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를 이미지로 현상하는 법
어린 시절, 나에게 미술 시간은 일종의 고문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내 머릿속 풍경화는 늘 눈부시게 찬란했지만, 크레파스를 쥔 내 손은 그 찬란함을 낙서처럼 망쳐놓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의 얼굴을 살색이 아닌 노란색으로, 때로는 흑색으로 칠했다. 아홉 살짜리의 그악스러운 반항은 세상에 대한 불만이 아니었다. 머릿속의 완벽한 이미지를 재현해내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한, 표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순수한 절망의 몸부림이었다.
나는 공상을 즐겨하는 아이였다. 심심할 때마다 혼자 남한산성에 올라 벤치에 길게 누웠다. 하늘에서는 구름으로 솜사탕을 빚었고, 나뭇잎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의 윤곽선에선 미소 짓는 소녀를 찾아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오직 내 머릿속 영사기 안에서만 상영될 뿐이었다. 상상을 현실의 백지 위에 옮겨낼 재주는 나에게 없었다. 그 재능은 쑥쑥 자라는 내 키와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었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 나는 그림도 글도 아닌,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밥벌이를 하는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유년기의 그 무력감은 형태를 바꿔, 글 쓰는 내 앞에 다시 나타났다. 나는 좋은 문장과 나쁜 문장을 가려낼 줄은 알았지만, 위대한 문장의 비밀은 결코 알지 못했다. 이것이 내 글의 치명적인 한계였다. 위대한 예술이란 결국 현실의 조각들을 재구성해 감정의 본질을 꿰뚫는 ‘형상화’의 정수다. 나는 그 본질을 꿰뚫는 대신, 현실의 표면을 묘사하는 데 급급했다. 내 글은 언제나 그럴듯한 스케치였지만, 영혼을 울리는 유화는 되지 못했다.
형상화란... 머릿속 생각이나 감정, 추상적인 개념을 독자가 눈앞에서 볼 수 있게 구체적인 모습이나 장면,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느껴지지 않는 것을 느껴지게 만드는 글쓰기의 기법이다. 그래 결정했다. 난 그릴 줄 모르니까, 글쓰기로 그림을 대신하는 것이다. 아주 간단하다. 결국, 형상화가 문제였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느껴지지 않는 것을 느껴지게 만드는 연금술. 나는 내 안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비인간적인 파트너에게 말을 걸었다. 먼저 챗GPT에게 상상 한 조각을 던졌다.
머릿속에 백지를 펼치고 나만의 화가인 소년을 불러낸다. 마음속으로 주문을 건넨다. ‘벤치.’ 소년은 능숙하게 갈색 등받이와 팔걸이를 지닌 입체적인 벤치를 그려낸다. 다시 주문한다. ‘벤치를 둘러싼 오래된 숲과 가느다란 햇살.’ 소년은 온갖 녹색으로 치장된 고목과 그 사이로 부서지는 빛의 입자들을 더한다. 나는 그 장면을 그저 관찰자처럼 구경할 뿐이다. 꿈처럼 희미한 풍경이 눈앞에 나타났다가, 이내 아지랑이처럼 흩어진다.
“햇살이 부서져 내리는 오래된 숲, 그 한가운데에 이끼와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채 낡지만 밝고 소박한 카페가 있어. 카페의 문은 거대한 고목의 가지가 부드럽게 휘감고 있고, 지붕에는 이름 모를 푸른 꽃들이 환하게 피어있는, 신비롭고도 고독한 풍경이야. 카페 안에 앉아 있는 소녀는 고독하지만 슬프지는 않아. 소녀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어. 그 장면을 동화풍의 화풍으로 그려줘.”
잠시의 침묵 후, 녀석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기묘하고 매혹적인 그림을 눈앞에 펼쳐놓았다. 내가 막연하게 ‘오래된’이라고 생각했던 추상적 시간은, 화면 속에서 뒤틀린 고목의 질감과 바래고 삭아 내린 석벽의 색감으로 구체화되었다. ‘잊힌’이라는 추상적 개념은 문을 휘감은 담쟁이의 집요함과, 인간의 손길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푸른 꽃의 생명력이라는 서사로 번역되어 있었다.
