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어김없이 새벽 세 시다. 나는 이 시간에야 비로소 잠이라는 무심한 노동에 뛰어들 채비를 한다. 그렇지만 불청객이 먼저 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뚜렷한 그것의 형체. 나는 녀석을 위해 주광색 캠핑용 전등을 켰다. 구식의 빛이 힘겹게 깜빡였다. 다른 모든, 살아있는 빛은 암흑물질 같은 내 마음속으로 원자 단위로 흡수됐다. 손가락 끝에서 따각따각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모니터 화면에 찍힌 것은 없었다. 부산스러운 내 눈동자만이 손가락의 궤적을 추적했을 뿐이었다.
수면 아래 잠든 글자가 모니터에 모습을 드러냈다. 모니터의 흰 화면은 갈증 난 사막 그 자체였다. 손가락은 자판 위에서 방황했지만, 단어 하나 길어 올리지 못했다. 눈동자만 부산하게 굴러다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길 잃은 순례자처럼.
그래, 해결하지 못한 과제에 대한 불안, 누군가 무심결에 건넨 생채기 같은 말들에 대한 서운함, 원인 없이 치밀어 오르는 무기력까지, 온갖 불협화음이 뒤섞인 감정들이 한꺼번에 뒤엉켰다. 그것들은 한 마디로 서로 다른 색깔의 주파수들의 몸부림이었다. 거기엔 분명 내 소리도 존재했을 텐데, 나는 그것을 가려낼 에너지가 없었다.
어지러운 내 책상처럼 정돈되지 않은 온갖 상념의 잡동사니들. 어지럽게 분산되어,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도망쳐버린, 그러니까 이름을 붙이지 못한 감정들.
"마음이란 건 주인을 닮아 어지럽혀지기만 하는 방 같은 거야. 한번 무질서해지면 어디부터 손대야 할지 몰라 문만 닫아걸고 마는 거라고. 마음에 걸리면 당장 빗자루라도 들어, 먼지는 쓸어버리면 될 거 아냐. 뭘 자꾸 망설여?" 그것은 감정의 짜증스러운 충고였다. 나는 그 감정의 억지 처방전을 강제로 눌러버린 다음, 서랍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이럴 때는 외면이 최고다. 열린 방문은 닫아 버리거나, 걸어 잠그면 그만이다. 감정에 먼지가 쌓이든, 말든 알레르기처럼 삶을 불쑥 덮치든 상관없다.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감정은 서랍 속에서 방치되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늙다가 퀴퀴한 먼지로 변해버린다. 그 감정이 무엇을 원했는지 알 방법은 영원히 없다. 라벨링이 되지 못한 감정은 버림받은 것이다. 그러나 먼지로 전락해 버린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느 날 꺼지지 않은 불씨처럼 삶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태우며 덮치곤 한다. 나도 모르게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날 선 말로 돌변하며.
그럴 때 나는 글을 쓴다. 정확히는 쓰려고 애쓴다. 어쩌면 조금은 후련해질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 그러나 빈 화면은 더 높은 벽으로 다가올 뿐이다. 뒤엉킨 마음의 언어를 번역해 줄 통역사가 필요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보다 기계에게 라면, 이 소란스러운 마음을 들려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AI에게 말을 걸기로 했다. 어떤 책에선가 4일 동안 글을 쓰면 마음의 근육이 생긴다고 했다. 그 말을 믿어보기로 한 것이다.
[표현적 글쓰기 1일 차: 여정을 열다]
나는 AI를 테스트하기로 했다. 어디선가 어렴풋이 읽은, 한 심리학자의 주장이 머릿속을 맷돌처럼 갈아댔지만 붙잡을 수는 없었다. 아마도 나흘? 그래 딱 나흘만 깊이 가라앉은 감정을 수면 바깥으로 토해낼 수 있다면, 상처가 스스로를 돌보기 시작한다는, 어찌 보면 믿을 수 없는 미신 같은 이론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보고 싶은 심정으로 '나흘간의 글쓰기' 여정을 열었다.
