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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호이안에서 어슬렁거리기

나의 자발적 재택 감금 일지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눈을 뜨니 천국 아... 아니, 베트남이다. 한국을 떠났으므로 재택근무는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든 셈이다. 그렇다고 근무를 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재택(?)이 완전하게 아니라고 말할만한 근거도 부족하므로 나는 여전히 재택근무 중이라고 우겨보고 싶다. 나는 대략 10평 정도의 공간을 독점하고 있다. 이 객실 안에는 아주 커다란 침대가 하나 가운데 떡 하니 버팅기고 있고 거울이 있는 화장대, 재미없는 베트남 방송이 나오는 티브이가 올려져 있는 180 센티미터짜리 책상, 화장실이 달린 욕실이 있고 작은 옷장도 있다. 아 테라스도 있다. 다만 테라스를 여는 즉시 모기가 들이닥칠 테니, 절대 문은 개방하지 않는다.


하루종일 이 안락한 객실에서 거의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거의 대부분의 업무가 이 맥북에어 노트북 한대면 해결이 되기 때문. 네트워크만 연결되어 있으면 특별한 문제는 없다. 다만 작은 화면을 뚫어라 쳐다보느라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시력이 0.2 정도는 감쇄된 것 같다. 그래서 기분이 꽤 나빠지지만, 그렇다고 업무를 관둘 수 없으니 이렇게 투덜거리는 글을 쓸 뿐이다. 객실 안에서 하루 종일 노트북과 씨름해야 하니 그냥 재택근무가 계속 이어진다고 우겨본다. 그럼에도 오늘은 두 시간 정도 단축 근무를 하고 올드타운이나 어슬렁거려볼까 싶다.


베트남에서는 한국보다 2시간이 느리게 간다. 한국에서는 보통 5시 30분에 업무를 마치게 되니까 베트남에서는 2시간 느린 3:30분에 업무가 마감이 되는 것이다. 때론 몸이 시간보다 더 정확하게 어느 시점을 알려준다. 베트남의 시간이 오후 3:30분이더라도 실제 몸은 그 시점에서 일의 기억을 잊는다. 그러니 일에서 멀어지자, 일에서 떨어지자, 일에서 해방되자. 몸에 모든 흐름을 맡겨두기로 하자.


3성급 숙소인 이곳의 진실을 밝힌다면 어쩌면 2성급일지도… 아무튼 호이안에 위치한 이름 없는 빌라에서 안성탕면을 오랜만에 두봉 씩이나 끓여 먹고 누룽지처럼 굳어 버린 밥과 복숭아 하나를 씻어 먹은 다음 바깥으로 나왔다. 그런데 어젯밤 욕실에서 목격한 거대 스파이더의 잔상이 여전히 머릿속 어딘가에서 뉴런과 뉴런 사이를 돌아다닌다. 나는 녀석을 강력한 수압을 자랑하는 샤워기로 끝장을 내버렸다. 나는 인도 친구처럼 태연하게 운동화 밑바닥으로 녀석을 작살낼 자신은 없다. 그래서 내가 벌인 어제의 작전은 비겁하게 회피 기동을 하느니 차라리 샤워기로 녀석을 저격시켜 수장시키는 방법이었다. 물론 녀석의 사체를 하수구 속으로 끌어내리는 형벌에 처하는 데는 가까스로 성공했지만, 나는 왜 이곳 베트남에 와서 이런 스파이더 종족과 운명을 놓고 일전을 펼쳐야 하는지 대체로 이해할 수 없다. 세상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아니 이곳 베트남 호이안에서는 내가 배워온 그동안의 지식으로서는 이해하기 곤란한 일들이 연일 펼쳐지고 있다.


