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발적 재택 감금 일지
재택근무의 진정한 묘미는 집이 아닌 다른 공간에서 새로운 경험을 할 때 있다. 게다가 그 공간이 해외라면 그 맛에는 감칠맛과 풍미가 더해진다. 그래서 나는 현재 베트남의 호이안에 와 있다. 물론 내가 호이안에 온 이유는 재택근무가 지루해진 탓도 일부러 한 달 살기 같은 공작을 벌이려 한 이유도 아니다. 그저 회사에서 그렇게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베트남 ODA 사업 중)
호이안은 다낭과 자동차로 약 40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호이안과 다낭이 40분 거리라는데, 다낭과 호이안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두 도시가 얼마만큼 떨어져 있는지, 도시 사이에 얼마나 많은 관광객들이 오고 가는지, 그 사이에서 나는 어디쯤 머물러 있는지 알 수 없다. 나는 로알드 달 동화에 나오는 투명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국에서 이곳 호이안까지 무임승차로 이동된 듯한 느낌이 든다. 그 느낌이 현재 베트남 시간 12시 40분, 한국 시간으로는 새벽 2시 40분에 내가 느끼는 어떤 미묘한 감각이다.
내방 창밖엔 작은 풀장이 있다. 물은 관리를 잘했는지 비교적 깨끗하다. 몸매에 비교적 자신이 없는 나도 어둠 속이라면 잠시 자유형 정도는 실컷 해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든다. 하지만 바깥의 모기와 벌레들이 두려워서 나는 작은 꿈을 이내 포기해 버린다. 그래서 나는 책상 앞에 웅크리고 앉아 글을 남기고 있다.
나는 관광객은 아니다. 나는 이곳 관광지에 일을 하러 왔다. ODA라는 사업 명목으로 선진국(한국)이 가진 기술을 개발도상국(베트남)에 무상으로 지원하기 위해. 그렇다고 관광을 하지 않을 거냐고 물으면 그것은 아니라고 대답한다. 관광객이 아니면서 가끔 관광할 생각을 하며 다낭과 호이안의 정보를 찾아본다. 주말에는 다낭의 전통시장에라도 꼭 가봐야 할 것 같다. 여기에 무슨 일을 하러 왔는가 생각하면, 이곳이 관광지라는 사실을 다시 인식하게 된다. 노래를 부르며 떼 지어 지나다니는 유럽 젊은이들의 환호성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나도 여기에 관광 목적으로 입국한 게 아닌지 잠시 혼란에 빠진다. 정신을 차리고 일에 집중하기 위해 45,000동(베트남 화폐로) 하는 코코넛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이 가격은 우리 돈으로 얼마인가 계산을 꼼꼼하게 해 가며, '굉장히 저렴한 가격이네?' 하며 가소롭다고 여기곤 가출해 간 정신을 겨우겨우 붙들고 온다. 코코넛 커피는 달고 얼음은 차갑고 공기는 무겁게 축축하다.
야밤에 혼자 호텔방에 앉아서, 아니 호텔이 아니라 빌리지라고 한다. 여긴 3성급인가, 4성급인가 따지는 나는 영락없이 한국인에다, 나이 먹은 50대 아저씨가 분명한 것 같다. 나는 잠깐 정체성의 혼란에 빠진다. 늦은 시간에 애써 피곤함을 물리치고 글을 쓰는 나는 베트남인은 아닌데, 벌써 낯선 이곳 베트남에 완벽히 적응을 해야 할 것처럼 행동해야 할 것 같고 그 적응은 앞으로 적어도 2주일 동안 이어져야 할 텐데, 나는 오늘 만난 이곳 공무원처럼 최대한 느리게, 최대한 느긋하게 최대한 걱정 없이 시간을 보내야 할지, 내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답게 약삭빠르고 분주하게 행동해야 할 텐데, 그렇게 될지 우려스럽기만 하다.
옆 테이블에서는 직원들이 모여 맥주를 진탕 마시고 컵라면을 끓여 오고 누군가는 기타를 들고 나름 멋진 연주를 한다. 저 기타도 어느 수공예 공장에서 170,000동(한국돈으로 7,500원?) 주고 샀다는데, 나는 저가격을 믿을 수 없어서 기타 코드를 제법 잘 누르는 저 직원의 말을 믿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여기 공무원 한 달 월급이 40만 동 수준이라면 맞을지도... 나도 한 대 장만해야 하려나.
베트남 음식은 나에게 전혀 맞지 않다. 온갖 향신료가 버무려진 양념과 고수, 그러니까 코즈메틱 향이 나는 채소류들은 전혀 입도 대지 못할 정도다. 게다가 청둥오리로 만들었다는 질긴 고기는 또 뭔가. 그들 앞에서 '와 정말 맛있는 요리네요!'라고 엄지를 척 내세우며 최대한 기분 좋게 먹어줘야 그들에게 예의를 차리는 일이라는데, 나는 그런 연기에 약해도 너무 약하고 표정에 쓴맛이 전부 드러나는 바람에, 고객의 기분을 언짢게 할 것 같아서 걱정스럽다. 그래도 그게 나의 본질인 걸 어떠하랴. 맛없는 걸 맛없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한국의 까다로운 식성을 가진 남자인걸...
2시 40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현재는 55분이다. 블로그에 그저 기분에 따라 하루를 마감하며 지껄이는 즉흥적인 글인데, 여기에 통일성과 유려한 문장을 기대했다면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시간을 나는 뺏은 것이겠다. 부디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며, 때로는 즉흥에 기대는 일, 한달음에 써 내려가는 글이 더 한 가지 주제에 충실할 거라는 근거 없는 미신에 기대어본다.
아마도 내일부터 아주 느린 시간을 경험하게 될 것 같다. 베트남에서 일을 하게 됐으니 나는 나의 생체시계와 업무 시계를 그들에게 맞춰줄 필요가 있겠다. 물론 그렇게 여유 만점으로 일을 즐기다, 사장님에게 크게 혼날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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