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 생각에 갇힌 당신에게
기차가 너른 들판 사이를 슬로 모션처럼 통과하고 있다. 차창 바깥, 나뭇가지에 매달린 나뭇잎이 쨍쨍한 햇살을 받아 선명하게 빛난다. 마치 푸른 바다에서 고요하게 넘실거리는 파도처럼 이파리는 자신의 비늘을 연신 흔들어 댄다. 그것은 차창이라는 2차원적 액자에 사로잡힌 정지된 풍경화다. 하지만 내 눈은 기어코 그 평면의 그림에 깊이를 새겨 넣는다. 저 팔랑거리는 잎사귀 끝에 칼날처럼 걸쳐진 햇빛과, 그 빛을 머금고 시시각각 달라지는 미묘한 녹색의 명암, 그리고 보이지 않는 잎사귀 이면에 숨은 서늘한 그늘까지도.
내 눈은 세상을 3차원적으로 바라본다. 두 개의 안구는 평면을 입체로 바꿔놓는 신묘한 기술을 장착했다. 하지만 문득 서늘한 의심이 고개를 든다. 어린 시절,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 그것이야 말로 어쩌면 진짜 나라고 믿었던 것처럼, 어쩌면 지금껏 내가 '본다'라고 믿은 모든 것은 그저 뇌가 만들어낸 정교한 3차원적 허상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나는 세상이 아니라, 내 머릿속이 연출한 한 편의 연극에 평생을 감쪽같이 속아온 관객에 불과하다.
세상은 1차원적인 점으로도, 2차원적인 면으로도, 또 완벽한 입체로 변신할 수 있다. 하지만 엄연히 나에겐 한계가 존재한다. 아무리 1, 2차원 정보를 3차원으로 변화시키고 스케일을 자유자대로 조절하고, 내 마음대로 세상을 이해하고 범주화시켜도 나는 3차원이라는 고정된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제한은 나의 창의성을 가로막는다.
아무튼 세상은 복잡해 보이지만 나는 그것을 내 차원안으로 편입시킨다. 때로 2차원의 세상으로 추락하기도 한다. 상상하는 것이다. 2차원에 머무르는 나는 세상을 어떻게 인식할까? 애벗의 소설 <플랫랜드>에 거주자처럼 평면을 상상해 본다. 나는 2차원 안에 납작하게 눌려있다. 저 멀리 3차원 스피어가 추락 중이다. 하지만 그것은 점에서 시작해서 커다란 선이 되었다가 다시 점이 되어버린다. 나는 2차원 존재로 전락했기 때문에 3차원의 스피어를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재의 나는 3차원 스피어를 이해할 수 있다. 이미 나는 3차원에 오랫동안 머물렀기 때문이다.
눈을 떴다. 그동안 창밖에는 여전히 들판과 간혹 작은 초가산간이 상영되고 있다. 그것들은 나에게서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그러다가 빛을 발산하기도 힘을 잃고 조그맣게 부피를 줄이기도 한다. 사물이 지닌 근원적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역시 두 개의 안구 덕분이다. 나는 깊이를 알 수 있고 부피와 무게를 안구의 3차원 운동 덕분에 짐작할 수 있다. 세상과 나의 관계를 지각할 수 있고 내 위치를 상대적으로 계산할 수 있다. 그것은 감각일까, 인식의 차원일까.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 문장은 내가 누구인지 설명해 주기보다, 오히려 더 큰 질문을 던진다. 쓰는 나는 누구인가. 텅 빈 화면 앞에서 커서가 깜빡일 때마다, 이 질문은 부메랑처럼 되돌아온다. 어쩌면 나를 아는 것은, '나'로부터 정확한 '거리'를 재는 일일지도 모른다
조금 멀리, 한 발짝 정도 떨어져서 나를 인식하고 싶다. 그렇지만 나에겐 그럴만한 능력이 없다. 나는 내 전두엽 1밀리미터 정도 앞에서 세상과 나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통제한다고 상상할 뿐이다. 그것도 내가 정의한 가설이 아니다. 이미 누군가, 나보다 더 똑똑한 사람들이 제정한 법칙인 것이다. 그러니까 통제는 거리감의 인식이다. 나와 세상 사이의 원근법, 다시 강조하지만 2차원적인, 아니 1차원 점 같은 나라는 존재를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여기서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숙제가 주어진다. 나를 제대로 봐야, 세상도 볼 줄 알 테니까. 그것은 감각의 영역이 아니다. 화가들이 소실점이라는 개념을 도입해서 3차원 정보를 2차원 캔버스에 투영한 것처럼, 인식의 영역이다. 내 정체성은 쓰는 사람이다. 쓴다는 것은 다의적이지만 글을 쓴다는 것으로 압축될 수 있다.