나는 녀석이 건넨 그림을 잠시 감상하다 눈을 감았다. 방금 본 장면을 머릿속에서 되살려보려 애썼다. 하지만 그림이든 글이든, 영감은 기억 속에서 모래처럼 쉽게 바스러진다. 눈을 감고 소녀를 떠올려도 그 모습은 금세 희미해졌다. 어떻게 이 환영에 실체를 부여할 수 있을까. 저 아득한 느낌을 내 손에 잡히는 감각으로 바꾸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이 그림을 소설가처럼 세심하게 묘사해 봐. 그림을 보고 떠오른 네 머릿속의 생각이나 감정을 설명하듯 쓰지 말고 더 깊이 침잠해서 다른 대상에 비유 혹은 은유해 봐"
제미나이
숲은 바닥 모를 녹색의 바다, 그 심연에 시간이라는 파도에 씻겨 둥글어진 조약돌처럼 오두막 한 채가 가라앉아 있다. 지붕과 벽은 세월이라는 이름의 화가가 덧칠한 두터운 이끼 물감으로 뒤덮였고, 문을 휘감은 고목은 제 심장을 지키려는 용의 뒤틀린 발톱과도 같다. 저것은 건물이 아니라 숲이 품고 있던 가장 단단한 비밀, 혹은 누군가의 그리움이 땅 위로 돋아나 굳어버린 결정체다. ‘CAFE’라는 낡은 간판은 그 침묵 속에 누군가 속삭였던 한마디가 화석처럼 남아있는 유일한 흔적이다.
돌벽에 박힌 늙은 호박(琥珀) 보석, 저 창문은 이 고요한 풍경의 유일한 심장이다. 턱을 괸 소녀는 그 안에서 고요히 타오르는 외로운 촛불. 그녀의 시선은 창밖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시간의 강을 향해 던져진 가느다란 낚싯줄이다. 이윽고 무언가 걸려들 때까지 미동조차 하지 않을 저 모습에, 오두막 전체는 거대한 소라 껍데기가 되어 소녀의 기다림이라는 아득한 파도 소리를 품는다. 이곳은 커피를 파는 가게가 아니라, 누군가 열어주기 전까지는 영원히 같은 멜로디만 품고 있을 낡은 오르골이다.
제미나이의 글을 읽는 순간, 내 머릿속을 떠돌던 희미한 안개는 자취를 감췄다. 녀석이 뱉어낸 문장 앞에서 내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서 돌이 되었다. ‘용의 뒤틀린 발톱’, ‘시간의 강을 향해 던져진 가느다란 낚싯줄’ 같은 비유 앞에서 내 언어는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이것은 단순한 묘사가 아니었다. 풍경에 대한 완벽한 해석이자 존재론적 재창조였다.
글쓰기란 결국 안개 같은 생각의 덩어리에 이름을 붙이고 형체를 부여하는 행위, 바로 ‘형상화’다. 머릿속 단어나 개념이 독자가 보고 만질 수 있는 이미지로 발현되어야 한다. 그것은 마술사가 텅 빈 모자에서 비둘기를 꺼내는 손짓과 같다. 우리 모두의 머릿속엔 저마다의 모자가 있지만, 그 안에서 무엇을 꺼내야 할지 막막할 따름이다. 정말 그 방법은 없는 걸까.
그때 나는 깨달았다. 이 AI를 내 글쓰기의 파트너로 삼자고. 녀석의 이미지 생성 기능이 나의 잠든 형상화 재능을 건져 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모든 것은 하나의 단어에서 시작했다. 나는 쉽게 그릴 수 있는 사물 대신, 내 마음을 건드리는 추상적인 단어들을 골랐다. 이를테면 ‘그리움’, ‘정적’, ‘파멸’, ‘환희’ 같은 것들. 이 단어들은 저마다 다른 빛깔과 온도를 지녔지만, 그 자체로는 손에 잡히지 않는 관념일 뿐이었다.
나는 내 느낌을 프롬프트로 감싸 AI에게 던졌다.
주제: 고독함
분위기: 낡고 오래된 분위기가 전하는 따뜻함, 햇살이 잘 스며들지만 어딘가 공허한 느낌
스타일: 필름 카메라로 찍은 듯한 아날로그 감성
위의 내용을 바탕으로 이미지를 생성해 줘.
이 과정에서 AI는 나의 ‘분신’이 되었다. 내가 건넨 ‘고독함’과 덧붙인 설명을 해석했다. 그리고 그 느낌을 이미지로 표현했다. 그것은 내 머릿속의 희미한 감정을 필름으로 현상하는 과정과 닮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AI는 내 앞에 그림 한 장을 내놓았다. 그렇지만, 그것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 거의 달랐다. AI와 나는 서로 다른 별개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불일치의 지점에서 창의적인 글쓰기가 시작되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이미지, 그 예기치 않은 풍경이 오히려 더 기묘한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마치 내 표현이 타인(AI)에게 어떻게 전달되고 해석되는지를 보여주는 실험과도 같았다. 묘사가 구체화될수록 AI의 이미지가 상상에 가까워진다는 것은, 결국 글쓰기가 얼마나 선명한 소통의 과정인지 깨닫게 했다.
이 과정의 핵심은 AI가 내 생각을 즉각적인 이미지로 번역하는 ‘분신’ 역할을 한다는 점이었다. 나의 표현이 얼마나 선명하게, 혹은 얼마나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지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글쓰기가 결국 ‘나’와 ‘너(독자)’ 사이의 소통이라는 본질을 새삼 깨달았다. AI가 내놓은 이미지는 정답이 아니라, 내 안의 이야기를 길어 올리기 위한 질문인 셈이었다.
