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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Jun 17. 2016

2편. 신의 죽음, 허무주의를 끌어안다.

이진우의 <니체의 인생 강의>

주인공으로서의 삶


우리는 모두 은막의 주인공이다. 무대를 점령한 강한 카리스마를 지닌 배우처럼, 우리는 무대의 이곳저곳을 종횡무진 뛰어다니며 치열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태양은 언제나 한 사람의 존재를 따라다니며 그들만을 위한 집중된 조명을 비춰주고, 그를 둘러싼 주변인들은 주인공이 펼치는 '인생 절정의 연기' '속마음을 감춘 거짓 외면'에 열광하며 박수를 보낸다. 우리는 주인공이며 동시에 엑스트라인 무대를 즐긴다. 각자를 향한 환호성과 박수에는 높고 낮음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것에 감동하며 환한 표정을 감추고 싶지 않다. 늘 웃으며 기쁨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 그런 삶을 살고 싶다. 우리는 모두 인생의 주인공이니깐......



치열했던 하루를 마감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외부의 모든 공기와 우리를 밀착했던 외부 세력들로부터 이제 안전하다. 사회, 직장, 가정에서 원하는 모습으로 살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가면을 바꿔가며 하루를 버티었던가? 감정과 육체의 에너지를 모조리 소모한 후, 잠시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한가한 시간이 찾아올 때, 우리는 가끔 삶이 비어있음을 느낀다. 처진 눈을 감는다. 내가 앉아있는 작은 공간이나마 혼자서 소유하고 싶은 감정이 일어난다. 잠시 동안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외로워지고 싶어 진다. 이러한 감정이 허무한 것일까?



삶의 무대에서 우리는 모두 주인공이다.



인생을 덧없이 허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삶의 주인공으로의 영롱한 빛의 조명을 받으며 살아간다. 빛이 있으면 반드시 어둠이 따른다. 광채가 나도록 빛을 오랫동안 받은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모두 어둠의 양면성을 지닌다. 빛의 밝기는 사람에 따라서 차이가 있겠지만, 어둠 속에서 우리는 평등하다. 그 어둠 속에서 느끼는... 인생의 종착지에 다다른 것과 같은 공허한 감정이 바로 허무주의다. 금수저이든, 흙수저이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소유할 수밖에 없는 감정이 바로 허무주의다.


 

신은 죽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강렬하게 외쳤다. 기존 기독교적인 가치관에 엄청난 반기를 든 셈이다. 절대적인 진리이며 가치관이라 믿었던 '신'이 무너졌다고 주장한 것이다. 니체는 스스로 모든 것을 사실대로 정직하게 이야기했다. 그는 목사의 아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수치라 여겨질 수도 있는 사실들을 폭로하는 정직성을 보였다. 사실이란 것은 무엇일까? 이 세상에 내가 실존하는 것,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 다른 사람들과 같이 더불어 살아가며 소통을 하는 것, 아마도 우리가 실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실체, 현상을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대들은 밝은 대낮에 등불을 켜고, 시장을 달려가며 끊임없이 '나는 신을 찾고 있노라!', '나는 신을 찾고 있노라!'라고 외치는 광인에 대해 들어본 일이 있는가?

종교적인 의미에서 신은 현실을 초월한,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저 너머 영역에 존재한다. 이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믿음에 근거한다. 인간의 믿음에 따라서 신은 마음에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당시의 사회상을 돌아보자. 기독교는 부패했고 폭정을 휘두르고 있었다. 지성인들은 기독교 자체적으로 우러나오는 자성의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원래 기독교라는 종교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지고 있었다. 그러한 비판의식으로 '신은 죽었다.'라는 통렬한 주장이 나온 것은 아닐까?










신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서 구체적으로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의 세계는 허무한 감정을 낳을 수 있다. 신을 믿지만, 실체를 확인할 수 없고, 깊어져 가는 믿음에 대한 불확실함은 더욱더 허무한 감정을 초래하게 된다. 결국 '신은 죽었다.'는 인간 스스로 자기 자신을 성찰하며, 존재할지도 모를 신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주체적인 의식을 바탕으로 능동적인 삶을 살아가라는 니체의 위험한 조언이 아닐까? 니체야말로 자기계발의 시초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신은 죽었다는 말이 우리에게 더 이상 충격적이지 않다는 느낌이에요 - P.36



우리는 아무에게도 묻지 않는다. 신이 왜 죽었고, 언제 죽었는지 궁금하지 않다. 단지 세속화된 시대, 즉 물질의 가치가 숭상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신은 니체가 죽이지 않았어도, 인간 스스로 죽일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을지도 모른다. 저자는 신을 창조한 것도 인간이고, 그것의 존재를 부정한 것도 인간이라고 말한다. 죽음 이후에나 확인할 수 있는 보이지 않은 가치보다는 현재의 삶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라고 그는 일침을 한다.