숙소에서 걸어서 40분 거리에 호이안 올드타운이 위치하고 있다. 올드타운이 핫플레이스란다. 구글맵으로 거리 계산을 해보고 대충 길거리를 머릿속에 집어넣는다. 그래, 이렇게 걸어가다, 저 지점쯤에서 왼쪽으로 향한 다음 다시 오른쪽으로 돌아서 쭉 직진하면 올드타운이다. 군대에서 배운 독도법까지 끌어올 필요는 없지만, 이 정도 길쯤이야 스마트폰 따위 필요 없이 오직 감각에만 의지해도 충분히 목적지에 도달해 낼 자신이 있다. 그런데 왜 올드타운이지? 평소에 별로 궁금해하는 일이 없는 스타일인 나로서는, 꼭 이럴 때 그 이유가 궁금해진다. 올드타운이 오른쪽이면 뉴타운은 왼쪽일까? 올드타운의 입장료가 140,000동이니까, 뉴타운은 그거의 2배쯤, 혹은 3배쯤의 돈을 더 징수하려나? 근데 거리를 산책하듯 거니는데, 게다가 호이안의 관광 수입에 이바지해 주는 관광객의 입장으로 볼 때, 왜 별도의 입장료까지 뜯어가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 약 6천 원 정도의 저렴한(?) 한국 돈이긴 하지만, 저 입장료를 주고 나는 무엇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 정도의 돈쯤은 내지 않고 슬쩍 지나가도 될 것 같지만…


인도 친구와 나란히 걷는다. 오토바이와 스쿠터들이 쉭쉭 빵빵 거리며 지나간다. 이 폭주족 아니 라이더들은 경적 누르는 게 취미인가 보다. 하지만 난 이런 소음에 금방 적응이 되어 버린다. 옆 인도 친구의 커다란 뱃살을 보고 내 복장을 다시 점검해 본다. 이런 어지러운 길에 어울리는 복장은 무엇인가, 생각한다. 티셔츠와 반바지도 어색한데, 샌들은 더욱 무리다. 생각해 보니 미련 곰퉁이 같은 결정을 했다. 왕복 1시간 20분 이상을 걸어야 할 텐데 이 보잘것없는 샌들로는 감당이 안 될 공산이 크다. 나는 나약한 발바닥을 배려하지 못했다. 마음이야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하지만 발바닥은 자꾸만 뭔가 항변을 하는 듯하다.


20분을 걸었는데 인도 친구는 벌써부터 온몸에 땀이 한가득이다. 역시 늘어진 뱃살이 문제다. 나는 아직까지 비교적 여유롭다. 나는 날씬하기 때문... 이 정도의 걸음 따위에 땀을 흘리는 약골은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면 인도 친구는 상대적으로 약골이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느낌이다. 미안하지만, 다행이다. 인도 친구는 한글을 해독할 수 없어서, 또한 그가 내 브런치 혹은 블로그 주소를 모른다는 사실이 위안을 안긴다.


우여곡절 끝에 올드타운에 도착했다. 그런데 입장료를 지불하려면 베트남의 화폐인 동(VND)으로 먼저 환전을 해야 한다. 올드타운 도처에 환전소가 성황리에 영업 중이다. 아마도 불법일 확률이 높다. 하지만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지랴. 나도 지금 업무 마감 2시간 전에 관광길에 나선 자로서 이미 불법(?)을 자행 중인데…


푸근한 얼굴로 미소를 짓는 아저씨가 우리를 부른다. 우리는 자석에 끌리듯 금은방 앞으로 다가선다. 100불짜리 지폐를 가방 속에서 조심스럽게 꺼내고 그것을 팔랑거리며 접선을 시도해 본다. 나는 이런 일을 아주 흔하게 경험한 똑똑한 스파이처럼 100불을 쑥 내밀고 아저씨는 태연하게 계산기에 노련한 작가가 소설을 쓰는 것처럼 숫자를 타이핑한다. 나는 그 숫자를 슬쩍 쳐다보고 과연 그것이 합리적인지 아닌지 평가하려고 노력하지만, 이내 성나버린 발바닥의 하소연을 듣고 나서 모든 믿음을 인자한 웃음을 짓는 아저씨에게 맡긴다. 나는 두툼하지만 부루마불 지폐처럼 생긴 돈다발(?)을 신중하게 세는 척하면서 그 뭉칫돈을 가방 안에 툭 던져 넣는다. 돈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이런 환전 따위는 하루에도 골백번 하는 능숙한 환전 사냥꾼처럼.