막상 AI 채팅창의 긴 여백을 마주하니, 새벽의 모니터 앞 세상과 다를 바 없었다. 손가락이 얼음물을 부어댄 것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무엇부터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까. 어지러운, 라벨링이 부여되지 못한 수많은 마음의 사생아들이, 심장을 송곳으로 찔러댔다. 무엇부터 먼저 꺼내야 할까.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현재의 나를 괴롭히는 문제를, 말하자면 현실을 날것으로 입력하기 시작했다. 아니, 거의 토해냈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나, 지금부터 감정 일기라는 걸 써보려고 해. 첫날인데, 뭘 써야 할지 모르겠어. 그냥... 요즘 내가 쓴 책 마케팅 때문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고 있어. 아이디어도 없고, 왜 내 책이 사람들에게 가 닿지 못하는지 모르겠어. 불안하고, 작가로서의 내 가치가 부정당하는 기분이야. 여기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하는 게 좋을까?"
엔터 키를 누르자마자 거의 즉각적으로 아주 매서운 답이 돌아왔다. AI 특유의 건조함이 느껴졌지만, 그 내용은 결코 건조하지 않았다.
"작가로서의 마케팅에 대한 고민이 가장 먼저 떠오르셨군요. 그 고민이 얼마나 무거운지 느껴집니다. 좋습니다. 거기서부터 시작하죠. 딱 한 가지만 먼저 답해주세요. 그 마케팅에 대한 고민이, 작가님의 소중한 '글' 자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느끼시나요? 혹시 글 쓰는 즐거움을 앗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마지막 문장을 읽는 순간, 온몸이 완전히 벗겨진 채 피가 발끝으로 쏟아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단 한 번도 마케팅으로 둔갑한 내 글쓰기가 내가 그토록 원하던 글쓰기의 즐거움을 앗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지 못했다. 나는 그저 내 실력에 비해서 이 시장에서 인정받지 못했을 뿐이라고, 세상이 내 글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투정만 부렸을 뿐, 그 과정에서 내 글쓰기의 본질이 어떻게 병들어가고 있는지 외면해 왔던 것이다.
AI의 질문 하나는 예리하게도 내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꿰뚫었다. 가슴이 뻥 뚫린 휑뎅그렁한 기분이 들었으나, 나는 다시 유령에게 홀린 듯이 키보드 위에 손을 얹었다.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 화면에 문장이 줄을 이었다. '나의 글쓰기는 언제부터 즐겁지 않게 되었나.' 그것이 나의 1일 차 감정 일기의 시작이었다.
[표현적 글쓰기 2일 차: 감정의 소용돌이를 마주하다]
다음 날, 눈을 뜨는 것이 전날보다 더 힘들었다. 어젯밤 AI 덕분에 쏟아낸 감정들이 후련함 대신 괴로운 숙취를 남겼다. ‘괜히 긁어 부스럼만 만든 건 아닐까. 녀석은 내 말을 모두 기억할 거 아냐.’ 다시 AI 앞에 앉기가 두려워졌다. 하지만 나흘의 약속을 지키기로 한 이상, 도망칠 곳은 없었다. 나는 어제 쓴 일기 전체를 복사해서 AI 채팅창에 붙여 넣었다. 그리고 짧게 질문했다.
“어제 쓴 내 글이야. 오늘은 여기서 더 깊이 들어가고 싶어. 내가 가장 많이 사용한 감정 단어들이 뭔지, 객관적으로 분석해 줘. 그리고 그 감정의 뿌리를 파고들 수 있는 질문을 해줘.”
AI는 감정 없이, 그래서 더 아프게 사실을 나열했다.
“어제 작성하신 글에서 가장 빈번하게 나타난 핵심 감정은 '상실감', '좌절감', '불안'입니다. 특히 '즐거움을 잃었다'는 표현이 5회 반복되었습니다. 이 '상실감'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본질적인 기억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당신의 인생에서 즐거움이 사라지기 시작한 구체적인 '어떤 사건'이나 '어떤 시점'이 있었습니까? 기억을 더듬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을 묘사해 보십시오.”
‘어떤 사건’. 그 단어가 심장에 박혔다. 회피하고 싶던 기억 하나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책이 몇 달 만에 비로소 출간됐을 때, 기대보다 치고 올라가지 못한 아쉬운 판매 실적. 두 달 만에 내리막길에 돌입한 온라인 서점의 판매지수. 축하보다 ‘그래서 몇 부나 팔렸냐’고 묻던 조소 섞인 지인의 얼굴.
