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와 함께 추상적 사고를
How happy is the blameless vestal's lot!
The world forgetting, by the world forgot.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Each pray'r accepted, and each wish resign'd
허물없는 수녀의 삶은 얼마나 행복한가!
세상을 잊고, 세상에게 잊히는 삶.
티 없는 마음에 비추는 영원한 햇살이여!
모든 기도는 이루어지고, 모든 소망은 단념된 그 평온.
알렉산더 포프,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
영원한 햇살은 창문 너머에서 서재까지 길게 걸쳐 있다. 그곳은 서재라기엔 초라하고, 차라리 ‘글자들의 무덤’이라 부르는 편이 어울리는 방 한구석이다. 새벽빛이 먼지 쌓인 책등 위로 비스듬히 내려앉는다. 책등에 박힌 금박 제목들은 한때 영생을 약속할 것처럼 영롱하게 빛났지만, 지금은 굳게 입을 다문 채 유령처럼 서 있다.
세상의 모든 지식에 접속할 수 있는 시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지식의 깊이를 음미할 사유의 근육은 나날이 퇴화하고 있다. 수십 개의 웹페이지 탭을 현란하게 오가며 문장을 수집하지만, 정작 내 손으로 써 내려간 문장은 조악한 인용의 누더기에 불과하다. 정보의 거식증 속에서 나는 익수자처럼 허우적댄다. 아, 이 지긋지긋한 지식의 소화불량을 깨끗이 도려내고, 포프의 시구처럼 ‘티 없는 마음(spotless mind)’에 비추는 영원히 평온한 햇살만을 누릴 수는 없을까.
바로 그 순간,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주인공 조엘의 심정이 바로 내 것이 된다. 어젯밤, 마감 압박 속에서 백지를 노려보며 나는 간절히 빌었다. 이 모든 자료와 레퍼런스를 머릿속에서 제발 누가 깨끗이 지워주고, 단 하나의 정수만 남겨달라고. 만약 오늘날 작가를 위한 라쿠나가 있다면, 그곳은 아마 복잡한 정보와 씨름하는 나의 고통을 덜어주겠다고 약속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기술자의 이름은 다름 아닌 인공지능(AI)일 것이다. 세이렌의 목소리를 한 알고리즘이 내게 속삭인다.
"당신을 괴롭히는 저 난해한 텍스트의 형상들, 저 혼란스러운 데이터의 집착에서 벗어나게 도와줄 게. 당신의 머릿속에 오직 티끌 없고 순수하고 '영원한 햇살'만 내리쬐도록 만들어줄 게."
과연 이 교활하고 달콤한 제안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복잡한 현상의 무성한 곁가지들을 쳐내고 생각의 줄기를 드러내는 이 추상적 정신 활동에, AI라는 낯선 이를 동반자로 들여도 괜찮은 걸까. 어쩌면 이 질문에 답하는 과정이야말로, 기술 시대에 사유하고 글을 쓰려는 가장 인간적인 태도일지도 모른다.
라쿠나의 기억 제거 절차는 ‘기억 지도’를 그리는 것에서 시작된다. 조엘이 클레멘타인과 관련된 온갖 물건을 가져오면, 기술자들은 그 물건에 얽힌 기억의 흔적을 추적해 뇌 속에 거대한 지도를 구축한다. 지워야 할 대상의 윤곽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글쓰기 또한 마찬가지다. 복잡하게 얽힌 정보의 군더더기를 걷어내고 그 핵심 구조와 원리를 꿰뚫어 보는 기술, 즉 추상적 사고가 필요하다. 구체적 사고가 테이블 위에 놓인 사과를 관찰하는 일이라면, 추상적 사고는 그 사과 열매에 불어온 산맥의 시원한 바람과 수억 년의 지질학적 시간을 동시에 조망하는 것에 가깝다.
길을 잃지 않으려면 먼저 숲 전체의 지도를 그려야 한다. 라쿠나의 문을 두드리는 심정으로 AI에게 말을 걸어 보자.
[실전 프롬프트 1: 기억 지도 제작]
나는 ‘AI의 추론을 통한 사고방식’과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 숨겨진 의미’ 사이의 유사점을 다루고 싶어. 이 텍스트의 전체 구조를 파악할 수 있도록 ‘기억의 지도’를 만들어 줘.