우리는 허무하다.


개인적으로 열광하는 영화 한 편이 있다. 이 영화는 너무나 잔잔하고 조용하다. 이렇다 할 사건도 없고 갈등의 요소도 없다. 너무나 지루하고 따분한 영화지만, 지칠 때마다 쉬고 싶을 때마다 찾는 영화다. 야근과 철야가 반복되는 끝도 없는 자신과의 싸움을 벌일 때마다, 잠시나마 마음의 위안을 안겨주었던 영화였다. 





영화 속 인물들이 거주하는 작은 섬에서 시간은 인간에게 더 이상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 이곳에서 조급함은 용서되지 않는다. 이곳에 머무는 모든 사람들은 느리고 단순하게 살 것을 명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섬을 찾는 사람은 모두 도시에서 치열한 삶을 살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도시의 숨 가쁜 도시의 삶을 포기하고 조용한 섬을 찾는다. 그리고 그들은 공허함이 전달하는 긍정적인 매력에 빠진다. 그들에게 있어서 공허함이 전달하는 매력이란 극단적으로 허무한 형태는 아니었다. 삶을 포기하기 위하여 도시에서 도망친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자신의 내면이 전달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위하여 섬을 찾은 것이었다. 그들은 허무한 감정에서 인생의 돌파구를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다음 두 세기의 역사다. 나는 다가오고 있으며, 더 이상 다르게 올 수 없는 것을 기술한다. 허무주의의 도래." - P.36



허무주의를 예견했고 우리의 현실에 있어서 허무주의는 필연성이라는 것이다. 니체가 살았던 시대의 사람들은 허무주의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두 세기가 지난 현대인들은 그의 예언대로 허무주의에 시달리고 있다. 삶을 살아야 할 아무런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면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가? 삶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생명을 위협당하는 고난의 위기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인가? 







허무주의는 그의 예언에 따라서 현실의 우리가 맞서 싸울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것이다. 그것은 실존적인 물음에 해당한다. 당시에는 인정받지 못했던 가치는 지금에 인정받고 있다. 이렇듯 진리라는 것도 시대에 따라서 시간의 물결에 따라서 재창조되는 것이다. 타당성의 가치를 후대에 인정받았다.



세속화 시대


"허무주의는, 너희가 믿는 것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이런 세속화 시대의 허무주의는 우리에게 다가올 무시무시한 손님 중 하나일 것이다." - P.37



우리는 세속화 시대에 살고 있다. 세속화는 삶을 초월하는 영적의 세계에서 모든 것이 물질의 가치로 평가되는 시대를 말한다. 저자는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대표적인 세속화의 사례로 꼽고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모든 지표는 물질적 가치, 즉 부로 평가된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나누는 이분법과 같은 구조에 따라 우리는 스스로를 금수저, 흙수저라 나누고 있으며 그것에 따라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잘 산다고 하는 것은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닌, 물질적으로 부유한 삶을 의미할 것이다. 이것은 현대인이라고 한다면 항상 고민하고 있는 문제다. 물질적인 가치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에서 신은 자신의 자리를 과연 차지할 수 있을까? 잘 살기 위해서, 생존의 문제가 걸린 상황에서 신을 생각할 수 있을까? 우리가 신을 버린 것은 두 세기 이전의 니체가 예견한 일이지만, 현재 그의 폭로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세속화는 우리의 중심 가치가 신과 같은 초월적 영적 가치에서 물질적 가치로 넘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종교적 가치가 아니라 물질적 가치가 중시되는 시대가 바로 세속화 시대입니다. - P.39

우리는 어떤 물품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소비하는 것입니다. - P.40



우리는 버려야 한다. 그리고 단순하게 살아야 한다. 물질적인 소유욕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물질적인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발목을 붙든다. 



자아라는 것이 알고 보면 자신이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하지, 실재가 아니라는 거예요. 실체로서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자아 탐구에 너무 몰두하지 말고, 오히려 자아를 망각해버리고 지금 하고 있는 활동에 집중하면 자신도 모르게 자아를 만들어내고 발견할 것이다.' 이것이 니체의 관점입니다. - P.41



내면을 찾겠다고 그렇게 몰두했는데, 결국 그것은 현실을 떠나려고 했던 부정의 허상이란 말인가? 내가 자아 - 내면 - 에 집중했던 것은 니체에 의하면 소모적인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내면에 파고드는 초월적 행위보다는 현재의 삶에 충실하고 주어진 자리에서 역할을 다한다면 자아는 저절로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신기술이 인간의 삶을 지배하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더 이상 초월적인 자아, 삶의 의미를 떠나기 시작했다. 오직 부를 창출할 수 있는 방법, 물질을 축적하기 위한 방법에 몰두하고 있다.