글은 표면적인 형태를 갖는다. 이것은 2차원적인 선들이 온갖 형태로 조합된 결과다. 나는 그 글자를 모양으로 그리고 원근법으로 해석한다. 가까이, 그러니까 몰입해서 읽고, 다시 화학적 작용의 힘을 빌어 상상하며 대상과 다소 멀리 떨어져서 바라본다. 마치 다른 실체를 대하는 것처럼. 글은 소실점 바깥에 머무는 지적 존재다. 말하자면 기차 창밖에 펼쳐지는 무심한 풍경 속에 숨은 인생의 민낯 같은 것이다.
나는 그것에 닿을 수 없다. 오직 시각적으로 그 정보를 흡수할 뿐이다. 시각 정보는 또 내 뇌의 어느 깔때기 같은 부위에서 새롭게 각색되는데, 그 정보는 지금처럼 표현하고 있다.
나와 세상 사이의 거리,
그 거리 사이에 놓인 무수한 존재들,
또 무한하게 거리를 온가는 자비 없는 시간들.
나는 현재 차원적 사고를 하고 있다고 거창하게 그 의미를 해석한다. 차원적 사고는 당연하게 여기던 공간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이다. 잊어버린다는 의미는 차원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이다. 나는 때로는 개미가 되고 때로는 태양이 되고, 심지어는 차원을 관할하는 신이 된다. 그것이 차원적 사고의 결과다. 또한 시간이 과거에 미래로, 즉 단방향으로 흐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언제든 원한다면 악몽 같은 중학교 시절로 돌아가, 수학 문제 못 푼다고 따귀를 때리던 그 선생의 얼굴을 쏘아볼 수 있다. 그리고 그의 팔꿈치를 당당하게 막아설 수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방식이다. 물리적, 개념적,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는 방식이다. 나는 모든 시공간에 머무를 수 있고 속도와 방향을 가질 수 있다. 내가 다차원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는 순간, 나에겐 예술이라는 또 하나의 감각이 태어난다.
그렇다면 다차원적인 존재가 되려면 어떤 훈련이란 게 필요한 것인가. 글쎄, 나는 과학적인 훈련 방법을 제공할 수는 없다. 다만 3차원적인 존재에 갇혀버린 사람들은 보통 세상을 여러 각도에서 보고 입체적으로 파악하며 전체적인 윤곽을 그릴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잘 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이 세상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지각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지각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정체성을 소실한 인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차원적 사고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나는 또 AI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지 써 내려간 두서없는 글에 과연 의미를 분명하게 드러냈는지 나조차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스스로의 생각이 막다른 길에 다다랐을 때, 나는 인공지능에게 '차원적 사고'의 본질을 물었다. 그것은 하나의 대상을 여러 각도와 깊이에서 입체적으로 파악하는 힘. 겉모습 너머의 관계와 맥락까지 꿰뚫어 보는 시선이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나'라는 정체성 역시, '작가'라는 단 하나의 이름표가 아니라 수많은 역할과 경험, 모순된 욕망이 뒤엉킨 복합적인 존재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글쓰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단조로운 사실을 나열하는 대신, 인물에게 입체적인 그늘을 만들어주고 사건에 다층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차원을 넘나드는 글쓰기의 시작이었다.
흠, 나는 때로 내가 아닌 악당이 될 수 있다. 나는 악당의 시점으로 주변 인물들에게 온갖 패악질을 펼칠 수 있다. 그러니까 단선적인 서사에 입체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또한 현재 그릇된 판단이 미래에 어떤 사건을 발생할지에 대해 상상할 수 있다. 이를 테면, 달리는 기차의 창 바깥으로 홀연히 몸을 던져보는 상상에 빠져보는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의자에 비스듬히, 약간 삐딱하게 누워 세상을 다른 관점으로 바라본다. 누구나 보는 그저 그런 장면이 아닌, 타인이 경험하지 못한 구도를 만들어보는 것이다.