총알을 장전했으니 이제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반미 샌드위치건, 코코넛 커피 건 이 돈으로 불가능한 건 이 거리에 없다. 우리는 좁은 도로를 배회한다. 어디선가 수제 가죽 냄새가 코를 찌른다. 길거리 음식에 젖은 상품들이 시선을 어지럽힌다. 여기저기에서 반가운 한국말이 들려온다. 내 눈앞에 보이는 건 한국 사람과 프랑스 사람, 미국 사람? 혹은 독일 사람들이다. 베트남 사람은 모두 장사꾼들이다. 한몫을 크게 잡아서 인생의 획기적인 전환을 도모하는 사람들, 희망이 없는 희망을 꾸는 사람들, 돈을 쓰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들, 팔기 위해서 그 어떠한 사기라도 불사하겠다는 사람들. 사람들의 숲 속에서 물건을 구경하는 것인지 사람들의 뒷모습을 구경하는 건지, 개념이 어느 순간 사라진 호이안의 올드타운 골목에서 나는 방향을 잃는다.


쇼핑은 우리에게 맞지 않는 일이다. 돈이 있어도 쓸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는 크게 탄식한다. 역시 먹는 일이 가장 남는 일이라며 우리는 어깨동무를 하고 '반미프엉'으로 이동하기로 한다. 그때 누군가의 경고 메시지가 생각난다. 위생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절대 그곳을 찾으면 안 된다고. 그래, 나는 위생을 매우 중시한다. 그래서 하루에도 두 번씩 이곳에서 샤워와 면도를 꼼꼼하게 하고 있다. 물론 어젯밤엔 대왕 스파이더님을 영접한 바람에 그 샤워 루틴이 파괴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불만족스러운 건 여기에 없다. 어쩌면 비위생적인 환경조차 어느새 정이 들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반미프엉에 자리를 잡는다. 영어로 주문을 한다. 알아듣지 못하는 종업원의 모자란 영어 해석력 때문에 답답하지만 메뉴 판을 들고 이거, 저거 하며 서로의 공감대를 찾는다. 장사하려면 영어 정도는 필수가 아닌가. 고급 샌드위치 2개, 럭셔리 주스 2잔, 이렇게 해서 한국 돈으로 7천 원 정도를 현금으로 지불했다. 지폐를 주섬주섬 뒤적거리곤 다시 가방에 넣는다. 베트남 거부처럼 나는 일시불로 현찰 덩어리를 내밀고 잠시 우쭐해졌지만, 순간 위생적이지 않은 샌드위치에 대한 걱정과 고수를 빼달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바보 같은 이유 때문에 잠시 자책한다. 그리고 샌드위치가 나옴과 동시에 그 모든 우려를 불시에 망각해 버리곤 그 문제적 빵 덩어리를 흡입한다.


호이안은 참 ( ) 좋은 곳이다. 나는 저 괄호 안에 어떤 문장을 넣을까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베트남은 물가가 저렴해서, 오토바이가 신호도 무시하고 사람도 무시하고 쏜살같이 달려서, 음식에 모조리 고수가 들어가서, 외국인이 많아도 너무 많아서, 모두가 활기차고 신나서, 덥고 습해서, 벌레가 아주 많아서, 거미를 비롯한 벌레들이 커도 너무나 커서, 우리가 돈이 많은 관광객이라서... 괄호 안에 들어갈 문장이 참 많아서 좋다. 아, 이제 40분을 다시 걸어서 돌아가야 한다. 우리의 2성급 빌라로. 좋다,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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