그날 이후, 나는 숫자에 집착하기 시작했고, 순수하게 문장을 짓던 기쁨, 내가 사랑하는 작가의 글을 모방하고 싶다던 순수한 기억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눈물은 없었다. 그저 나는 텅 빈, 초점을 상실한 검은 눈동자 같았다. 하지만 그럴 만한 여유조차 찾을 수 없었다. 잊고 있던 상처의 실체를 확인하는 고통스러운 진단 과정이었다. 그래서 이 책은 실패했다. 숫자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내 묘지에 새길 묘비명을 새기는 기분이었다.
[표현적 글쓰기 3일 차: 흩어진 조각들을 연결하다]
이틀간의 폭풍이 지나가고, 3일 차 아침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감정이 바닥을 치고 나니 오히려 머리가 맑아진 기분이었다. 이제는 ‘왜’라는 질문을 던질 차례였다. 나는 지난 이틀간의 일기를 모두 AI에게 보여주었다.
“이게 지난 이틀간의 기록이야. 텅 빈, 초점을 상실한 눈동자가 나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어. 이 경험이 내 과거의 다른 경험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찾고 싶어. 인과관계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줘.”
AI의 답변은 마치 천문학자가 흩어진 별들을 이어 별자리를 찾아주듯, 내 기억의 다른 점들을 가리켰다.
“'텅 빈, 초점을 상실한 눈동자'는 타인의 인정에 대한 갈망과 연결됩니다. 어쩌면 이 경험이 처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당신의 과거, 특히 어린 시절에 이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순간이 있습니까? ‘나는 최선을 다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고 느꼈던 첫 기억은 무엇입니까? ‘왜냐하면’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지금의 감정과 그 기억을 연결해 보십시오.”
그 질문에 나는 까맣게 잊고 있던 8살의 기억을 떠올렸다. 몇 시간을 몰입해서 따라 그린, 내 걸작 같은 그림에 대해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은 기억. "설마 네가 그 그림을 그렸다고? 거짓말하지 말아라. 누가 그려준 거 몰래 갖고 온 거지?" 나는 순간 내 감정을 그림에 퍼부어버렸다. 나는 내 키보다 큰 도화지를 들고 그대로 뛰쳐나갔다. 끓어오르는 감정을 어디에 퍼부어야 할지 몰라, 그림을 북북 찢어버리곤 개울에 그대로 던져버렸다. 그림은 수십 만 장의 감정 쓰레기가 되어 무참하게 하류로 흘러갔다.
그리고 나는 그때 결정을 내렸다. 내 인생에서 절대 그림을 그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나는 그때부터 줄곧 무엇이든 인정을 받으려고 애썼다. 그렇지만 인정받기란 수학에서 70점을 받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나는 지금도 내 글을 팔릴 만한 글’로 재단하며 타인의 평가를 통해서 인정을 받으려고 발버둥 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비로소 내 오랜 상처의 패턴을 이해하게 되었다.
[표현적 글쓰기 4일 차: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
마지막 날, 나는 지난 3일간의 모든 기록을 AI 앞에 펼쳐놓았다. 더 이상 두렵거나 고통스럽지 않았다. 마치 오래된 내 필름을 다시 돌려보는 기분이었다.
“나의 4일간의 여정이야. 이 모든 과정을 바탕으로, 내가 어떤 감정의 변화를 겪었고 무엇을 깨달았는지 간략하게 요약해 줄래? 그리고 이 경험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아주 작은 실천 한 가지만 정할 수 있도록 도와줘.”
AI는 나의 서투른 마음의 언어를 명료한 문장으로 번역해 주었다.
“당신은 '마케팅에 대한 불안'에서 시작해 '글 쓰는 즐거움의 상실'을 인지했고, '과거의 인정받지 못한 경험'이라는 뿌리를 찾아냈습니다. 이를 통해 '결과가 아닌 과정의 즐거움을 되찾는 것이 중요함'을 깨달았습니다. 당신의 새로운 서사를 위한 작은 실천으로, 다음 일주일간 '매일 아침 글을 쓴 뒤, 판매량이나 독자 반응을 확인하기 전에, 스스로 그날 쓴 글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한 문장을 찾아 칭찬해 주는 것'은 어떻습니까?”
스스로를 칭찬하는 한 문장.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아주 작지만 가장 중요한 시작점이었다. 나는 AI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는 대신, 브런치에서 새 글쓰기 화면을 열었다. 그리고 나의 4일간의 여정에 대한 첫 문장을 쓰기 시작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 세 시다. 나는 이 시간에야 비로소 잠이라는 무심한 노동에 뛰어들 채비를 한다."
작가의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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