거두게 된 좋지 못한 업무 성적표는 ‘거봐 저 인간 재택근무한다고 까불더니 꼴 좋네. 일도 안 하고 맨날 놀러 다니고 딴짓 하더니 신뢰도 떨어뜨리고 평판도 나쁘게 되고 결국 잘리게 되었어. 나쁜 평판이 사실이야. 자신이 월급루팡이라는 것만 검증하게 되었어. 재택근무라니 절대 안 되지? 나라면 모를까.’라는 이런 나쁜 예측을 실현하고 싶지 않았달까.
그래서 나를 믿지 못하는 나는 데일리 리포트를 만들었다. 초등학생도 만들지 않는 하루 일과표처럼 생긴 데일리 리포트, 신입사원 때도 작성하지 않았던 데일리 리포트를 작성한 것이다. 작년 11월부터 데일리 리포트를 작성하고 현재까지 거의 6개월 넘게 하루도 빠짐없이 데일리 리포트를 작성했으니, 이것이야 말로 나라는 프로 게으르머와 같은 인간의 한계를 완전히 꿰뚫어버린 신성한 쾌거가 아닌가. 하지만 데일리 리포트라는 것은 그렇게 거창하지 않다. 그저 노션에 업무 일정표를 오전과 오후 두 개의 칸으로 나누어 해야 할 일들과 실제 수행한 일들을 쓴 것뿐이었다. 말하자면 시간대별 기록이다. 업무의 양이든 질이든 그것을 증명하는 길은 오직 기록이라 믿는 내가 아닌가. 기록을 메모 애호가처럼 지독하게 사랑하는 인간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나마 어필해야 할 것들, 현재 내가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해하는, 아니 의심의 화살을 쏘아대는 인간들의 시선을 디펜스 하기 위해 기록을 택한 것이다. 기록은 데일리 리포트의 작성, 업무 협의, 요구사항 정리, 실제 수행한 내용 등으로 나눠 사용했다.
1. 데일리 리포트 작성 : 노션에 데일리 리포트 페이지를 만든다. 그 안에 오전과 오후 두 칸으로 내용을 분리하여 각각 진행한 내용을 구체적이지만 명료하게 작성한다. 디테일한 내용은 관계형으로 묶인 실제 업무 데이터베이스에 작성한다.
2. 업무 협의 : 카카오톡은 쓰지 않는다. 카카오톡은 개인 대화방의 개념을 가진다. 팀 단위로 혹은 전체 조직 단위로 벌어지는 대화는 슬랙에 써야 누구나 열람할 수 있다. 관계자 뿐만 아니라 누구나 열람할 수 있도록 개방한다.
3. 요구사항 “ 노션 페이지에 요구사항 관련 데이터베이스와 실제 그 요구사항을 처리해야 할 사람을 연결한 프로젝트 관리 시스템을 만들었다. 중요한 개념은 요구사항의 등록과 그 일을 처리해야 할 담당자의 지정이다. 언제 요청 그러니까 티켓을 끊었는지와 그것이 실제로 수행된 기간이다. 여기서 협의가 이루어진다. 조율이 이루어지고 업무를 맡아야 할 사람이 재조정된다. 요구사항은 PDF 문서로 자세하게 작성하면 노션 페이지에서 바로 열 수 있으니 열람하기도 편해진다.
4. 회의록과 보고서 : chatGPT로 회의 내용을 요약하기도 하고 줌으로 실시간으로 진행된 회의는 녹화해서 노션에 업로드 한다. 언제든지 내용을 리뷰할 수 있으니 나중에 누가 거짓말했는지 다 밝혀진다.
데일리 리포트를 쓰게 되면 단위 업무의 실행 유무를 파악할 수 있고 계획 대비 실제 수행한 업무를 비교할 수 있고, 즉흥적으로 업무를 하지 않게 되니 재택근무자에게는 어쩌면 데일리 리포트 작성이 굉장히 중요해진다,라고 강조하고 싶다. 나는 회사에서 재택근무자를 불신하는 분위기 때문에 데일리 리포트를 의도적으로 작성했다. 물론 보여주기식으로 데일리 리포트를 쓰진 않는다. 그렇게 했다가 얼마 못 가지 않아서 내 불순한 업무 태도와 불성실하게 일한 태도, 그리고 그 행위에서 벌어진 업무 결과물이 나의 거짓 정체성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말 테니까. 오히려 데일리 리포트에 작성한 내용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한 탓에 오히려 나는 예측 가능한 인간이 됐고, 내가 개량한 시간과 실제 업무 투입 시간이 맞아떨어진다는 걸 증명하게 되었으며 생산성까지 올라간 결과를 받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재택근무야 말로 기록하는 인간, 집요하게 기록에 집착하는 유형의 인간에게는 딱 맞는 근무 제도라는 것을. 뭐 그렇다고 내가 재택근무 대사 같은 게 되겠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재택근무를 오래도록 높은 생산성을 유지하면서 하고 싶다면, 꼭 기록, 나아가 데일리 리포트를 작성하라고. 당신이 재택근무에서 실패하는 이유는 데일리 리포트를 쓰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신나는 글쓰기에 당신을 무료로 초대합니다.
https://brunch.co.kr/@futurewave/1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