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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Sep 26. 2024

제텔카스텐은 작가의 콘텐츠 팩토리다

3장: 제텔카스텐으로 창의적으로 메모하기

나는 IT 개발자답게 새로운 개념을 접하면 호기심 있게 들여다보며 요리조리 뜯어보는 편이다. 대부분의 개념은 금세 흥미를 잃는 편이지만, 메모에 관계된 개념이라면 그나마 달라지는데, 관심을 갖고 실전에서 응용해 보기도 한다. 몇 년 전부터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 제텔카스텐이 그러한 경우였다. 


제텔카스텐이란?


제텔카스텐(ZettelKasten)은 독일어로 ‘메모 상자’로 뜻한다. 상자보다는 서랍이 훨씬 잘 어울릴 것 같지만…. 아무튼, 서랍을 연상하면 떠오르는 직관적인 이미지가 있다. 앤티크 풍의 우아하고 견고한 원목 서랍장이다. 그 느낌을 AI로 살려보고 싶었는데, 기술적 아니 디자인적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다. 내 능력이 여기까진가 보다.


DALL.E로 만들어본 메모 상자



그래, 유럽풍의 디자인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쿠팡에 접속한다. 그게 좋겠다! 천천히 상품을 골라보자. 나는 물욕에 빠진 인간이 아닌가. 따뜻하고 클래식한 느낌이 드는, 내 오크 나뭇결이 은은하게 흐르는 책상 위에 올려놓기 적당한 크기면서도, 아내의 눈총을 피할 수 있는 디자인이면 더할 나위 없겠다. 


이제 교보문고 광화문점 핫트랙스를 기웃거린다. 서랍에 넣을 만하게 작으며 적당하게 빳빳한 파스텔 톤의 메모 카드를 고르고, 5색을 한 번에 쓸 수 있는 만능 볼펜을 고른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서재를 부산스럽게 치우며 메모 서랍과 카드를 배치하는 시뮬레이션을 해본다. 색색 볼펜을 메모 서랍 옆에 가지런하게 놓는다. 책상 위에는 인셉션의 팽이가 돌아가고 있다. 아, 몽상에서 깨어나야 할 시간이다.






10년 전쯤에, 김정운 교수의 메모 이론을 따라 해 본 적이 있다. 자그마한 단어장 앞면에는 감명을 받은 책의 한 문장을 기록하고 뒷면에는 내 생각을 간단하게 적는다. 밑줄끼리 카테고리로 묶을 수 있도록 카드에 태그를 단다. 카드가 쌓이면 같은 태그끼리 모아 본다. 다른 책의 밑줄들이 모여 내 견해를 형성한다. 이것이 김정운 교수의 단어장 이론이었는데, 알고 보니 그 이론은 제텔카스텐의 핵심 철학이었다. 국내에 제텔카스텐이 유행하기 훨씬 전에 이미 그 개념을 언급한 것이었다. 역시 시대를 앞서가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 카드의 묶음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맞다, 책장 서랍 속 어두컴컴한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깊이 잠들어 있겠지. 마치 언젠가 발굴되기를 기다리는 먼지 덮인 고대의 유물처럼. 한창 기록할 때는 이 메모들이 언젠가 큰 가치를 발휘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그날은 오지 않았다. 김정운 교수의 이론이 원망스러웠다. 이론은 이론일 뿐, 실전은 전혀 다른 문제였을까.


제텔카스텐은 독일의 사회학자이자 전설적인 메모 천재, 니클라스 루만 교수가 고안한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의 핵심은 단순히 메모를 꾸준히 하자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메모를 1차원적으로만 이해한 것이다. 제텔카스텐의 본질은 방대한 지식을 지닌 '지적 파트너'와 함께 일하는 것과 같다. 말하자면 AI급의 동료를 만드는 일과 같다고 정의할 수 있다.


루만 교수는 원래 공무원으로 일했지만, 사회학에 관심을 갖게 되어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그는 빌레펠트 대학교에서 사회학 교수로 임용되었고, 제텔카스텐 시스템을 통해 연구 내용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며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탄생시켰다. 이 시스템을 통해 550편 이상의 학술 논문과 70권의 책을 출간하며 탁월한 학문적 성과를 이룩했다. 그의 이러한 독보적인 연구 성과는 모두 제텔카스텐 덕분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메모는 보통 1차원적으로 관리된다. 나는 역시 오래도록 구글 킵에 책의 밑줄과 간단한 아이디어를 기록했다. '열심히 기록하면 언젠가 쓸모가 생기겠지',라고 기대를 품었지만, 메모는 유적지의 유물처럼 아주 가끔 발견되곤 했다. 그러나 메모는 활용되어야 그 가치가 생긴다. 머릿속에 모두 저장할 수 없으니 외부에 기록해 놓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 어디에 어떤 메모를 했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다면 그 메모는 의미가 사라진다. 글을 쓰다가 자료 검색을 하면 오래전에 메모해 두었던 낯선 문장을 찾아내기도 하지만, 머릿속에 없는 개념은 결국 죽은 메모에 불과하다.