- 이 글의 핵심 주제를 비전공자도 이해할 수 있는 한 문장으로 정의해 줘.
- 주제를 뒷받침하는 핵심 주장 2가지를 명확히 추출해 줘.
- 각 주장을 뒷받침하는 핵심 근거와 예시를 각각 분리해서 정리해 줘.
- 핵심만 짧게 제시해 줘
제미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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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와 <이터널 선샤인>의 본질적 유사점:
1. 조각난 정보로 세상을 배운다: AI와 인간 모두 흩어진 데이터(기억) 조각들을 연결하며 관계와 의미를 추론한다.
2. 나쁜 기억도 성장에 필수적이다: 고통스러운 기억이나 오류 데이터를 지우면, 오히려 전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된다.
AI의 통찰을 읽는 순간, 안갯속에 가려져 있던 숲의 윤곽이 드러나는 듯했다.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던 지식의 파편들이 제자리를 찾고, 단단한 논리의 뼈대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정보를 요약하는 행위가 아니다. 지워야 할, 혹은 정복해야 할 대상의 지도를 손에 넣는 것이다.
영화의 백미는 기억 제거 시술이 진행되는 동안, 조엘이 자신의 기억 속을 다시 여행하는 장면이다. 그는 사라져 가는 기억의 조각들을 필사적으로 붙잡으며 그것들이 가진 의미와 소중함을 깨닫는다. 망각의 과정이 역설적으로 가장 생생한 재해석의 과정이 되는 것이다.
추상적 사고의 핵심 역시 여기에 있다. 핵심을 파악했다면, 이제 그 딱딱한 개념을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 즉 내면의 경험과 연결하여 재구성하는 과정이 요구된다. 이 과정의 가장 강력한 도구가 바로 ‘유추(Analogy)’다. 전혀 달라 보이는 두 대상을 비교하여 구조적 유사성을 발견하는 유추는, 낯선 개념을 이해하는 가장 창의적인 방법이다.
나는 여전히 멀게만 느껴지는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티 없는, 완전무결한 사랑’의 개념을 내 기억의 영역으로 끌어당기기 위해, AI에게 조금 짓궂은 요구를 해보기로 했다.
[실전 프롬프트 2: 기억의 재구성]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흠 없는, 완전무결한 사랑’이라는 개념을 다음 세 가지 대상에 빗대어 설명해 줘. 비유는 최대한 창의적이고 직관적이었으면 좋겠어.
오래된 부부
한 쌍의 비둘기
소설 <폭풍의 언덕>의 캐서린과 히스클리프
제미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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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터널 선샤인>의 '흠 없는 사랑'이란...
1. 오래된 부부에게는, 수십 년간 함께 쓴 낡은 식탁의 흠집과 얼룩을 모두 지워버리고 매끈하게 코팅한 것. 겉보기엔 완벽한 새것 같지만, 함께 나눈 수많은 아침과 저녁, 웃음과 다툼의 역사가 사라져 버린, 아무런 이야기를 담지 못하는 가구일 뿐.
2. 한 쌍의 비둘기에게는, 스스로 나뭇가지를 물어다 둥지를 틀지 않고, 인간이 만들어준 완벽한 플라스틱 새장 속에서 살아가는 것. 비바람을 함께 피하고 서로의 체온으로 알을 품었던 거친 과정의 기억은 사라지고, 그저 안전하고 흠 없는 공간에 놓여 있을 뿐, 그 사랑은 스스로 쟁취한 것이 아닌 주어진 것.
3. <폭풍의 언덕>의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에게는, 소설 <폭풍의 언덕>에서 히스클리프의 잔인함, 캐서린의 이기심,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거친 황야를 모두 삭제해 버린 것. 모든 비극과 광기가 사라진 자리에는 서로를 파괴할 만큼 격렬했던 사랑의 이유도 함께 증발. 결국 남는 것은, 예의 바르지만 서로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하는 두 남녀의 밋밋한 이야기뿐.