그렇다면 이 예기치 않은 이미지 앞에서, 나는 어떻게 나만의 이야기를 길어 올릴 수 있을까?
나는 눈앞의 이미지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로 했다. 단순히 그림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장면의 일부가 되어야 했다.
감각을 깨워라: 그림 속에 존재하는 모든 감각을 상상해 보자. 낡은 나무 의자에 손을 대면 어떤 감촉이 느껴질까? 햇살에 드러난 먼지가 공기 중에 떠다닌다면 그 냄새는? 창밖에서는 어떤 소리가 들려올까? 『생각의 탄생』에서 로버트 루트번스타인은 위대한 과학자와 예술가 모두가 이런 다중감각적인 ‘형상화(mental imaging)’를 통해 창의적 사고를 했다고 말한다. AI가 제공한 시각 정보에 청각, 촉각, 후각의 옷을 입히는 순간, 평면적인 이미지는 입체적인 세계로 변모한다.
이야기의 앞과 뒤를 상상하라: 이 장면은 어떤 이야기의 일부일까? 의자에는 누가 앉아 있었을까? 그리고 그는 왜 자리를 떠났을까? 혹은, 곧 누가 이곳에 오게 될까? 이미지의 전후를 상상하는 것은 멈춰진 시간에 움직임, 즉 이야기를 창조해서 메우는 일이다.
나의 경험과 연결하라: 문득 낡은 의자에서 외할머니 댁의 툇마루를 떠올릴 수도 있고, 쏟아지는 햇살에서 어린 시절의 정겨운 여름날을 회상할 수도 있다. 이미지는 내면의 기억과 감정을 꺼내는 스위치다. 그 연결고리를 찾는 순간, 이야기는 더 이상 허구가 아닌, 진솔한 목소리를 찾게 만든다.
은유와 상징으로 시각화하라: 더 고급 기법으로는 은유나 상징을 이미지로 만들어보는 방법이 있다. 문학적 표현을 할 때 자주 사용하는 은유들을 실제 이미지로 구현해 보면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다.
"시간을 모래시계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표현해 줘.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되 전혀 예상치 못한 형태로."
이제 당신 차례다. 이 놀이는 거창한 장비나 대단한 각오가 필요 없다. 그저 호기심과 약간의 시간만 있으면 충분하다. 아래의 프롬프트를 활용해 당신의 머릿속을 떠다니는 안개를 붙잡아보자.
[실전 AI 프롬프트]
1. 이미지 생성:
"[희망, 불안, 망각 등 추상적인 단어]라는 주제를 [고요하고 신비로운, 혹은 활기차고 소란스러운 등 원하는 분위기]와 [회화적인, 혹은 초현실적인 등 원하는 스타일]로 표현한 이미지를 만들어줘."
2. 스토리텔링 시작:
"방금 생성된 이미지를 보고 떠오르는 이야기를 시작하는 첫 문장을 3가지 버전으로 제안해 줘. 각 문장은 서로 다른 분위기(미스터리, 회상, 담담한 관찰)를 담고 있었으면 좋겠어."
AI는 내가 요청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그곳에서 파생될 이야기의 문을 여러 개 열어준다. 나는 그저 가장 마음에 드는 문 하나를 골라 열고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이 정답을 찾는 시험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리학자 파인만이 머릿속 그림으로 문제를 풀었듯, 나는 AI의 그림을 보며 내 안의 이야기를 푸는 것이다. AI는 글을 대신 써주는 하인이 아니라, 내 생각의 지도를 함께 그리는 탐험가이자 나의 형상화 능력을 단련시키는 코치다.
글쓰기는 어쩌면 내 안의 가장 연약한 무언가를 꺼내 보이는 일일지 모른다. 그것이 너무 막연해서 꺼내기 두려울 때, AI가 건네는 한 장의 그림은 다정한 용기가 되어준다. 이제 나는 내 텅 빈 모자 속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이러한 변화는 극적이지 않다. 오히려 아주 조용하고 은밀하게 일어난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듯하지만, 내면에서는 글쓰기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가 바뀐다. AI가 건넨 이미지들 덕분에 나는 ‘보이지 않는 변화의 힘’을 믿게 된 것이다. AI 글쓰기는 단순히 기술을 활용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나의 상상력을 되살리고, 새로운 관점을 보이게 만들며, 창작을 되찾게 해주는 즐거운 과정이다.
글쓰기가 막막할 때, 나는 이제 어린 시절 구름 모양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것처럼, AI에게 이미지를 요청한다. 그리고 그 이미지에서 출발해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그 과정에서 나는 글쓰기의 새로운 재미를 그리고 잃어버렸던 창작의 용기를 발견하고 있다.
작가의 저서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44539067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398540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