하지만 루만 교수의 메모 철학은 달랐다. 그의 메모 서랍에는 인덱스를 기준으로 메모들이 차곡차곡 쌓여나갔다. 메모들은 비슷한 맥락을 갖는 것들끼리 순서대로 배치되었다. 아무 의미 없이 메모를 서랍에 비치하는 게 아니라, 서로 연관이 있는 메모들을 앞뒤로 배열하거나 중간에 끼워 넣기도 했다. 이렇게 맥락적으로 맞닿아 있는 메모들은 서로 직관적으로 이어져, 새로운 통찰을 가능하게 했다. 앞뒤의 메모들을 조합하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자연스럽게 얻어졌다. 이렇게 군집된 메모들을 연결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통찰이 떠오르곤 했다.


루만의 메모 시스템은 단순히 1차원적인 기록을 넘어섰다. 그는 메모들을 2차원적으로 정렬하고 비슷한 메모끼리 연결하며, 3차원적인 입체적인 사고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도출했다. 그의 목표는 단순한 메모 시스템이나 지식 데이터베이스의 구축이 아니었다. 메모를 할 때마다 기존 메모들과 의식적으로 연결하여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수백 편의 논문과 수십 권의 책을 출간했다. 그의 사회학자로서의 명성은 바로 이 놀라운 성과물 덕분이었다.



아날로그 제텔카스텐이 디지털 시대에서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는?



아날로그 제텔카스텐은 현재 디지털로 둔갑했다. 카프카의 《변신》처럼 벌레가 되지 않은 게 다행이다. 전 세계 생산성 힘스터들은 제텔카스텐 기반의 세컨드 브레인에 열광한다. 그들에 제텔카스텐에 열광하는 이유는, 루만 교수가 제텔카스텐을 사용해서 어마어마한 결과물을 거두었기 때문이 아닐까? 단순히 메모를 저장하는 방식을 넘어서 메모들이 서로 연결되어 창의적인 사고를 촉진하는 시스템이라는 장점도 있겠지만.


아날로그 제텔카스텐은 노션, 옵시디언, 롬 리서치와 같은 툴을 통해 디지털 시대에 맞게 구현할 수 있다. 디지털 툴의 가장 큰 장점은 아날로그 시스템의 불편함을 보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서랍에 메모를 기록하면 필요할 때 찾아내기 어려운 경우가 많고, 미니멀리즘 시대에 서랍 같은 덩치 큰 가구를 집에 두는 것도 만만치 않다. 디지털 툴 중에서도 노션은 우아한 디자인과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기능으로 메모들을 직관적으로 연결할 수 있다. 옵시디언은 지식 그래프를 통해 메모 간의 관계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며, 롬 리서치는... 음, 다만 가격이 좀 비싸다.


새로운 개념이나 시스템은 종종 사람들에게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제텔카스텐이 자신들의 삶이나 일에 더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기대감이 바로 그 예다. 마치 개발자인 내가 새로운 AI 툴이나 프로그래밍 프레임워크가 출시되면 빠르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니까 새로운 개념이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기대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디지털 세상에서도 여전히 사랑받는 제텔카스텐은, 그 시스템을 사용하는 사람들끼리 일종의 소속감을 만들어낸다. 최신 트렌드를 따라가면서 뒤처지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커뮤니티 내에서 연대감을 느끼게 된다. 게다가 인플루언서들의 영향력도 제텔카스텐의 유행을 촉진하는 데 한몫했다.


툴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노션이나 옵시디언은 제텔카스텐을 구현하기에 훌륭한 도구이지만, 때로는 도구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리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제텔카스텐의 본질은 점점 흐려지고, 어떤 툴이 더 화려하고 강력한 기능을 제공하는지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결국, 단순히 다른 사람이 만든 기능을 사용하면서도 제텔카스텐을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제텔카스텐의 본질은 메모들을 서로 연결하는 데 있다. 루만 교수는 하루에 약 6개의 새로운 메모를 추가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메모들에는 새로운 내용뿐만 아니라, 기존의 메모들과 의식적으로 연결되어 파생된 아이디어도 포함되었다. 제텔카스텐의 철학은 바로 이러한 연결을 통해 새로운 통찰을 얻는 것이다. 즉각적인 결과를 기대하기보다는, 하루에 6개의 메모를 추가하는 루만의 방식처럼 천천히 아이디어를 축적하며 하나씩 연결해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아날로그든 디지털이든 제텔카스텐 시스템으로 자신만의 지식 파트너를 구축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리고 그 시스템을 꾸준히 활용해 자신의 지식과 연결해 나가자.



제텔카스텐은 어떻게 메모하는가.