누가 신을 죽였는가?


"새로운 시대의 종교의 토대가 되는 것은 신 자체가 죽었다는 감정이다." 이렇게 이야기한 사람이 바로 서양 형이상학을 완성한 헤겔입니다. 독일 관념론의 상징인 헤겔도 막연하게 신의 죽음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니체가 아주 극적으로 연출한 겁니다. - P.43





신은 인간이 만들었고, 인간 스스로 파괴했다. 니체는 대양, 지평선, 태양 등 세 가지 비유를 들어 신을 설명했다. 태양은 생명의 근원, 지평선은 사물을 사물로 보이게 하는 조건을 의미한다. 사물은 너무 환한 대낮에는 볼 수 없다고 한다. 지평을 넓혀 주었다. -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했을 때 - 라는 것은 사물을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장을 열어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양은 영원과 무한성을 상징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믿었던, 모든 가치가 무너지는 순간을 상상해보자. 내가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가치가 무너지는 것이다. 결국 신이 죽었다고 하는 것은 실제 현실을 내가 현실이라고 자각하는 과정이라고 하이데거의 말을 빌려 설명한다. 즉 모든 형이상학적인 근거를 버리는 것이라고 한다.



신이 죽었다는 말은 우리 삶의 모든 근거가 발밑에서 사라져버리고, 우리가 의지하고 믿었던 중심이 없어져버리고, 우리가 사물을 인식할 수 있게 해 준 지평선이 사라져버렸다는 의미입니다. - P.46



신이 무너져 내렸을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허무주의에 묻혀있을 것이 아니라 대안을 찾아야 한다. 우리 스스로 삶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목표가 없는 삶이 허무주의다. 그 어느 것도 진리가 아니다. 수동적 허무주의는 왜라는 질문을 묻지만 스스로 대답을 하지 못한다. 답을 스스로 찾지 못한다는 것은 무능력을 뜻한다. 



의미 없는 존재의 의미 부여가 바로 너의 삶이다. - P.50



진리를 부정하라


극단적이 돼라. 어떤 문제든지 끝까지 물고 늘어져라. '신은 죽었다'의 궁극적인 의미는 기존의 절대적인 진리라 믿었던 사실들을 부정하고, 자신의 주체적인 자세로 인생을 사유하라는 것이다! 하나의 이론과 해석에 집착하지 말고, 나만의 진리를 찾아야 한다.



너무 정신적인 가치에만 몰두하지 말아야 해요. 정신적인 가치에만 몰두하면 우리가 몸의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미쳐버릴 수도 있습니다. - P.54

신이 죽는 다면 네가 바로 인격이 되고 네가 바로 너의 자아를 찾게 될 것이다. - P.55




결론


'신의 죽음'이 의미하는 것은 관점을 자기 자신으로 전환하라는 니체의 조언일 것 같다. 현재의 삶에 보다 충실하고 어떠한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말 것이며, 자주적인 힘으로 삶을 조각하는 예술가가 되라는 니체의 현실적인 조언이다. 



신조차 이제 자신이 기댈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 순간 허무주의가 찾아온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의욕조차 가라앉고 만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주저앉아 있어야 할까? 당장 오늘 목숨이 사라질 위기에 처한 '아우슈비츠' 죽음의 수용소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내면을 잃은 사람들은 죽음의 가스가 그에게 닥쳐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목숨을 포기하고 말았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어떤 사람들은 희망을 찾고, 어떤 사람들은 삶을 포기한다. 두 종류 사람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스스로 찾는 것이다. 내가 왜 살아야 하고, 지옥과 같은 곳에서 어떻게 생존할지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하고 해답을 찾는 사람들이다.





저자는 허무주의를 설명하며, 수동적 허무주의와 능동적 허무주의 두 가지를 설명했다. 수동적인 사람은 허무주의가 찾아왔을 때, 자신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실망하며 스스로를 자책한다. 능동적인 사람은 자신의 삶을 부정하지 않고, 고통조차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역경을 스스로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창조한다. 니체의 허무주의는 인간 스스로가 주체적인 의식으로 위기를 견딜 수 있는 용기를 말하고 있다. 신이 없음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설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결국 '신은 죽었다.'는 인간 스스로 문제의식을 일으키고, 기존에 존재하던 절대적 가치들을 부정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주인으로서 행복하게 살아가라는 가르침이 아닐까? 그것이 내가 얻은 니체의 '신의 죽음'과 '허무주의'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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