AI가 펼쳐놓은 유추의 향연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특히 ‘오래된 부부’라는 다소 진부한 출발점에서 ‘함께 나눈 수많은 아침과 저녁, 이야기를 담지 못한 가구’라는 구체적 사물로 파고든 대목에선 무릎을 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 지점에서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었다. AI가 던진 제안을 비판하고 재해석하여 나만의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뇌는 작동을 멈췄다. 나 역시 오래된 부부를 떠올렸지만, 기껏해야 ‘서로 닮아간다’는 닳고 닳은 비유밖에 떠올리지 못했다. AI가 ‘흠집 난 식탁’으로 파고들 때, 나의 뇌는 관념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이것은 패배감이었다. 나의 사유가 AI가 깔아놓은 레일 위를 불안하게 따라가는 기차 신세가 된 듯한 무력감. 사유의 기원을 위협받는 지식인의 실존적 공포, 즉 ‘생각의 안락사’에 대한 섬뜩한 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기억 제거 절차의 마지막, 조엘의 뇌 속에서 클레멘타인에 대한 모든 기억이 사라지기 직전, 단 하나의 기억이 남는다. 처음 만났던 ‘몬타우크’ 해변의 기억. 이 기억은 너무나 근원적이어서 결국 지워지지 않고, 두 사람을 다시 만나게 하는 상징으로 남는다.
나는 2단계에서 맛본 무력감을 극복해야 했다. AI의 창의력을 시험대에 올릴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이것은 단순히 더 나은 아이디어를 구걸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AI가 제안한 상징의 조각들 속에서, 나의 이야기를 되찾기 위한 필사적인 시도였다.
[실전 프롬프트 3: 상징의 발견]
‘AI에게 생각할 권리를 뺏기지 않을 방법’이라는 나의 주제를 압축적으로 상징할 수 있는 이미지나 사물, 혹은 상황을 5가지 제안해 줘. 그리고 각각의 상징이 어떤 다층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설명해 줘.
Clau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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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쓰는 일기장과 펜
1. 표면적 의미: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적 사고의 보존
2. 다층적 의미: 개인적이고 내밀한 사유 공간의 수호, 즉석에서 수정하고 지울 수 없는 생각의 흔적, AI가 접근할 수 없는 물리적 영역에서의 독립적 사고
미로 안에서 길을 찾는 사람
1. 표면적 의미: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의 중요성
2. 다층적 의미: 효율성보다 경험과 시행착오의 가치, AI의 최적화된 해답을 거부하고 우회로를 택할 권리, 길을 잃을 자유와 헤맬 권리의 보장
악기를 연주하는 손
1. 표면적 의미: 인간만의 창조적 표현
2. 다층적 의미: 완벽하지 않은 연주의 아름다움, 감정과 직관이 만들어내는 예측 불가능성, AI가 모방할 수 있어도 대체할 수 없는 몸의 기억과 경험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는 사람의 뒷모습
1. 표면적 의미: 사색과 명상의 시간
2. 다층적 의미: 생산성 없는 멍함의 권리, 목적 없는 사유의 소중함, AI의 데이터 분석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내면의 깊이
도서관에서 무작위로 책을 꺼내는 손
1. 표면적 의미: 우연한 발견과 예상치 못한 학습
2. 다층적 의미: AI의 맞춤형 추천을 거부하고 세렌디피티를 선택하는 자유, 비효율적이지만 인간적인 탐구 방식, 알고리즘이 예측하지 못한 지적 여정을 떠날 권리
나는 AI가 제안한 첫 번째 상징, ‘손으로 쓰는 일기장과 펜’을 붙잡았다. AI는 그것을 ‘수정하고 지울 수 없는 생각의 흔적’이라고 분석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나는 여기에 나만의 기억과 감각을 더하기로 했다. 사각거리며 종이를 긁는 펜촉의 물리적인 위안, 푸른 잉크가 백지에 스며드는 순간의 되돌릴 수 없는 책임감, 그리고 시간이 지나 빛바랜 페이지에서 발견하는 서툰 생각의 초상. 이것이야말로 AI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몬타우크’였다.
AI는 나에게 수백 개의 화려한 해변을 보여줄 수 있다. 하지만 그중 어느 곳에서 누구와 함께한 기억에 마음이 시리고 아픈지는 오직 나만이 안다. 기술의 파도가 아무리 거세도, 결국 사유라는 배의 키를 쥔 것은 나 자신이다. 때로는 길을 잃고, 때로는 좌초할지라도, 그 모든 항해의 기록이야말로 AI가 결코 가질 수 없는 나의 유일한 걸작이 될 것이다.
나는 오늘, 백지 위에 나만의 몬타우크를 그리기 위해, 까칠해진 손끝으로 다시 펜을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