루만 교수는 자신의 연구를 위해 제텔카스텐을 시작했지만, 그 과정에서 나온 성과물들은 타인의 연구를 돕는 데에도 기여했다. 이 시스템은 창의적인 글쓰기에 응용되기도 한다. 작가는 자신의 아이디어와 생각을 제텔카스텐을 통해 모으고, 콘텐츠 팩토리를 구축할 수 있다. 기업가는 여러 분야와 연결해 자신과 타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귀중한 인사이트를 얻을 수도 있다.


제텔카스텐은 단순히 메모를 쌓아두는 시스템이 아니었다. 메모들을 서로 연결하고 의미를 확장하면서 지속적으로 콘텐츠를 생산하는 시스템이었다. 각각의 메모는 아이디어의 독립적인 씨앗이 되고, 그것들이 연결되면서 창의적인 결과물이 자라나, 일종의 콘텐츠 팩토리로 기능했다.


제텔카스텐은 유튜브에도 관련 정보가 충분하니까, 더 자세한 정보가 필요한 분들은 거기서 찾아보도록 하고, 나는 몇 가지 중요한 맥을 짚어보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제텔카스텐을 소개하는 자료들을 보면, 메모를 임시 메모(Fleeting Notes), 문헌 메모(Literature Notes), 영구 메모(Permanent Notes)로 나누어 3단계로 입력하라고 권장한다. 그러나 루만 교수는 이렇게 복잡하게 구분하지 않았다. 메모를 세 단계로 나눈다는 것이 처음엔 너무 복잡해 보여 제텔카스텐을 포기할 뻔했다.(나는 구글 킵에 임시 노트만 잔뜩 모아두던 사람이었다.)


앞으로 나는 노션을 활용해 제텔카스텐을 직접 구축해 볼 예정이다. 루만 교수의 메모 서랍을 노션에 구현하는 것이다. 3단계의 메모(임시 메모, 문헌 메모, 영구 메모)로 나누는 대신, 한 단계로 통합하여 심플하게 관리할 것이다. 노션의 속성 기능을 활용해 메모의 상태를 구분할 생각이다. 3단계 메모의 개념적 의미는 나중에 다시 한번 점검해 보도록 하자.



임시 메모는 매우 작은 단위의 메모를 기록하는 것이다(실제로 원자 크기는 아니지만). 제텔카스텐 철학에 따르면, 임시 메모에는 단 하나의 정보만 담아야 한다. 이것이 철칙이다. 이 규칙을 어기면 '싱가포르에서 중죄를 지은 인간처럼 끌려가 태형을 맞을 수도 있다',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작게 기록하는 이유는 작을수록 집중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 철칙은 지켜보는 것이 좋다.


임시 메모는 생각이 나면 즉시 기록해야 한다. 생각이 났을 때 바로 메모해야지, ‘나중에 다시 해야지’ 하면 아무 소용없다. 그러다 날린 기발한 아이디어가 한 둘이 아니다. 임시 메모에 입력할 대상은 아래와 같다.


아이디어

리서치

질문

아티클

책 밑줄

유튜브 동영상

생각


두 번째 단계는 문헌 메모다. 임시 메모는 단순히 아이디어나 아티클, 책의 밑줄을 짧게 기록하는 것에 그치지만, 문헌 메모는 여기에 자신의 견해를 간략하게 덧붙인다. 이는 저자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이다. 이렇게 하면 남의 메모가 나의 메모로 소유권이 이전되는 것이다(물론 개념적으로 그렇다는 뜻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타인의 생각을 나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귀찮은 절차가 굳어진 뇌에 신경 가소성을 더해주기 때문에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왜 굳이 임시 메모를 확장해 문헌 메모를 만들고,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추가하라고 하는 것일까? 메모는 많지만, 모든 메모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어떤 메모는 관심을 끌지만, 어떤 메모는 그저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귀중한 시간을 쓸모없는 메모에 낭비할 필요는 없다. 버릴 것은 과감하게 버리고, 숙성이 필요한 메모는 더 보관한다. 단순히 메모만 하는 임시 메모는 타인이 만든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 수천 개의 메모가 쌓여도 들춰보지 않으면 쓸모없다. 무의식적으로 메모를 받아들이기보다는, 단 하나의 메모라도 내 생각을 더해 의식적으로 각인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단 한 개의 메모라도 내 생각을 더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 번째 단계인 '영구 메모'는 매우 창의적이다. 문헌 메모를 확장해 더 기발한 아이디어로 발전시키는 것이 영구 메모의 목적이다. 영구 메모는 다른 메모들과 연결되어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할 수 있다. 영구 메모는 특정 분야에 집중해야 하며, 즉각적으로 실용화할 수 있는 아이디어로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영구 메모의 핵심은 이 메모들을 상호 연결해 지식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다. 나는 영구 메모를 스크리브너라는 툴을 사용해, 작가들이 어떻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한 권의 책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지 설명할 예정이다.


아직 제텔카스텐의 개념이 완전히 자리 잡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노션을 통해 차근차근 실습하며 메모를 입력해 나가다 보면 점점 더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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