옆으로 기다랗게 누워 창밖을 불편한 시선으로 보게 되니. 다빈치의 '수태고지'가 떠올랐다. 대부분의 그림은 정면으로 감상할 때 가장 이상적으로 보이도록 그려진다. 하지만 정면은 하나의 고정된 관점이다. 정면에서 주시하는 게 올바른 감상법은 아니다. 그것은 유일한 진실이 결코 아니다. 진실은 내가 만드는, 내가 세상을 다르게 보고 재해석하는 차원적 사고의 다른 모양이다. 다빈치의 수태고지는 정면으로 바라보면 어색한 구석이 많다. 성모 마리아의 오른팔은 부자연스럽고 앞에 놓인 독서대의 모서리도 어딘가 맞지 않다. 다빈치의 실수라고 정면에서 그림을 바라보던 모든 사람이 외쳤다. 하지만 이 그림은 피렌체 성당의 측면에 설치될 목적으로 그려졌다. 그러니까 애초에 정면이 아닌 오른쪽 아래에서 비스듬히 위를 올려다보는 관람객의 시선에 기준을 맞춘 것이다.
다빈치는 차원을 넘어서는 존재였다. 세상을 단순하게 바라보지 않고 3차원을 뛰어넘은 자신만의 시공간을 만들어냈다. 거기엔 깊이감과 공간감, 그림이 설치될 건축 공간, 작품을 바라볼 인간의 위치가 고려되었다. 다빈치는 세상을 3차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세상을 통합하거나 자신 만의 기준으로 해체했다. 수태고지는 단순한 예술작품이 아닌, 시각적 트릭과 현실 공간이 함께 만나는 고차원저인 의미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다빈치가 천재라는 사실이 여기서 증명된다.
다빈치는 관람객의 시선이라는 또 다른 차원까지 계산에 넣음으로써 평면의 캔버스 위에 시공간을 재창조했다. 그 순간 나는 다빈치가 위대한 '메타인지'의 소유자였음을 깨달았다. 그는 단지 그림을 그리는 '기술'에만 몰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그림이 어떻게 보일지, 어떤 맥락에 놓일지를 끊임없이 감독하고 조율하는 '연출가'의 시선을 가졌던 것이다. 그렇다. 차원적 사고가 여러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눈'이라면, 메타인지는 그 눈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혹 한 곳에만 갇혀 있지는 않은지 감시하는 '또 다른 눈'인 셈이다
차원적 사고는 무엇을 생각하고 그것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를 말한다. 대상을 다른 차원과 다른 스케일,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는 행위다. 메타인지는 내 생각을 어떻게 인식하고 그것을 통제자로서 조절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말하자면 이것은 자각과 통제의 영역이다. 두 사고는 상호보완적이며 서로를 강화시킨다.
차원을 초월한 사고를 하게 되면, 생각이 현재의 시공간을 뛰어넘게 만든다.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 4차원을 이해할 수 없지만, 4차원의 단면들에는 과거-현재-미래가 모두 담겨 있고 2차원에서 3차원의 스피어가 점에서 선으로 변화하는 것처럼, 4차원이 순서적인 시간으로 변화한다는 사실은 직감할 수 있다. 물리적 시간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심리적으로 느끼는 시간은 감정과 집중도에 따라 밀도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다.
창밖의 녹색 경연이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 나는 무릎 위 보르헤스의 <픽션들>을 펼쳤다. 끝없이 이어지는 육각형의 방들로 이루어진 <바벨의 도서관>. 그곳은 내가 지금까지 헤매온 차원적 사고의 종착지처럼 느껴졌다. 온갖 글자가 무질서하게 널린 그곳에서 의미 있는 조합을 찾아내는 일. 그것이야말로 다빈치의 시선으로, AI의 지성으로, 나 자신의 언어로 무한한 세상 속에서 나만의 질서를 창조하는 글쓰기와 다르지 않았다. 나는 유한한 존재다. 그러나 무한한 가능성의 도서관 속에서, 영원히 방황할 것이다. 그리고 사유할 것이다. 그것이 나의 유일한 좌표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